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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구 장애인 자활센터 '더디가도 함께가기' 행진.
서울 동작구 장애인 자활센터 '더디가도 함께가기' 행진. ⓒ 정서희
아이들은 몇 걸음 채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다리가 아프다"며 보채기 시작한다. 투정하는 아이들을 이고 업고 어르고 달래며 그렇게 시작된 행렬. 삐뚤삐뚤 움직이는 전동차 휠체어의 뒤를 쫓아, 또 삐뚤삐뚤 아이들과 씨름하며 따라가는 엄마 아빠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통제불능, 오합지졸이 따로 없다.

중증장애인 최윤희씨에게 사탕을 먹여주고 있는 동네 꼬마
중증장애인 최윤희씨에게 사탕을 먹여주고 있는 동네 꼬마 ⓒ 정서희
30명 남짓한 동작 주민들이 모여 시작한 이 행진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더디가도 함께가기' 캠페인! 오는 20일 장애인의 날을 앞두고 마련된 동네 행사에는 이렇게 평범한 엄마, 아빠, 그리고 아이들이 참가했다.

아무리 봐도 어설프기만 한 이 행진에 성질 급한 자동차 운전자들은 "왜 이리 더디 걸어가냐"며 씽∼하니 행렬을 앞지르거나, 경적을 울려 마음을 급하게도 했다. 반면 '활동보조인제도' 전단지를 받아든 대부분의 시민들은 "좋은 일 하시네요", "힘내세요"라는 등의 한마디로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네면서 선뜻 '활동보조인제도 서명운동'에 동참해준다.

'더디가도 함께가기' 캠페인이 기획된 것은 지난 3월 말, 최근 쟁점화되고 있는 활동보조인 제도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동작 장애인 자활센터에서 마련한 프로그램이다.

자활센터 직원으로 근무하는 중증장애인 6명과 후원회원, 주민들이 함께 동네를 행진하고 활동보조인 제도의 서명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기자도 이 프로그램에 동네 친구의 권유로 참가하게 되었다. 사실 중증장애인을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던 기자는 장애인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장애인의 눈 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을까, 아니면 그냥 자연스럽게 서서 말할까,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말을 걸까, 장애인 문제로 화두를 꺼낼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며 전동차 휠체어 주변을 맴돌던 기자에게 기회는 의외로 쉽게 다가왔다.

중증장애인 최윤희씨.
중증장애인 최윤희씨. ⓒ 정서희
"남자친구 있어요?" 노란 모자에 장난기 가득한 한 여자 장애인은 부정확하지만 무척 정답게 말을 건넨다.

"아뇨, 언니는요?"
"있어요. 저보다 한 살 어린 친구."
"요즘 유행한다는 그 연상연하 커플?"

그렇게 31살 최윤희씨와의 대화는 결혼할 나이가 꽉 찬 노처녀들답게 역시 남자 얘기로 물꼬를 틀었다. 어떻게 만났는냐, 누가 먼저 프로포즈했느냐, 데이트는 자주 하느냐, 노처녀들의 연애담에 장애와 비장애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비장애인 남자친구와 벌써 3년째 열애를 하고 있다는 윤희씨는 얼마 전 EBS의 한 장애인 프로그램에서 웨딩드레스를 먼저 입어보았다고 한다. 신혼살림을 차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다는 윤희씨 커플의 연애담은 듣기만 해도 깨소금이 쏟아졌다. 대체 데이트 해본지가 언제였던지 가물거리는 기자에게는 그저 닭살이었다.

뇌성마비 자원봉사자 김희경씨.
뇌성마비 자원봉사자 김희경씨. ⓒ 정서희
윤희씨와의 대화에 또 한마디 거드는 사람이 있다. 중증장애인의 활동을 보조하는 자원봉사자 김희경씨. 하루 12시간을 중증장애인들과 함께 보내다보니 이제는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 맞춘단다. 행진 도중에도 중증장애인들의 옷매무새며, 머리 모양을 다듬어주느라 여념이 없는데 다른 일은 이제 모두 익숙해졌지만 전동차 휠체어 쫓아다니는 일만큼은 아직도 많이 힘들다고 한다. 희경씨 자신도 뇌성마비라는 장애가 있기 때문.

희경씨는 불편한 다리로 이리 저리 움직이는 전동차 휠체어를 쫓아다니느라, 이마에는 늘 땀이 송글송글 맺혔지만 혹시나 작은 사고라도 일어날까 전동차 휠체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가 자원봉사를 시작하게 된 것은 지난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하루종일 집안에 갇혀있다시피 생활해야 하는 중증장애인들의 생활을 전해 들으면서 부터라고 한다.

"사회로부터 단절되고 고립되기 시작하면서 중증장애인들의 우울증과 자괴감은 생각보다 심하다는 것, 활동보조인 제도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차별없이 어울려 살 수 있는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제도"라는 것이 희경씨의 생각이다.

통제불능이었던 행렬은 어느 새 종착지에 도착했다. 동작우체국에서 신대방 삼거리를 지나 보라매공원까지 불과 1500미터의 짧은 행진 구간은 비장애인이라면 20여분이면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비장애인과 장애인, 그리고 아이들까지 함께 하면서 무려 1시간이 걸렸다. '더디가도 함께가자'던 캠페인명이 무색치 않은 행진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목적지에는 이렇게 도착하는 걸, 조금 늦더라도 손잡고 같이 가는 여유를 기자는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행사가 끝나고 윤희씨는 기자에게 찔리는 한마디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나이 들면 눈만 높아진대, 빨리 연애해야 돼∼"

활동보조인 제도 서명운동
활동보조인 제도 서명운동 ⓒ 정서희
"더디가도 함께가기" 기념촬영
"더디가도 함께가기" 기념촬영 ⓒ 정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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