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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꽃바구니 하나에도 우리 부모님들은 그리 기꺼워 하시건만.
ⓒ 김정혜
일년 365일 중 단 하루. 온전히 반성을 합니다. 부모님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도리에 대하여 깊은 반성을 합니다. 반성이 깊어질수록 시큰거리던 코끝엔 눈물이 대롱거리고 시려오던 뼈 속으로 숭숭 구멍이 뚫립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렇게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런데 그렇듯 먹먹해지는 가슴은 올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재작년보다는 작년이, 작년보다는 올해 어버이날이 오히려 더 서러운 것 같습니다. 그건 그 세월의 두께만큼 더 따스하게 부모님을 보듬어 드리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가까이만 계신다면, 늘 뵐 수만 있다면, 그간 못 다한 효도 원 없이 한번 해보리라 마음 다 잡아 먹었던 게 엊그제 같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가까이 모시고 산 세월이 오히려 더 가슴에 사무칩니다.

가까이 계시니 하루쯤 무심하면 어떨까. 언제든 뵐 수 있으니 하루쯤 부모님을 잊으면 어떨까. 그리 보낸 세월 속에 불쑥 찾아드는 어버이날. 번쩍 정신이 들어 마주 바라본 부모님은 언제 저토록 늙으셨는지.

자식의 무심한 하루에 부모님의 백발은 더 성성해지고 자식의 짧은 외면에 부모님의 주름은 더 깊은 골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단 한순간도 서운타 어떻다 그 타는 속 시원하게 한 번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부모이기에 그리 하셨을 겁니다.

자식에 대한 서운함도 자식에 대한 노여움도 그저 당신들 야윈 가슴으로만 삭히느라 노심초사 편할 날이 없으셨을 겁니다. 그럼에도 어버이날 단 하루. 당신들 그 야윈 가슴에 달아드리는 빨간 카네이션만으로도 그리 기꺼워하시니.

어버이날을 하루 앞두고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을 영화관에 함께 모셨습니다. 옛날처럼 영화 한편 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건만.

올 초 나름대로 작정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시부모님이나 친정 부모님이나 모두 영화를 좋아하십니다. 해서 네 분 부모님께 가끔 영화를 보여 드리리라 마음을 먹었었습니다. 그러나 늘 마음뿐. 결국은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오늘에서야 네 분 부모님이 영화관에 나란히 앉으셨습니다.

나란히 앉아 계신 부모님들을 한 분 한 분 바라보았습니다. 시어머님의 얼굴엔 언제 주름이 저리 느셨는지, 그리 꼿꼿하던 시아버님의 등은 언제 저리 굽으셨는지, 친정아버지의 머리는 언제 저리 백발이 되셨는지, 아직 여름도 오지 않았건만 친정어머니의 얼굴은 언제 저렇게 까맣게 그을렸는지.

한 분 한 분 바라보자니 어느새 코끝은 찡해지고 가슴은 오그라듭니다. 생침을 넘겨가며 참으려 하건만 주책없는 눈물은 그새 볼을 타고 흐릅니다. 울긋불긋한 조명들이 화려한 요즘의 영화관이 오늘따라 참 다행입니다. 네 분 부모님은 어디 별천지에라도 오신 모양으로 사방팔방 둘러보시느라 정신이 없으십니다.

며느리의 눈에 딸자식의 가슴에 눈물이 맺혀 강물이 흐르고 있다는 걸 눈치 챌 겨를이 없으십니다. 무슨 강냉이가 이리도 고소하냐며 하얀 팝콘을 입으로 밀어 넣으시는 부모님들 얼굴이 하얀 팝콘만큼이나 환해 보입니다. 그 환한 얼굴이 자꾸만 어릿어릿해 보입니다.

▲ 맨발의 기봉이
ⓒ 태원엔터테인먼트
영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봉이가 어머니를 위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기봉의 나이는 마흔입니다. 그러나 어려서 열병을 앓은 탓에 나이는 마흔이지만 지능은 여덟살에 머문, 때 묻지 않은 노총각입니다. 기봉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엄마이고 제일 잘하는 것은 달리기입니다. 동네에서 얻어오는 음식거리를 엄마에게 빨리 가져다주고 싶은 마음에 신발도 신지 않은 채 기봉은 집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립니다.

허드렛일을 해서 번 돈을 손안에 꼭 움켜쥐고 달리는 기봉이. 그 돈을 어머니 손에 빨리 쥐어 드릴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달립니다.

기봉이가 빨래를 합니다. '노란샤쓰의 사나이'를 신나게 불러제끼며 빨래를 합니다. 벽에 드문드문 박힌 못에 빨래를 넙니다. 부서져 내리는 햇살에 빨래가 보송보송 말라가고 기봉의 환한 웃음도 덩달아 햇살에 섞여 듭니다.

오로지 엄마를 위해 달리는 기봉. 그런 기봉에게 꿈이 생겼습니다. 엄마는 이가 없습니다. 음식을 씹지 못하고 그냥 삼키는 바람에 어머니에게 위장병이 생겼습니다. 어머니에게 틀니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마라톤대회에 나가 1등을 하면 상금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상금으로 엄마의 틀니를 해주어야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꿈을 이루기 위한 기봉의 달리기는 더욱더 힘차고 더욱더 맹렬해집니다. 그러나 기봉에게 찾아든 뜻하지 않은 불행.

심장이 좋지 않다는, 그래서 달리기를 하면 안된다는 의사의 말에 기봉의 꿈을 이루어 주려던 이장은 실망하고 맙니다. 달리기를 그만두라는 이장의 말이 기봉에겐 들리지 않습니다. 어머니를 위해 평생을 달린 기봉. 더더군다나 이젠 그 달리기만 잘하면 엄마에게 틀니를 해줄 수도 있는데.

▲ 맨발의 기봉이
ⓒ 태원엔터테인먼트
드디어 대회 당일. 기봉은 달리기 시작합니다. 힘찬 말처럼 맹렬히 달리던 기봉. 어느새 숨은 차오르고 차오르던 숨이 급기야 가슴을 짓누르고 결국 기봉은 쓰러지고 맙니다. 쓰러진 기봉의 눈앞으로 엄마가 보입니다.

텅 빈 잇몸으로도 기봉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던 엄마. '엄기봉'이라 어설프게 수를 놓은 노란 머리띠를 건네며 잘 하고 오라 따스하게 잡아주던 엄마의 손. 기봉은 엄마를 부릅니다. 기봉이 흘리는 눈물 속에서 어서 오라 애타게 손짓하는 엄마를 기봉은 애타게 부릅니다.

다시 일어선 기봉은 달리기 시작합니다. 엄마를 위해 달립니다. 엄마의 텅 빈 잇몸에 틀니를 걸어드리기 위하여 달립니다. 기봉의 두 눈엔 엄마를 향한 애달픔이 서리고 기봉의 두 팔엔 엄마의 틀니에 대한 꿈이 매달리고 기봉의 맨발엔 꿈을 향한 발자국이 힘차게 찍힙니다.

영화관 안은 흐느끼는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오로지 엄마를 향한 기봉의 꿈이 아마도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어 놓은 듯했습니다. 마흔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덟 살의 지능으로 살아가는 순수한 기봉이이기에 엄마에 대한 그의 막무가내 사랑이 더 감동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봉의 사랑엔 계산이 없었습니다. 단지 엄마라는 이유하나 만으로 기봉의 사랑은 온전했습니다.

▲ 맨발의 기봉이
ⓒ 태원엔터테인먼트
지금의 저는 부모님에게 있어 과연 어떤 자식인지 스스로 되짚어봐야 했습니다. 단언컨대 기봉이처럼 막무가내로 부모님을 사랑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돈이 없다는 핑계로,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내 몸이 귀찮다는 핑계로 부모님을 외면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하여 짜증을 내기도 하고 원망을 하기도 하고 더러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보다 가까이 계시기에 소홀했던 점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떨 땐 부모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늘 바라보아야 하는 그 가슴앓이가 버거워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휑해진 부모님 얼굴을 대할 때마다, 어느 순간 멍한 눈빛으로 하늘 언저리를 헤매는 부모님 시선을 대할 때마다 부모님의 그 깊은 속내를 속속들이 채워드리지 못하는 자식의 도리에 화가 나 오히려 부모님께 짜증을 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기봉이를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기봉은 그저 엄마를 사랑했습니다. 그저 엄마 곁에 있는 게 좋았습니다. 엄마가 웃으면 기봉이도 좋았습니다.

▲ 맨발의 기봉이
ⓒ 태원엔터테인먼트
엄마를 향한 때묻지 않은 기봉의 막무가내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굳이 이러저러한 핑계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바로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란 걸 저는 오늘 기봉이를 보고서야 깨달았습니다.

영화관을 나와 네 분 부모님을 모시고 저녁을 먹었습니다. 부모님들은 기봉이 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우셨습니다. 어쩌면 네 분 부모님 모두 기봉이의 극진한 효도를 부러워하고 계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네 분 부모님께 넌지시 여쭈어 보고 싶었습니다.

'기봉이 엄마 부러우시죠?'

그러나 저는 그 질문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과연 우리 부모님들이 어떤 대답을 하실지 내심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대신 내년으로 미루어 놓았습니다. 내년 어버이날엔 꼭 여쭤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아니다'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도록 저도 기봉이처럼 부모님을 향한 막무가내 사랑을 할 수 있기를 소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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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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