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김현
“할머니 뭐해요?”
“아이구, 우리 강아지들 왔구나. 집에 있지 뭐 하러 여기까지 왔어.”

토요일 오후, 아이들이 밭에서 일하고 있는 외할머니를 보더니 달려가 꾸벅 인사를 합니다. 아이들을 보자 장모님이 허리를 펴고 일어서며 활짝 웃습니다.

“말도 없이 어떻게 왔다냐.”
“어떻게 오긴. 우리 엄마 보고 싶어서 왔지. 근데 엄마, 점심때가 넘어가는데 뭐해?”
“보면 모르것냐. 일하고 있지. 농사짓는 사람이 때 찾아 먹는 것 봤냐. 일하는 시간이 일하는 때이고, 밥 먹는 시간이 밥 때지.”
“참 엄만 그 말이 그 말이잖아.”

ⓒ 김현
아이들은 인사를 하자마자 여기저기 밭고랑을 돌아다니며 흙장난을 하며 놀고, 아내는 장모님 옆에 슬그머니 앉아 풀을 뽑으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야길 주고받다 아내가 대뜸 장모님한테 손을 내밀며 장난스럽게 선물을 달라고 합니다.

“엄마, 금강산 갔다 왔는데 뭐 없어?”
“이것아. 넌 딸년이 돼가지고 에미가 여행 갔다 왔으면 잘 갔다 왔냐는 소린 않고 선물 타령부터 하냐.”
“에이, 엄마가 금강산 갔다 오면 선물 사다준다고 했잖아. 글구 엄마. 나나 되니까 엄마한테 선물 달라고 하지 누가 달라고 하겠어. 안 그래 당신?”

그러면서 슬쩍 나를 바라봅니다. 맞장구를 쳐달라는 눈치입니다.

“아이구, 잘 났어요. 안 그러긴 뭐가 안 그래. 어머니 말이 백 번 맞지. 어머니 저 사람 저 바다 건너 보내버릴까요?”
“이 사람아 그렇다고 보내면 쓰것는가. 나사 괜찮지만 자네와 아이들은 어쩌라구.”
“에이, 그래도 딸내미 멀리 보내긴 싫으신가 보네.”

ⓒ 김현
그리곤 한 바탕 웃습니다. 장모님은 이번 4월 초에 동네분들과 함께 금강산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가기 전 날, 잘 다녀오시라고 용돈을 주면서 아내는 ‘엄마, 내 선물 꼭 사와. 알았지?’ 하며 은근한 압력을 행사하자 장모님은 알았다며 웃은 적이 있습니다. 아내는 지금 그 선물을 달라고 하는데 비싸고 살 것도 없어 그냥 왔다며 웃습니다.

“야 그래도 금강산 가서 젤 생각난 게 예지 아빠더만.”
“엄만, 왜 딸들도 많이 있는데 예지 아빠가 젤 생각나?”

ⓒ 김현
장모님 말은 이렇습니다. 처가에 갈 때면 카메라를 들고 가서 아이들 사진도 찍어주고, 일하는 모습도 찍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진을 이용해 가끔 글도 쓴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고 계시는 징모님께선 금강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자 사위에게 사진을 찍어 가져다주면 좋아할 텐데 카메라가 없어 무척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함께 구경 간 동네분들에게도 그 아쉬움을 이야기했다며 내내 아쉬워합니다. 장모님은 그 사진을 찍어 사위에게 가져다주면 그걸로 글을 쓸 줄 알았나 봅니다. 장모님의 말을 들으며 장모님의 사위 사랑에 괜히 미안해집니다.

금강산 얘기를 하고 있는데 흙장난이 싫증이 났는지 아이들이 배고프다며 집에 가자고 합니다. 봄볕을 맞으며 집에 오는데 장모님이 갑자기 아이들을 불러세웁니다.

“예지 한울아. 저그 푸르게 움직이는 게 머신지 알것냐?”
“응, 어디? 풀밭이요.”
“밥은 쪼금 있다 먹고 따라와 보그라. 김 서방도 좋을 것이구먼.”

ⓒ 김현
따라오라는 말에 아내가 투덜거립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모님은 그 푸른 물결을 향해 걸어갑니다. 가까이 가보니 보리입니다. 아직 논보린 어른 발목보다 조금 올라왔는데 밭보린 키가 훌쩍 자라 있습니다.

“할머니! 이게 뭐예요?”
“머긴 이게 보리야 보리.”
“와~ 보리가 벌써 이렇게 자랐네요. 논보린 아직 조그만 하던데.”
“밭보릴 좀 일찍 심었더니 논보리보다 많이 크더구먼.”
“할머니, 우리 들어가도 돼요? 들어가고 싶은데… 바다 같애 그치 누나?”

ⓒ 김현
아들 녀석이 바람에 사르랑거리며 움직이는 보리물결을 보자 발이 근질근질하나 봅니다. 할머니의 조심해서 들어가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어느새 초록빛 속으로 빠져듭니다. 처음엔 조심조심 발을 띠던 녀석들이 안전함을 확인하자 이내 함성을 지르며 달려보기도 하고, 숨기도 하고, 엎드리기도 합니다.

ⓒ 김현
“야, 너희들 조심해.”

아내가 조심하라고 하자 아이들은 들은 체도 안 합니다. 장모님은 그런 아내를 보고 ‘냅둬라. 뛰어놀게’ 말하며 흐뭇하게 웃으십니다.

“엄마, 엄마도 이리 와 봐. 재미있어. 초록 바다에 풍덩 빠진 것 같애.”

ⓒ 김현
배고프다며 집에 가자던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들이 말하는 ‘초록바다’에 풍덩 빠져 헤엄치느라 나올 줄을 모릅니다. 당신의 보리가 부러지는 것보단 손자새끼들의 맑은 모습을 보시며 장모님 넉넉한 미소를 짓습니다. 오늘은 장모님 덕분에 아이들은 초록바다에서 뛰어놀고, 아내와 난 모처럼 푸른 동심에 빠져보며 손을 가만히 잡아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말하는 초록바다에 들어가 싱그러운 보리내음을 맡으며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았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너! 나! 따로 가지 말고 함께 가자.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