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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교 시인의 시집 <독작> 표지
박시교 시인의 시집 <독작> 표지 ⓒ 작가
사람의 삶을 '나무'에 비기는 표현을 종종 접하곤 한다. 그만큼 나무는 사람을 닮았다. 그저 사람을 닮은 것이 아니라 큰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나무이다. 그러나 정작은 나무가 사람을 닮았다기보다는 사람이 나무를 닮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무도 아름드리쯤 되면 사람이다
안으로 생각의 결 다진 것도 그렇고
거느린 그늘이며 바람 그 넉넉한 품 또한
격(格)으로 치자면 소나무가 되어야 한다
곧고 푸르른 혼 천년을 받치고 서 있는
의연한 조선 선비 닮은 저 산비탈 소나무
함부로 뻗지 않는 가지 끝 소슬한 하늘
무슨 말로 그 깊이 다 헤아려 섬길 것인가
나무도 아름드리쯤 되면 고고한 사람이다

- 박시교의 '나무에 대하여' 전문


소나무의 덕성을 이야기한 시들은 옛 작품들 속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대표적인 작품이 윤선도의 <오우가> 중 그 한 수에 있다.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구천의 뿌리 곧은 줄을 글로 하여 아노라" 고산 윤선도가 소나무의 덕성을 외적 조건이나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강직함에서 그 인간적 면모를 찾았다면, 박시교 시인은 소나무에서 풍겨 나오는 내적인 다스림과 그 내면의 깊이를 헤아려본다. 사람들을 향한 베풂과 포용의 덕도 찾아보고 의연하며 가지런하고 삼가는 몸가짐의 선비의 풍모도 찾아낸다. 다시 한번 되뇌어본다.

"나무도 아름드리쯤 되면 사람이다."
"나무도 아름드리쯤 되면 고고한 사람이다."


아름드리 사람. 고고한 사람.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살다간 사람, 살아가는 사람을 우러른다. 그러나 정작 소나무는 그러한 우러름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고 받을 줄도 모르고 받는 줄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소나무는 고상하거나 특별한 자리에 있지 않다. 그저 저 깊숙한 산사 입구를 수천 년 지키고 서 있거나 벼랑 같은 데 샘터 같은 데 시골 논밭 야산 근처나 뒷동산 뒤뜰 같은 데 그 뿌리 내려놓고는 놀라운 생명력으로 세월을 이겨가며 그렇게 늘 평범하다 싶은 자리에서 제 삶 펼쳐온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이처럼 소나무는 흔하다. 어쩌면 이 흔하고 흔한 소나무의 삶의 모습은 꼭 선비들의 삶만은 아닐 것이다. 평범하지만 한결같이 제자리 묵묵히 지켜가며 사람들을 향해 보이지 않는 베풂을 하며 주어진 삶 살아가는 서민적 삶의 모습을 닮은 것이 '소나무'인지도 모른다. 굽으면 굽은 대로 펴면 편대로 그 뿌리내려 꿋꿋이 살아나가고 있는 저마다의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소나무'의 형상인지도 모른다.

'벼랑 같은 데'라는 말이 나왔으니 내친김에 '절벽'이라는 시 읽어보자.

누구나 바라잖으리
그 삶이
꽃이기를,
더러는 눈부시게
활짝 핀/감탄사기를,
아, 하고
가슴을 때리는
순간의
절벽이기를

-'절벽' 전문.


이 시에서 '바라잖으리'는 '바라지 않겠느냐'로 풀이해야 적절할 것이다. 인간이면 누구나가 바라는 삶, 갈구하는 욕망은 크게 다를 게 없다. 더러는 우러름을 받는 이가 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우러르는 이들이 다수이다. 이 우러르는 이들이 있어 우러름을 받는 이가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 우러르는 일, 참으로 우러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우러르는 이와 우러름을 받는 이 또한 크게 다를 게 없다.

'꽃'처럼 활짝 피고 가는 삶, 감탄사 절로 나오는 삶, 탄성 같은 삶. 고공에서 내려다보거나 지상에서 올려다보는 절벽의 깊이와 높이 같은 장엄과 경이를 꿈꾸는 것이 인간의 삶인지도 모른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지만 정작 속내는 그 정반대일는지 모른다.

'꽃'은 아니지만 '감탄사'는 아니지만 '절벽'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 반대편에 서서 우러르는 것이 진정한 삶은 아니냐고 우러름을 받는 삶보다는 우러르는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냐고 시인은 반문하는 듯하다. 이러한 반문들 끝에 이 시의 고갱이가 있다.

독작

박시교 지음, 작가(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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