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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가 아닙니다. 천년을 산다는 은행나무의 꽃입니다
벌레가 아닙니다. 천년을 산다는 은행나무의 꽃입니다 ⓒ 김관숙
간밤에 비가 많이 왔습니다. 바람까지 불었던지 주보 접으러 가는 길에 보니까 길은 온통 푸른 은행나무의 꽃들로 덮여 있습니다. 언뜻 보면 벌레 같습니다. 그런 은행나무의 꽃들을 보자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목이 움츠러들면서 그 옛날 중학교 시절, 동네 남자 친구인 동갑내기 '빼빼'가 생각납니다.

은행나무의 꽃들이 길을 파랗게 물들여 놓았습니다
은행나무의 꽃들이 길을 파랗게 물들여 놓았습니다 ⓒ 김관숙

은행나무의 꽃들이 도로를 따라 갔습니다.
은행나무의 꽃들이 도로를 따라 갔습니다. ⓒ 김관숙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단짝인 친구와 같이 골목길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빼빼가 나타나 교복 주머니에서 뭔가를 한 주먹 꺼내 우리에게 확 뿌리고 달아납니다. 차갑고 뭉클한 그것을 얼굴에서 쓸어낸 순간 나는 그만 기겁을 했습니다. 벌레들입니다. 꾸물대는 푸른 벌레들.

나는 몸 여기저기에 붙은 벌레들을 털어내느라고 정신이 없는데 내 단짝은 얼굴에 착 달라붙은 벌레가 무섭지도 않은지 책가방을 던져놓고 빼빼를 숨차게 쫓아갑니다. 그제야 나는 벌레를 자세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게 벌레가 아니고 버들강아지 사촌, 아니 팔촌 같은 식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은행나무 꽃을 보았습니다.

힘 좋고 달리기 잘하는 내 단짝 손에 빼빼가 끌려 왔습니다.

"니들이 맨날 빼빼라고 부르니까 그렇지!"
"야, 임마 그럼 니가 빼빼지 뚱보야? 빨랑 사과 못해?"

단짝이 소리치자 빼빼는 찍 소리도 못합니다. 소란에 이집 저집 창문이 열리고 고교생인, 역시 그도 빼빼인, 빼빼 형이 달려왔습니다.

"머야 머?"

딱 버티고 섭니다. 움찔 하면서 한 발 뒤로 물러서는 나를 내 단짝이 제 옆으로 바짝 끌어당기더니 고 예쁘고 깜찍한 작은 얼굴을 반짝 들고 기세등등하게 나갑니다.

"오빠도 알잖아, 은행나무 꽃 보면 재수 없다는 거! 근데 빼빼가 내 얼굴에다 확 뿌렸단 말야! 어떻게 생각해?"
"어휴 이눔을 그냥---."

이번엔 빼빼가 머리에 알밤이 콩콩 박히며 형의 손에 끌려갑니다. 나는 단짝한테 물었습니다.

"이상하다, 빼빼 형이 왜 니 편을 드니?"
"나한테 연애편지를 보냈거든."

"그니까 답장 아직 안했단 말이네."
"영원히 안 할 거야. 빼빼 형은 뭘 몰라도 한참 몰라. 우리 할머니 말씀이 은행나무 꽃을 보면 재수가 없거나 나쁜 일이 생긴다는 말은 괜한 말이고 장수를 한데. 은행나무는 천년을 사니까."

"그럼 너랑 나랑 천년 살겠네, 은행나무 꽃으로 맞았으니까."
"떨어진 거 말고 나무에 핀 거 말야."
"그럼 오백 년!"

단짝과 나는 킥킥거렸습니다.

그 내 단짝은 내가 사는이야기에 올렸던 글 '함박눈 속으로 하얀 우체통이 보입니다'에 나오는 친구입니다. 얼마 뒤 단짝네는 이사를 갔습니다. 그러나 단짝은 훗날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빼빼 형과 결혼을 했습니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인 여고시절 남자친구를 가슴에 깊이 묻고는 말입니다.

벌써 주보 접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르신들께 인사부터 하고는 뒤쪽 현관문으로 나가서 마당에 모셔진 성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는데 할아버지 두 분이 마당을 질러 성당으로 가고 있습니다.

"참, 아주머니 좋아지셨다면서? 아침에 마누라가 그러대."
"그래서 오늘 데리고 나와 꽃을 보여주려구 했는데 그 눔의 빗줄기가 그 탐스런 꽃들을 싹 털어 버렸으니. 어구 속상해!"

"그럼 다른 데라두 모시구 가. 요즘 좋은 데 많잖아. 왜 하필 집 앞에 꽃야?"
"해마다 그 나무에 핀 꽃을 보고 좋아했는데 올해만 건너는 게 안됐잖아."

은행나무의 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팔순이신 그 할아버지가 사는 동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무조건 성당 마당을 나와 할아버지가 사는 동으로 가 봅니다.

너무 아름다워 바라만 보았습니다
너무 아름다워 바라만 보았습니다 ⓒ 김관숙
아, 겹 벚꽃들이 지천입니다. 송이째 떨어졌습니다. 너무 아름다워 눈이 부십니다. 나는 차마 밟지 못하고 바라만 봅니다. 할아버지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을 할머니에게 보여드리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분입니다.

송이째 떨어져 가슴이 아픔니다.
송이째 떨어져 가슴이 아픔니다. ⓒ 김관숙

그래도 나는 밟고 지나가지 못 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밟고 지나가지 못 했습니다 ⓒ 김관숙
나는 꽃송이 하나를 집어 듭니다. 눈이 시어집니다. 내 남편도 나를 위해 할아버지처럼 그랬던 적이 있을까. 모르면 몰라도 비슷했던 적도 없을 것 같습니다.

남편은 투덜댈 줄만 아는 사람입니다.

"거, 멸치 김치국이나 좀 끓이지, 시원하게 말야. 콩나물국은 어제도 먹었잖아."

성당으로 돌아오자 어르신들이 그새 어디 갔다 오냐고 주보 접기가 끝난 뒤 커피 먹는 시간에 나타나는 염치가 어딨냐고 다음 토요일에는 두 배 이상으로 해야 한다고 미안함을 눅여 주는 농담을 건네옵니다. 나는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면서 재빨리 어르신들이 비운 종이컵들을 집어다가 따듯한 물을 받아 대령합니다.

오늘은 주보를 한 장도 접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르신들의 그 재미난 이야기도 듣지를 못했습니다. 대신 아름다운 추억을 만났고 아름다운 겹 벚꽃에 숨은 순수한 사랑도 보았습니다.

나와 같은 지역에 사는, 요즘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을 들락거린다는 내 단짝도 길을 푸르게 물들인 은행나무의 꽃들을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단짝이 얼른 건강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마주 앉아 오백 년 어쩌고 하고 킥킥거리던 그 시절을 이야기 하면서 다시 한번 같이 웃어보고 싶습니다.

팔순이신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보인 순수한 사랑이 무딜 대로 무디어진 내 가슴을 깨고 내 안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보석보다 더한 선물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 나는 세상이 달라져 보입니다. 이제부터는 남편이 멸치 김치 국을 끓이라고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아주 맛있게 끓여 식탁에 올릴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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