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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이종호
먼저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미리 밝혀두자면, 나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강금실 후보를 찍지는 않을 것이다. 내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순전히 내가 그의 '열렬한 팬'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를 놓고 얘기할 때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강금실'이 아주 좋은 소재가 될 것 같아서이다.

내가 강금실의 '열렬한 팬'이 된 이유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자. 강금실은 왜 그리 인기가 높았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는 법무장관으로서의 '원칙'에 철저했기 때문이다.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은 언제나 시대의 화두가 되었지만, 이를 실질적으로 진척시킨 적은 헌정사상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젊은 여성 변호사가 장관이 되더니 야무지게 이 일을 밀고 나간 것이다.

법원까지 아우르는 사법개혁은 아직 요원하다고 할지 모르나, 적어도 검찰에 관한 한 그래도 적지 않은 성과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검찰에 대한 지도 '능력'이 아니라, 개혁에 대한 확고하고도 비타협적인 '의지'이다. 이것이 강금실을 '강금실'답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다.

그가 여성판사 출신의 돋보이는 법조인이라는 점도 아주 큰 장점이다. 내가 주변에서 만나본 소위 전문가 집단 사람들이 노무현 정권을 좋지 않게 보는 이유는 무척 단순했다.

"내가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여기까지 오르는 동안, 화염병이나 들고 데모한다고 쫓아다니던 망나니 운동권들이 갑자기 나라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니 이게 말이나 되느냐?" 이게 핵심이다.

다소 웃기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돈 땅 사면 배 아픈 게 인지상정이다. 참여정부에 대한 과도한 비난과 비판의 요체가 이 틀을 벗어나는 경우를 나는 본 적이 별로 없다. "386 운동권 출신들이 뭘 안다고?"라는 게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의 거의 한결같은 결론이다.

대통령이 대학은커녕 상고출신이라는 '원죄'까지 가세하면 소위 배웠다는 전문가들이 현 정부를 좋게 볼 이유는 줄어든다. 최대 일간지라는 <조선일보>는 이런 심리에 기름을 부으며 (어쩌면 그들이 가장 배가 아팠을 게다) '이론적 정당성'을 마련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것은, 대통령이 매우 적절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대한민국의 독립과 자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훼손하는 것과 바로 똑같은 이유로, 보수진영의 이와 같은 과도한 '좌파매도'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역사를 통째로 부정하는 짓이다.

사실 그들은 한번도 이 땅의 민주화 운동을 정당하게 평가한 적이 없다. 설령 운동권 출신이 '무능'하다고 하더라도, 그 무능함이 과거 정권들의 부도덕함이나 헌정파괴 행위에 비할 바가 아니지 않은가. 무능함은 그리 자랑할만한 것은 못 되지만, 그렇다고 죄악스러운 것은 전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전문능력을 갖춘 운동권 세대들이 유능하게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인재들은 조·중·동의 주장과는 달리 아주 많다. 강금실은 그 대표주자라고 할만하다. 민주화의 세례를 받고 386의 마인드를 갖춘 사람이 훨씬 더 대한민국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다는 산 증인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는 그의 열렬한 팬이 된 것이다.

'87년 체제 극복'이라는 화두와 강금실

강금실의 인기가 법무장관 시절 이효리를 능가한 또다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새로운 시대의 리더쉽을 보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란 한마디로 말해서 '포스트 87년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정치권에서 간간이 흘러나오는 개헌논의와도 무관하지 않다.

87년 6월 항쟁은 이미 약 20년 전의 일이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도 한국사회는 여전히 '87년 체제'의 틀에 갇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7년 체제'의 핵심은 민주/반민주의 대립구도이고 그 속에서 민주화를 완수하는 것이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 직선과 개헌, 이후 97년 정권교체와 노무현의 당선 등으로 형식적인 민주화는 많이 진전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는 민주/반민주의 대립구도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민주화를 주도했던 세력들의 혁신을 요구하기도 한다. 통칭 '민주화 세력'이 정권에 오른 것도 두번이고 진보정당이 원내에 당당하게 진출한 것을 보면 모든 문제를 87년 식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지금 시기는 '87년 체제'의 낡은 틀이 한국사회의 진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볼 수 있다. 그 한 축에는 독재정권 하에서 온갖 권세를 누려온 수구세력이 존재하고, 다른 한 축에는 여전히 혁신하지 못하며 국민들에게서 신뢰를 잃어가는 민주화 세력이 존재한다.

한나라당이나 <조선일보> 같은 세력은 진작에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이지만, 여전히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우리가 일본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도록 주문하는 것과 아주 똑같은 이유로, 헌정파괴 행위를 일삼았던 이들에게 통렬한 자기반성과 사죄, 역사적·사법적 심판을 다그쳐야 한다. 그런 한편으로 우리는 민주노총으로 대변되는 노동운동 또한 조합주의적인 파업만으로는 더이상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이 둘의 존재는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두를 혁파하지 않고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논할 수는 없다. 사실 '87년 체제'의 그늘은 정치권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석구석에 아직까지 그 어두운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선진국으로 진입하려는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는 요소들은 대부분이 여기 포함된다.

따라서 앞으로 개헌논의가 진행되더라도 그것은 단지 헌법의 잣구 몇 개를 바꾸거나 권력구조를 변경하는 문제로 국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87년 헌법이 민주화라는 시대적 소명을 담았다면 새로운 헌법은 '87년 체제'를 극복할, 통일한국 시대를 맞이할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아야 한다. 그 과정은 사회 전반에 걸친 철저한 개혁을 동반해야 하는 과정이어야 하며 새로운 가치관을 공유하고 만드는 과정이어야 하기 때문에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새로운 시대정신이 무엇인가를 딱 잘라 말하기에는 나의 역량이 너무나 모자란다. 그러나 몇 가지 모티브를 찾아볼 수는 있다. '87년 체제'는 개인보다는 조직이나 집단이 우선시되는 체제다. 그리고 남성적이다. 군사독재에 맞섰던 운동권 조직이 역설적이게도 군대문화를 적잖이 답습한 것은 비극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 물결치고 있는 '개성'(물론 획일화된 면이 많지만)이라는 화두는 '87년 체제'에 대한 반작용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민주화라는 역사적 과제가 던지는 심각함에 짓눌린 (독재정권에 의해 더 심하게 짓눌린 게 사실이지만) '문화'에 대한 욕망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집단적이지 않은 개인의 개성과 이들이 발산하는 문화는 이미 '87년 체제'를 넘어서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아직 사회 전반적인 제도와 관습은 그렇지 못하다.

'여성성'이 새로운 화두로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남성적이고 전투적인 사회적 대립관계는 더이상 매력이 없다. '한류'로 통칭되는 이른바 '소프트 파워'는 다분히 여성적이다. 보아와 대장금, 겨울연가가 그 선두에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강금실은 이 모든 면에서 많은 사람의 기대를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그는 전형적인 386투사가 아니면서도 그 기본 마인드를 공유하고 있으며, 때로는 패션리더로서 또 때로는 춤꾼으로서 그 넘쳐나는 문화적 끼를 확인시켜 주었다.

그런데, 강금실다움은 다 어디 갔는가

그런데 서울시장 선거에 나선 강금실은 예전의 강금실이 아니다. 시대정신에 투철하고 문화적 끼가 철철 넘치는 차세대 리더쉽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정치'꾼' 강아무개만 보일 뿐이다. 오세훈 한 방에 지지율은 반토막이 나 버렸다. 왜일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강금실의 선거운동이 전혀 강금실답지 않기 때문이다. 본인이나 관련자들은 예전부터 가장 강금실다운 선거를 치르겠다고 했지만, 정작 그들은 강금실다움의 요체가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요컨대, 강금실다움의 정수는 '시대정신의 화신'이라는 것이다. 강금실에게서 이것을 빼면 그는 그저 연예인 강효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서울시장 선거에서 보여줄 강금실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그 대답은 이미 열린우리당이 훨씬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수도이전'이다. 서울이 떠안고 있는 오만가지 문제의 근본원인은 서울집중이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 이미 박정희 시절부터 얘기되어 온 게 아닌가. 부동산, 교육, 교통, 환경, 어느 것 하나거의 예외 없이 가장 획기적이고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수도이전 이외에는 없다. 그래서 대선공약으로까지 나온 게 아닌가.

비록 지금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수도이전'을 할 수는 없지만 행정수도 건설과 맞물려 그 원래의 취지를 충분히 살릴 수는 있다. 이를 기반으로 해서 통일한국 시대 새로운 서울의 상을 수립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다. 수도 서울의 정치·행정적 부담의 과감한 지방 이전이야말로 가장 '강금실다운' 정책방향이 아닐까.

나는 왜 강금실의 캐치프레이즈가 "수도 서울을 동북아의 뉴욕으로!"라고 하지 않았는지 의심스럽다. 물론 아직도 여기에 대한 거대한 저항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면으로 설득하고 돌파해야 할 문제다. 그게 '강금실다움'이다.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수도이전을 추진했더라도 그렇게 엄청난 반대를 했을까.

서울의 기능을 분산하는 것은 단지 외형적인 역할분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수도이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것은 누구 말마따나 세종로를 따라 죽 늘어선 보수언론과, 강남에 집을 몇 채씩이나 가지고 있는 기득권들의 부당한 권세, 그리고 그 속에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부패의 고리를 해체하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 강금실이야말로 이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할 기대주가 아니었던가. 강남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각종 정책이 실패할 수밖에 없을지 모르지만, 시대정신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강금실은 더이상 강금실이 아니다.

강금실 전 장관의 열렬한 팬으로서 나는, 아니 많은 사람들은 강효리가 아닌 강금실을 원하고 있다. 승리하는 강효리가 되기보다 패배하는 강금실이 되기를, 그가 진정 '지더라도 아름다운 패배자'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ps. 한강대교 중 적어도 하나는 차 없는, 사람만 다니는 다리로 만들 수는 없을까? 그 위에서라면 약간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라도 푸른 한강물 위로 번지점프하러 달려가련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인터넷 한겨레 필진 네트워크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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