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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단풍나무에서 새잎이 태어나고 있다. 새생명이 탄생하고 있다.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단풍나무에서 새잎이 태어나고 있다. 새생명이 탄생하고 있다. ⓒ 서종규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나무에서 잎이 태어나고 있다. 새생명이 탄생하고 있다. 어떤 나무는 나뭇잎이 이미 태어난 것도 있고, 지금 막 태어나고 있는 것도 있다. 태어난 단풍나뭇잎은 살갗이 붉다. 너무 붉다. 홍단풍나무인가 보다. 가을의 단풍보다 더 붉다.

막 피어나는 단풍나무 끝에는 꽃술이 몇 개씩 매달려 있고, 잎이 깨어나려고 한다. 꽃술이 떨어진 단풍나무는 잎이 붉게 벌어져 있다. 나무 가득 붉은 옷을 입고 있다. 단풍나무가 피어나는 순간부터 붉다는 것이 신기하다.

단풍나무는 피어나는 새싹으로 온통 붉은 옷을 입고 있다.
단풍나무는 피어나는 새싹으로 온통 붉은 옷을 입고 있다. ⓒ 서종규
단풍나무 중에는 잎 그대로 연녹색을 띄는 것도 있다. 아니 연녹색을 띄는 단풍나무가 훨씬 더 많다. 흐르는 냇물 위로 단풍나무는 그 손을 뻗어 온다. 나도 손을 내밀었다. 촉감이 부드럽다. 어린아이 살결 같은 따스함이 전해 온다.

꽃이 가득한 봄에 아름다운 것이 또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다. 봄꽃은 말할 것 없이 아름답다. 노랗게 핀 노랑각시붓꽃이 땅에서 고개를 들어 방글거리고 있다. 다가가 볼에 입맞춤이라도 하고 싶다. 그런데 이렇게 피어나는 붉은 단풍잎이나 연녹색의 새싹들도 그 아름다움은 똑같다.

흐르는 냇물 위로 단풍나무는 막 피어난 생명의 손을 뻗어 온다.
흐르는 냇물 위로 단풍나무는 막 피어난 생명의 손을 뻗어 온다. ⓒ 서종규
생명의 울림이다. 동물 탄생의 순간만 경이로운 것이 아니라, 피어나는 새싹의 울림에도 생명의 외경을 느낀다. 솟아나는 새싹의 털끝 하나에서도 그 떨림이 전해져 온다. 그 피어나는 생명으로 온 산은 커다란 긴장감에 싸인다. 하늘이 밝게 빛난다.

남도에서는 단아한 단풍으로 알려진 나주 불회사 뒷산인 덕룡산이 있다. 덕룡산(376m)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불회사를 빙 둘러싸고 있어서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산이다. 가을이면 아름다운 단풍을 느끼려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산이다.

피어나는 새싹의 울림에도 생명의 외경을 느낀다.
피어나는 새싹의 울림에도 생명의 외경을 느낀다. ⓒ 서종규
4월 15일(토) 오후 2시, 산을 좋아하는 ‘풀꽃카페 토요산행팀’ 15명은 나주 덕룡산을 찾았다. 돌아오는 석양에 하얗게 깔린 나주 배꽃도 함께 하는 산행으로 잡았다. 석양 노을에 출렁이는 하얀 배꽃은 상상만 하여도 환상적이었다.

오후 3시 나주 불회사에 도착했다. 불회사 입구에는 전국적으로도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히는 돌장승이 서 있다. 조선 숙종 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장승은 오른쪽에 남장승, 왼쪽에 여장승으로 짝을 이루고 있다.

특히 남장승은 높이 315cm, 둘레 170cm로 근엄하면서도 왕방울 같은 눈동자, 꽉 다문 입 언저리에 양쪽으로 드러난 덧니, 커다란 귀, 그리고 두 뼘이나 되는 수염을 땋아 옆으로 꼬부려 놓은 해학적인 멋을 풍기고 있다.

석장승 위에서부터 시작되는 등반은 별로 힘들지 않다. 불회사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위치한 덕룡산은 약 32시간이면 다 돌아 내려올 수 있다. 오르는 곳은 약간 가파른데, 나무 계단을 설치해 놓아 약간 지루하고 땀이 났다.

그 피어나는 생명으로 온 산은 커다란 긴장감에 싸인다.
그 피어나는 생명으로 온 산은 커다란 긴장감에 싸인다. ⓒ 서종규
덕룡산이 단아한 단풍으로 알려진 것처럼 단풍잎들이 피어나고 있는 모습이 살아있는 손 같다. 단풍나무 뿐만 아니라 온갖 초목들이 그 새잎과 싹을 드러내고 있다. 아직 꽃도 피지 않은 철쭉나무 잎은 길쭉길쭉한 잎부터 고개를 내밀고 있다.

갈참나무는 처음부터 널찍한 잎은 내놓고 있다. 붉은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갈참나무잎이나 철쭉나무잎, 산딸기나무잎까지 모두 작고 앙증스러운 생명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좁은 안목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나뭇잎들이 그 붉은 기운으로 꽃처럼 아름답다.

가시가 많아 등산객들이 싫어하는 두릅나무지만 저렇게 아름답다니, 그런데...
가시가 많아 등산객들이 싫어하는 두릅나무지만 저렇게 아름답다니, 그런데... ⓒ 서종규
가시가 많아 등산객들이 싫어하는 두릅나무지만 봄에는 인기다. 두릅나무 순을 따서 더운 물에 살짝 데쳐 먹는 맛이 일품인 것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맛뿐만 아니라 그 향이 입안에서 오래 돌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두릅나무 순을 보면 손이 앞선다. 두릅나무는 봄에 수난을 당한다. 안타깝다.

덕룡산은 능선까지 올라서면 죽 이어지는 봉우리를 따라 걸어가는 편안한 산행이다. 봉우리로 이어지는 길엔 많은 조릿대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하지만 등산로는 그런 대로 잘 정비되어 있어서 불편함이 없었다. 조금 가파르다 싶으면 잡고 오르내릴 수 있는 밧줄까지 매어 있었다.

봉우리 위에서 내려다 본 계곡은 갓 피어난 녹음들이 구름처럼 일어나고 있다.
봉우리 위에서 내려다 본 계곡은 갓 피어난 녹음들이 구름처럼 일어나고 있다. ⓒ 서종규
봉우리 위에서 내려다 본 계곡은 갓 피어난 녹음들이 구름처럼 일어나고 있다. 구름이 일어 뭉게뭉게 피어나듯 녹음들이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겨울의 무거움에 눌려 있다가 살아 움직이는 녹음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생명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길 양옆엔 꽃들이 즐비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산딸기나무꽃이 하얗게 피고, 양지꽃과 제비꽃은 이제 오래된 친구처럼 반갑다. 산벚꽃이 이제 절정을 지나 파란 잎과 어울리기 시작하더니, 분홍빛 산복숭아꽃이 수줍은 처녀 볼처럼 빙글거린다.

좀처럼 보기 드문 노랑각시붓꽃, 꽃이 저렇게 귀엽고 앙증스럽다니,
좀처럼 보기 드문 노랑각시붓꽃, 꽃이 저렇게 귀엽고 앙증스럽다니, ⓒ 서종규
보랏빛 각시붓꽃은 땅에 붙어서 앙증스럽게 피어 있다. 하얀 별꽃이 유난히 많아 점점이 하늘을 뒤집어 놓은 것 같다. 갑자기, 눈에 확 띄는 노란 꽃이 있다. 좀처럼 보기 드문 노랑각시붓꽃, 꽃이 저렇게 귀엽고 앙증스럽다니,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지나가는 길에 진달래는 이제 작별을 고하고 있고, 진달래에도 그 잎이 솟아나고 있다. 철쭉의 꽃망울은 언제라도 터질 듯이 그 안에 충만한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 우리들의 발걸음은 솟아나는 푸른 잎들의 환영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나아가고 있다.

우리들의 발걸음은 솟아나는 푸른 잎들의 환영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나아가고 있다.
우리들의 발걸음은 솟아나는 푸른 잎들의 환영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나아가고 있다. ⓒ 서종규
벌써 고사리가 고개를 내밀고, 칡넝쿨이 그 손을 뻗기 시작하고 있다. 온 산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울림으로 가득하다. 나무에서 풀에서 느껴지는 생의 충만, 이마에 땀이 비 오듯 흐르지만 산을 찾을 충분한 이유가 된다.

오후 6시, 우리들은 생명의 충만한 소리를 들으며 덕룡산을 떠났다.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늘 친근하게 다가오는 석장승의 미소가 뒤에 따른다. 그리고 전국에서 배꽃이 가장 아름답다는 나주로 향하였다.

멀리 산 위로 내려가는 태양은 유난히도 붉다. 산 위에 턱, 내려앉은 태양이 그 붉은 기운을 배꽃 위에 펼치고 있다. 하얗게 하얗게 출렁이는 배꽃이 일시에 정지한다. 우리들도 몰던 차를 일시에 멈추었다. 사방은 온통 하얀 물결로 충만하다.

솟아나는 새싹의 털끝 하나에서도 그 떨림이 전해져 온다.
솟아나는 새싹의 털끝 하나에서도 그 떨림이 전해져 온다. ⓒ 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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