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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8 장 승부(勝負)의 조건(條件)

분위기는 무거웠다. 마치 천근 바위에 깔린 사람들처럼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다.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그저 시선을 내리깐 채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었다.

"............!"

뾰쪽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분명 그들은 독 안에 든 쥐였다. 굳이 독 안에 든 쥐를 잡기 위해 독을 깨버릴 필요가 없었다. 성급하게 쥐를 잡으려 하다가 손가락을 물릴 이유가 없었고, 멀쩡한 독만 깨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싶지 않았다.

느긋하게 독을 두드리거나 흔들어대면 쥐 스스로 안절부절못하고 제풀에 지쳐죽거나 굶어죽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보다 앞으로 절실히 필요한 전력을 보전하는 길이었다. 자신들의 희생을 줄이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돌아가는 상황이 독 안에 든 쥐를 안절부절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을 급박하게 만들고 있었다. 천마곡 내부적으로나 대업을 위해 시작된 거사가 이 안의 일을 빨리 매듭짓기 강요하고 있다. 자신의 부친 역시 마찬가지.

“으음........”

절로 신음이 나왔다. 독 안에 든 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 풀에 지쳐 죽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날카로운 이빨을 세우고 자신을 물어뜯으려 한다. 궁지에 몰리 쥐가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그래도 정파(正派)라 자처하던 자들이 부상당한 동료들을 버리고 나갈 것이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헌데 그들은 서슴없이 주요전각 다섯 채를 파괴하고, 그 혼란의 와중에서 연동 입구를 장악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연동, 아니 천동의 기관을 작동시켜 그들이 천마곡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저지해야 할까? 허나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백결이 그들과 합류한 이상 섭장천과 장철궁 역시 그들과 합류할 가능성이 높았다. 늙은 생강이 맵다고 장철궁보다 위험한 인물이 섭장천이었다.

섭장천이 지금까지 자신들의 이목에 걸리지 않은 것은 이곳 천마곡 뿐 아니라 천동의 기관 역시 잘 알고 있다는 의미다. 정운학 일행과 연동을 빠져나가면서, 그리고 그들이 모두 희생되는 것을 감수하고 혼자 남은 것은 아마 연동 안에 이상한 기미를 발견했을 것이고, 자신의 존재를 예측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동안 그는 노련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속내를 모두 알아버렸을 것이고, 탈출로 역시 확보해 두었을 것이다.

시간만 있다면 섭장천이 천동의 기관을 모두 알았다 해도 저들 대부분 연동 안에서 불귀의 객을 만들어 버릴 자신이 있었다. 연동 안의 기관은 자신들의 것이고, 지형 역시 자신들에게 매우 유리한 곳이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만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가장 우려하고 있던 일이 터진 것이다. 강명이었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가 이곳을 들어오려 하고 있다. 자칫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이곳 천마곡의 전력은 고스란히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상황에서 해결책을 내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다. 이제는 전력을 다해 그들과 정면승부를 보는 것뿐이다. 끝없는 희생이 이어질 것이고, 연동 안은 시산혈해로 변할 것이다.

“............!”

방백린은 시선을 돌려 운령을 힐끗 쳐다보고는 내심 탄식을 터트렸다. 운령이 도와주었다면 이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시선을 돌려 좌중을 쭉 돌아다보았다. 모두를 희생시키고 자신의 대업을 이룬다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무력으로 이룬 권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자신이 권력을 쥐면 이곳에 있는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저들 역시 자신이 다스려야 할 백성이다. 희생은 가급적 줄이는 것이 좋다. 이제는 자신이 나서야 할 때임을 절실히 깨달았다.

“좌상....!”

그의 시선이 뇌마 과노인에게 멎었다.

“분부를 내리십시오.”

이미 대화를 멈춘 지 이각이 흘렀다. 그렇다면 방백린은 충분히 생각했을 것이고, 뭔가 단호하고 중대한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그 정도도 눈치 채지 못할 과노인이 아니다.

“우상과 같이 저들을 찾아가 말을 전하시게.”

“예....?”

갑자기 무슨 말인가? 저들을 만나라는 것은 공격하자는 것이 아니고 저들과 타협하자는 것인가?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 했다. 과감한 결단과 피치 못할 희생이라면 감수하는 것이 권력을 움켜쥐고자 하는 영웅이 가져야 할 중요한 자질이다.

헌데 방백린은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이렇듯 중요한 시기에 왜 마음이 약해지는 것일까? 그의 표정을 본 방백린이 얼핏 실망스런 기색을 띠었다. 그는 다시 운령을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운령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더구나 그녀의 얼굴에는 정말 뜻밖이라는 표정이 떠올라 있다.

자신이 무슨 결심을 했는지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 이것이 운령과 과노인의 결정적인 차이다. 과노인은 운령만큼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이다.

“내기를 하자고 하게. 단 한 번의 승부로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승부를 하자고 하게.”

“예.....?”

아직도 자신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한 과노인이 놀란 듯 되묻는다. 어쩔 수 없이 차근차근 말해 주는 수밖에 없다.

“저들 중 누가 나서도 좋다고 하게. 본좌와 승부를 겨루되, 만약 저들이 내세운 인물이 이기면 이곳에서 저들 뿐 아니라 부상자들까지도 고이 내보내줄 것이고, 저들이 진다면 본좌의 허락 없이 평생 이곳을 나서지 않는다는 조건을 건 승부를 하자고 전하란 말이네.”

“주공께서 직접 나서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쩔 수없이 막대한 희생을 치를 것이라는 말도 덧붙이는 게 좋겠군. 허나 본좌가 생각컨데 저들은 분명 이 조건은 받아들일 것이네.”

좌중은 모두 놀랐다. 놀라지 않은 사람은 운령 뿐이었다. 현 상황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이자 최선의 선택이다. 단 한번의 승부로 그는 그가 우려하고 있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또한 만약 본좌가 패한다면 연동에 진입하다 우리 손에 들어 온 개방의 홍칠공(洪七公) 노육을 비롯한 무림인 십여 명도 같이 풀어줄 것이라 덧붙이게.”

방백린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모두 가능해야 내릴 수 있는 결정을 했다. 하나는 저들이 이 승부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반드시 자신이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 허나 이미 방백린은 두 가지 조건 모두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저쪽에서 누가 나서든, 그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에 의심을 할 인물은 아무도 이 자리에 아무도 없다.

그제 서야 좌노인을 비롯해 좌중은 방백린의 생각을 이해했다. 애써 부정하고 있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그들에게 방법을 물었다면 오직 하나, 죽을 때까지 싸우자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방백린이 그 막연한 두려움을 거두어 주었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나서면서..... 그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마음으로 승복할 수 있는 방백린의 단면 중 하나가 이런 것이다.

“빨리 서두르게. 시간이 지체되면 될수록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들지.”

재촉하는 방백린의 얼굴에는 아직 지워지지 않는 한줄기 근심이 남아있었다. 강명..... 강명을 어떻게 해야 할까? 되도록 강명이 들이닥치기 전에 승부를 결정지어야 한다. 그것이 그에게 남은 마지막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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