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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근원은 맛이 없고, 참 물은 향이 없다는 말처럼 정악은 맛도 향도 없는 듯 그 둘이 가장 깊은 음악. 그것을 아는 변종혁의 연주 모습
참 근원은 맛이 없고, 참 물은 향이 없다는 말처럼 정악은 맛도 향도 없는 듯 그 둘이 가장 깊은 음악. 그것을 아는 변종혁의 연주 모습 ⓒ 김기
해금은 국악기 중 21세기 들어 가장 화제가 되는 악기이다. 최근 국악계를 비롯해서 일반에게도 널리 알려지는 곡들은 조금 과장해서 모두 해금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과거 민간에서는 깽깽이라 불리기도 하고, 대부분의 합주에서도 주선율보다는 배음역할을 주로 맡는 등 거문고나 가야금의 위세에 가려졌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의 대표적 악기라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중용을 지키는 악기’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상당히 말의 아취를 살린 표현이고 격조를 제하고 표현하자면 조금 뒤로 물려진 악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까닭인지 해금은 산조의 열기가 국악계를 주도하는 때에도 피리와 더불어 뒤늦게 산조 한 바탕이 짜여진 정도이다. 그러나 크로스오버 조류가 국악계에 불면서 그런 현상은 급격한 반전을 맞게 된다. 다양한 음역과 더불어 국악 현악기 중 유일하게 서서 연주할 수 있는 장점 등이 현대적 무대에 가장 화려하게 적응하였다.

멋진 그림을 배경으로 평조회상을 연주하는 모습.
멋진 그림을 배경으로 평조회상을 연주하는 모습. ⓒ 김기
그래서 국악을 이제 막 접하는 사람들에게 해금은 마치 크로스오버만을 하는 악기로 착각하게도 한다. 그것이 시류를 반영하는 경향의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긴 하지만, 세상은 묘하게도 부족한 것을 스스로 보충하는 자정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들 해금 크로스오버 연주자들의 선배 혹은 선생 격인 해금 연주자 변종혁씨가 그 증거이다.

지난 26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린 <변종혁 해금 독주회>는 근간에 볼 수 없는 진귀한 연주를 통해 변종혁이란 이름의 가치를 새삼 국악계에 발하였다. 연주된 음악은 단지 두 곡뿐이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깊기만 하다. 다른 악기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해금만으로 여민락 4,5,6,7 장을 제자 26명과 함께 연주하였고, 혼자서 평조회상 전 바탕을 독주로 선보였다.

우리나라 국악계에서의 크로스오버가 마치 서양음악과의 절대적인 결합인 양 치부되는 편향을 바로잡을 수 있는 의미 있는 음악회였다. 연주된 두 곡 모두 국립국악원에서조차 쉽게 접할 수 없는 음악이다. 특히나 여민락과 평조회상을 해금만으로 타는 유장한 장면은 더욱 보기 드문 일이다. 더욱이 평조회상을 혼자서 해금으로 연주하는 무대는 아마도 국내 최초가 아닐까 싶다.

여민락은 말 그대로 ‘백성과 더불어 즐기자’는 뜻의 세종대왕이 만든 음악이다. 원래는 용비어천가의 일부인 1,2,3,4,125장을 노래로 부르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가사 없이 10장의 관현악곡으로 연주되고 있다.

이 곡은 15세기 이후 왕의 거동 때 행악(行樂)으로 사용되거나 지식층들의 풍류방에서 거문고로 연주되기도 했다. 또한 창제 이후 다양한 파생곡이 생겨났는데, 향피리가 중심이 되는 관현악합주 ‘여민락’, 당피리가 중심이 되는 관악합주 ‘여민락만’, ‘여민락영’ 그리고 해령(解令)‘ 등이 있고, 국립국악원이 붙여온 아명(雅名)의 분류로 보면 관악 중심의 ’승평만세지곡‘ 과 현악 중심의 ’오운개서조‘로 나누기도 한다.

전체 연주시간은 대략 80분 정도 되지만 이 날의 연주는 20분 가량이 소요되는 4,5,6,7장으로 구성하였다. 보통 다양한 관현악합주로 들어도 조금 지루한 것이 정악인데 해금 하나만으로 연주는 더욱 단조롭기 때문에 듣기에 대단히 지루할 듯한 염려를 했으나 정작 연주를 접하자 정반대였다. 마치 새로운 음악을 접하듯 신선하고 오히려 해금이란 악기의 품성에 대해서 모르던 것을 새로이 발견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제자 26명과 함께 여민락을 연주하는 변종혁. 해금만으로 여민락을 연주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제자 26명과 함께 여민락을 연주하는 변종혁. 해금만으로 여민락을 연주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 김기
이어 잠시 휴식을 가진 후 연주된 곡은 40분 가량의 평조회상. 평조회상은 풍류음악의 대표격인 영산회상을 가장 낮게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즉, 거문고가 중심이 되는 중광지곡이라는 아명을 가지고 있는 현악영산회상을 4조 낮게 연주한다. 보통 영산회상은 상영산부터 군악까지 9곡으로 구성되지만 평조회상은 하현도드리를 빼고 모두 8곡을 연주한다.

이날 변종혁이 연주한 해금 독주 평조회상은 국악사에 하나의 기록이 될 것이다. 아주 오래전 현존하는 국악계의 큰 스승이신 김천흥 선생의 연주 테이프로 접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무대에서의 40분 간 독주하는 모습은 앞으로는 몰라도 전에는 없던 일이다. 앞으로도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결코 만만히 기대할 일은 못된다.

누구나 하고자 마음 먹을 수는 있어도 함부로 도전할 일은 못된다. 모든 음악이 그렇겠으나 특히 정악이란 긴 호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것은 단지 악보만을 따라가는 미행의 연주로는 제 맛을 살릴 수 없다. 그렇다고 연주자 마음대로 해석하거나 변주할 수도 없다.

어찌보면 연주자가 자기 개성을 살릴 아무런 방법도 없어 보이는 것이 정악곡들이다. 그러니 그 곡을 통해 무대 위의 한 사람이 청중의 시선을 긴 시간 붙잡아 놓기란 차라리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이 음악회를 표현한 아주 적절한 아포리즘은 숙명여대 송혜진 교수가 만들었다. “맛도 없고 향도 없는 물맛과도 같은 해금소리의 근원으로 돌아가다”는 것이다. 간단한 표현이면서도 해금으로 연주하는 정악의 현대적 의미와 멋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물론 해금은 양념을 아끼지 않은 화려한 잔치상 음식 같은 모습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것이 해금이 가진 매력이고 또한 잃지 말아야 양면의 요소이기도 하다.

변종혁씨는 매해 독주회를 빠트리지 않을 정도로 연주 욕심이 많다. 올해은 그 욕심을 중의적 수법으로 표현해내었다.
변종혁씨는 매해 독주회를 빠트리지 않을 정도로 연주 욕심이 많다. 올해은 그 욕심을 중의적 수법으로 표현해내었다. ⓒ 김기
그렇기에 물에 비유한 정악은 참으로 적절하다. 특히 깊은 산 속에서 발견한 차고 깨끗한 샘물의 맛이 그렇다. 정악에 흥분이라고는 없어 보이니 온도로 따지자면 그 샘물의 온도일 것이다.

게다가 이런저런 악기들 모두 빼고 하다 못해 장구 반주조차 없이 혼자 평조회상을 연주한 변종혁의 평조회상은 깨끗한 해금과 영산회상이 가진 관조의 맛만 고스란히 담은 정수와도 같은 것이다. 그 고독의 고느적한 연주야 말로 정악이 가지고 있는 군자행의 진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음악회의 주인공인 변종혁씨는 “아시다시피 국악에는 정악과 민속악 그리고 창작국악이 있습니다. 그것들 중 어떤 하나가 가장 좋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 세 가지 갈래의 음악이 서로 잘 조화롭게 발전되어야 진정한 국악의 발전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퓨전음악은 후배나 제자들에게 양보하고 저는 전통음악을 좀더 깊이 연구하는 것이 갈 길이라 생각됩니다”라고 이번 연주회를 마련한 배경과 소회를 밝혔다.

변종혁은 매 해 독주회를 빠트리지 않는 열정적인 연주자이다. 그러나 올해에는 오히려 그 뜨거움을 숨기는 중의법(重義)을 사용했다. 차가움으로 오히려 더 뜨거운 감동을 준 연주로 간만에 정악의 유장한 맛과 더불어 정악 연주의 고법(古法)을 그대로 지키면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확인케 해주었다. 크로스오버 혹은 퓨전이란 온고지신의 영어식 표현이 아니겠는가.

덧붙이는 글 | 변종혁씨의 연주는 26일 국악방송에서 생중계를 했다. 국악방송 홈페이지(http://www.gugakfm.co.kr)의 다시듣기(FM국악당)를 통해 당일 연주를 감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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