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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에서 나가라> 겉그림.
<반도에서 나가라> 겉그림. ⓒ 스튜디오본프리
<반도에서 나가라>는 도발적인 제목을 보았을 때 이미 나는 예감하고 있었다. 이 작가가 기어코 한 건 했구나. 아주 욕심을 크게 부렸구나. 지금부터 5년 후, 허물어져버린 경제와 함께 아시아의 '지는 해'라 불리는 일본에 북조선의 반란군이 상륙하여 섬 하나를 차지하고 그 섬을 지배하려 한다. 웬만한 이야기 구성 능력을 가지고는 허황되고 부피만 큰, 그저 그런 액션 소설로 그치기 쉬운 황당한 소재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무라카미 류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줄거리를 흘깃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가슴이 두근거려 왔다.

이 이야기를 이루는 두 축은 북조선 반란군 부대와 일본에서 '인간쓰레기' 정도로 취급받아 고립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광기어린 살인자 집단이다. 북한은 반란군으로 위장한 군부대를 일본의 섬 '후쿠오카'에 상륙시켜 일본 일부를 지배하려 한다. 외국에 의해 한번도 영토침략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일본, 스러져가는 경제로 인해 국제적인 고립을 맞고 있는 일본은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북한 반란군에게 순식간에 섬을 빼앗기고 만다.

섬을 빼앗기고도 일본 정부는 서로 책임을 미루느라 바쁠 뿐 앞날에 대한 어떤 뚜렷한 대책도 내놓지 못한 채 우왕좌왕 언론 플레이만 벌인다. 이때 사회의 한 구석에서 주민등록번호조차 없이 살아가던 '전과자 집단'들이 북한 반란군과 맞설 궁리를 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깊고 정확한 류의 '한국민 문화'에 대한 이해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스며 나오는 작가의 북한 문화, 나아가서는 한반도 전체를 이루는 한국민의 문화에 대한 이해는 놀라울 정도로 깊고 정확하다. 어떤 면에서는 남한인인 나를 능가하는 뛰어난 정서적 예리함으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관통하고 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자꾸만 이 이야기가 한국 사람의 손에 의해 쓰인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북한의 군장성 체계와 각종 무기류에 대한 정보, 일본인 전과자 무리가 대항의 도구로 사용했던 각종 벌레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이 이야기를 실제로 일어났던 과거사의 회고담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가에게 감탄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은 벌레와 파충류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수많은 총기류에 대한 자세한 묘사도 아니다.

…조수련은 깜짝 놀랐다. 씨호크 호텔 주변을 달리면서 얘기를 들을 예정이었다. 나카스가 아니라 지교하마로 갑시다. 조수련은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호소다 사키코는 상반신만 뒤로 돌려 조수련의 눈을 가만히 보더니, 싫어요 하고 말하더니 웃었다. 호소다 사키코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순간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일본어가 모르는 언어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지시나 명령을 거부하는 사람을 대한 적이 없다는 것은 그 이후 대응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임을 그제야 깨달았다. 공화국에서는 군대만이 아니라 직장이나 학교나 가정에서도 지금의 호소다 사키코처럼 아랫사람이 지시나 명령을 거부하는 일이 없다…

현 일본정치에 대한 노골적이고 신랄한 비판

일방적인 명령과 복종 체계를 가진 나라, 불복은 곧 죽음이나 수용소로 보내짐을 의미하는 나라에서 자라난 청년 조수련은 호소다 사키코라는 일본여인이 태연한 얼굴로 웃으며 자신에게 '싫어요'라고 말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충격 속에서 그는 여인이 이끄는 대로 겨우겨우 번화가의 만두집까지 따라가고 차츰 자본주의 문화, 그리고 그 문화 속에서 피어나는 각종 인간적인 관계와 감정들에 눈을 뜨게 된다.

작가는 조수련과 호소다 사키코라는 일본인 여인의 교류를 통해서 북한인, 일본인, 남한인 모두 결국은 보편적인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강변하고 있다. 자라온 역사와 환경이 우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 같지만 한계 상황에 처하여 서로 교류를 하게 되면 인류의 마음 저 밑바닥에 있는 보편적인 따뜻함 같은 것 하나가 떠오르게 되는 것임을 이야기로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현 정치 상황과 외교 정책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의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노골적으로 튀어나온다.

…일본은, 센 남자라고 해서 있는 대로 갖다 바쳤는데 돈이 떨어지자 버림받은 여자와도 같았다. 그렇지만 센 남자에게 돈을 바치는 건 나쁜 일도 불합리한 일도 아니다. 누가 뭐라하던 자기 의지에 따라 돈을 바치기로 한 여자라면 버림받더라도 후회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상대가 기뻐할 거라고 믿고 일편단심으로 갖다 바친 여자는 후회하고 상대 남자를 죽도록 미워하기 마련이다…

일방적으로 미국을 추종했던 일본이 결국엔 미국에 버림받는 다는 시나리오를 류는 이런 식으로 희화화시키고 있다. 일본의 대미외교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시선이 어떤 식으로 갈라지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소설속의 주요 등장 국가의 하나로 등장하는 한국의 현재상황과도 비교하면서 읽으면 더욱 흥미롭다.

북한 심리에 바짝 다가선 고도의 심리극

무라카미 류는 일본의 소설가중 가장 시사성이 강한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이다. 그의 소설 대부분이 각종 사회문제를 담고 있고 그 문제를 전개해감에 있어서 어김없이 일본 정부의 현재 정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드러낸다.

그의 시선은 마약, 청소년 문제, 테러문제, 성범죄 등 각종 사회 현안과 범죄 분야 곳곳에 고루고루 미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통해 그가 결국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 하나이다. 인간의 보편에 내재되어 있는 온기에 관한 성찰. 마약중독자나 방화범, 연쇄살인 사건을 저지른 흉악범들의 내면에도 출발선에는 보통 사람들과 같은 심성이 있었다는 것. 그러한 심성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흉악범으로 변질되게 되는지를 서서히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따뜻함에 대한 그의 탐구가 이번에는 이웃나라 북한과 남한에 미쳤다. 그러고 보면 일본과 우리나라는 정말로 가까운 나라가 아닌가. 일본은 비단 지리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역사, 문화적으로 끊임없이 우리와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몇 번의 거대한 전쟁이라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느 시점에선가 한민족과 일본 민족의 피는 일치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일본인이 쓴 북한의 이야기이다.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보다도 더 북한 사람들의 심리에 가깝게 다가 선 고도의 심리극이다. 일본의 극우파들에게 몰매 꽤나 맞았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만드는 역동성 있는 액션 활극이기도 하다. 또한 무라카미 류의 팬이라면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대작이다.

덧붙이는 글 | *무라카미 류는 일부에서는 극우파라고 불리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극좌파로, 또한 무정부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하는 일본 작가로 60권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다. 자신의 소설을 원작으로 직접 영화를 만드는 영화감독이기도 하며 그가 쓴 최신작 <반도에서 나가라>는 국내 감독에 의해 영화화될 예정이다.


반도에서 나가라 - 상

무라카미 류 지음, 윤덕주 옮김, 스튜디오본프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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