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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심야 배스킨 라빈스 살인 사건>
ⓒ 문학동네
“조동범이 이 시집에서 주목하는 공간은 아이스크림 가게, 도너츠 가게, 버거킹, 안경점 등이다. 이 공간들은 ‘평균적인’ 번화함과 번쩍임 때문에 도회적 삶의 표징이 되는 곳이기도 하지만 공히, 쇼윈도를 지닌 전시적 공간이기도 하다. 실상, 시인이 이 공간들에 주목하는 것은 후자 때문이다.

‘찬란과 풍요’로 요약되는 ‘평균적’ 문화 이해를 깨뜨리며 우리의 눈을 ‘찌르는’ 것은 쇼윈도 너머에 전시된 죽음이다. 풍요와 빛남의 거리, 국경일처럼 흥성이는 곳에서 그는 밀폐와 죽음을 본다. 전시된 것은 풍요가 아니라 죽음이다.”
–문화평론가 조강석의 해설 중에서.


현대 사회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를 꼽으라면 ‘패스트 푸드’를 빼놓을 수 없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음식이지만 햄버거 한 번 안 먹어 본 20~30대는 아마 없을 것이다. 햄버거뿐만 아니라 우리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온갖 즉석 음식의 범람 속에 산다. 바쁜 일상 속에서 ‘테이크 아웃(Take-out)’이 가능한 음식들이야말로 간편하게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좋은 요기거리가 된다.

시집 <배스킨 라빈스 살인 사건>은 제목부터 이와 같은 시대적 문화 코드를 반영한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현대 사회의 상징물인 패스트 푸드 점을 소재로 한 시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그가 보여주는 이런 시적 공간들은 가장 ‘도시적인’ 삶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공간들이 지니는 의미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하다.

심야에 아이스크림 가게를 지키고 있는 판매원은 냉동고에 손을 집어 넣을 때마다 살의를 느낀다. 냉동고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은 그저 평화롭기만 하다. 시인은 ‘평화로운 심야’의 아이스크림 가게가 ‘평화로운 살의’로 가득 찼다는 역설을 통해 모순된 현실을 풍자한다. 현대의 물질 문명은 평화를 가져다 준 듯하지만 사실 인간의 본성을 말살하는 어두운 내면을 가지고 있다.

'도너츠의 여왕'이라는 시는 온갖 문명의 혜택으로 뒤덮인 한 여자가 정신적인 사멸을 맞이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녀의 구두 뒤축에서 우수수, 사막이 떨어진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여자는 구두를 신고 푸른 선글라스를 낀 채 도너츠를 베어 문다. 누가 봐도 도회적인 여성의 모습을 지녔지만 가슴에선 사막의 모래가 우수수 떨어지는 여자.

시인이 보여주는 이 시대의 인간 군상은 이처럼 가장 도회적이고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정신적으로는 궁핍하고 메말라 있다. 또 다른 시 '즐거운 식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무표정하게 즐거운 식사를 기다리는 삼 분 동안/ 그녀는 서류뭉치처럼 단단하게 묶인 일상을 떠올린다/ 흘러내린 스타킹처럼 구름이 흘러가고/ 편의점에서는 경쾌한 음악이 펼쳐진다/ (중략) 컵라면을 먹다 말고 그녀는/ 국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채소를 바라본다/ 이제는 말라, 제대로 썩는 법조차 잃어버린 채소/ 그녀는 우걱우걱/ 즐거운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시 '즐거운 식사' 중에서.


‘즐거운 식사’라는 반어적 표현은 우리의 삶이 컵라면처럼 즉석에서 해결되어 버리는 것에 대한 서글픔을 담고 있다. 시의 화자들은 ‘버거킹의 이미지를 먹고, 버거킹의 간판을 먹고, 또 빛나는 바닥을 먹는(시 '버거킹을 먹는 여자' 중에서)’ 서글픈 존재들이다. 겉으로는 우아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것 같지만 실상은 현대 문명의 차갑고 냉정한 속성에 먹히고 마는 인간들.

그래서 이 시집에 표현되는 현대 문명의 모습은 전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 찬란하게 번쩍이는 조명과 화려함을 자랑하면서도 그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문명의 꼭두각시들. 빈 껍데기뿐인 문명의 혜택 속에서 우리 인간은 정신과 마음을 뺏긴 채 끌려 다니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는 시의 이미지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와 인간의 순결한 정신에 대한 회귀와 동경으로 마무리된다. 그러기에 시의 언어들은 문명 속에 남은 작은 희망을 향해 몸부림치는 것이다. 시 '생선', '정류하다' 등은 긍정적인 세상을 향한 가냘픈 희망의 몸짓을 담고 있다.

“냉장고의 생선 한 마리/ 서늘하게 누워 바다를 추억하고 있다/ 플라스틱 용기에 갇힌 채/ 두 눈을 부릅뜨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바다를 떠올리고 있다/ 생선의 눈동자에 잠시 푸른빛이 넘실댄다”
–시 '생선' 중에서.


비록 이 세상은 ‘어둡고 차가운’ 문명의 소용돌이 속에 움직일지라도 인간 본연의 순수한 정신과 내면은 살아 있다. 시인이 이 시집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도 그런 세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꿈이다. 문명 사회에 대해 비판하면서 가장 순수하고 자연적인 것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시적 화자들. 그들은 이 문명 속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 모두를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조동범 지음, 문학동네(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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