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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니버설발레단
공연을 시작하면서부터 대단원의 막이 내려질 때까지 객석에 자리한 기자의 가슴에는 감동만이 넘쳐났을 뿐이었다. 발레공연은 처음 보는데다 발레에 대한 아무런 기초지식도 없는 상태에서의 관람이었건만, 그럼에도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그리 어렵지 않게 다가왔다.

한 가지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이 있다면 '대사가 전혀 없다는 것' 정도를 들 수 있겠다. 엊그제 관람했던 넌버벌 퍼포먼스(Non-Verbal Performance) 공연인 <난타>와 같이 단지 무용동작과 음악만으로 극의 내용을 전달받아야 하는 것이, 발레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익숙지 않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발레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기에 이해도는 당연히 떨어졌겠으나 그 어떤 장르의 공연을 봤을 때보다 이처럼 문화적 향유를 맘껏 누린 적은 없었던 듯싶다. 이리도 멋있고 감동적인 공연을 그동안 왜 멀리 했나 싶은 후회가 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1막 오프닝 직후의 군무(群舞) 장면
1막 오프닝 직후의 군무(群舞) 장면 ⓒ 유니버설발레단
헌데 초심자의 티는 날 수밖에 없나보다. 공연을 보는 내내 발레리나들이 발뒤꿈치를 들고 서 있는 동작, 특히 여러 발레리나들이 동시에 그런 동작을 취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네들의 발만 쳐다보게 된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얼마나 발이 아플꼬?'

이 쓸데없는 걱정은 생각 많은 A형의 기자에게 안쓰러움까지 안겨주고 결국 '나도 같이 발뒤꿈치를 들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데까지 이른다. 한편으론 재밌기도 하지만 왠지 미안하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직 발레라는 문화에 익숙해지지 않은 탓이다.

성황리에 공연되고 있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공연장인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로비에는 발레리나인 듯 보이는 여성들이 대부분일 정도로 날씬한 관객들이 저마다 빼어난 몸매를 자랑하고 있다. 발레리나이거나 발레를 전공하는 학생들이 많이 온 것 같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학생들도 부모님과 함께 많이 찾아와 공연을 감상한다.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음악과 함께 공연은 시작되고 관객들은 우선 화려하면서도 품격이 느껴지는 무대에 놀라게 된다. 대작 수입뮤지컬의 그것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을 정도이다. 격조높은 왕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무대는 출연자들의 아름다운 의상과 어우러져, 발레공연이 주는 깊은 감동을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주연배우들이 커플을 이룬 모습.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시묜 츄진과 강예나, 황재원과 임혜경, 엄재용과 황혜민
주연배우들이 커플을 이룬 모습.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시묜 츄진과 강예나, 황재원과 임혜경, 엄재용과 황혜민 ⓒ 유니버설발레단
초심자가 보기에 발레공연이 지루하지는 않았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 지루한 건 사실이다. 공연 중간 어린아이의 하품소리가 객석에서 흘러나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공연이 끝난 후 기자에게 밀려드는 느낌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황홀감' 그 자체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다음 번에는 발레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할 뿐이었다.

그래도 그중 덜 따분한 장면을 말하라면 2막 후반부에 24명의 무용수가 군무를 펼치는 장면을 꼽고 싶다. 또한 3막 결혼식 중 발레리나가 한 명씩 나와 마치 발레 배틀을 하듯이 솔로공연을 연달아 보여줄 때는, 극의 전반적인 분위기보다 훨씬 경쾌하고 흥겨운 리듬에 맞춰 독특한 무용을 선보여 잠시나마 초심자에게서 부담감을 덜어준다.

1막에서 발레리노들의 무용장면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 하지만 2막이 오르면서 데지레 왕자 역의 시묜 츄진이 등장하자 객석에서는 환호성과 함께 함성이 간간이 흘러나오고 분위기는 반전된다. 특히 2막이 끝나기 전 시묜 츄진이 솔로공연을 할 때는 놀라운 실력을 선보여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낸다.

긴 다리로 점프를 하며 공중에서 다리를 쭉 뻗는 동작을 보고 있으면, 예전 88년 서울올림픽 당시 멀리뛰기 세계 정상급선수들이 공중에서 다리를 움직이며 마치 공중에서 걷는 듯한 동작을 보여주던 것이 연상된다.

공연의 백미는 역시 오로라공주와 데지레왕자가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이라 하겠다. 데지레왕자 역의 시묜 츄진은 시원시원한 동작으로 무대를 압도하는 한편, 오로라공주 역의 강예나는 섬세함과 부드러움으로 고난이도의 동작을 잇따라 선보여 객석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3막 고양이들의 신나는 공연장면. 공중으로 점프한 높이가 가공할 만하다.
3막 고양이들의 신나는 공연장면. 공중으로 점프한 높이가 가공할 만하다. ⓒ 유니버설발레단
이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장면에서는 두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뤄낸다. 특히 두 사람이 똑같은 동작을 소화해내는 장면에서는 싱크로나이즈드 선수들의 공연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될 정도로 그 정교함이 놀랍다.

비록 초심자의 눈에 비쳐진 무대의 모습은 뮤지컬이나 콘서트 등의 공연에 비해 정적이고 다소 무거워 보일 수 있겠지만, 객석의 반응은 그 어떤 공연에서도 볼 수 없었을 만큼 뜨겁고 격정적이다. 발레리나의 멋진 동작이 끝날 때마다 '브라보'를 연호하고 쉼없이 박수갈채를 보내준다.

기자가 앉은 자리 부근의 한 외국인 신사는 너무나 열심히 박수를 쳐준 나머지, 조금은 심드렁하게 공연을 지켜보던 기자의 동행자가 그 신사에게 감동을 받아 뜨겁게 호응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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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주연배우들의 그 흔한 키스 장면 하나 찾아볼 수가 없다. 데지레왕자가 마지막 막이 내려오기 전 오로라공주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이 고작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로맨스는 너무나 감동적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뮤지컬 <명성황후>에 이태원이 있다면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는 강예나가 있다고 하면 과찬일까. 유니버설 발레단의 수석무용수인 강예나는 빼어난 기교와 탁월한 연기력으로 그녀의 명성이 과장되지 않았음을 입증해 보인다.

10년 전 처음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 출연했을 당시에는 상대역인 이원국에게 이끌려 기교를 부렸을 뿐이라고 회고하는 그녀. 이제 시묜 츄진을 리드해가며 오로라공주 역을 더욱 원숙하게 소화해 내야 할 사명감이 그녀의 어깨에 무겁게 지워졌다. 발레를 처음 접한 초심자일 뿐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해낸 듯 보였다.

오로라공주 역과 데지레왕자 역을 맡은 주연배우끼리 짝을 맞춰 무용하는 장면. 왼쪽부터 차례로 황혜민-엄재용 커플, 강예나-시묜 츄진 커플, 임혜경-황재원 커플.
오로라공주 역과 데지레왕자 역을 맡은 주연배우끼리 짝을 맞춰 무용하는 장면. 왼쪽부터 차례로 황혜민-엄재용 커플, 강예나-시묜 츄진 커플, 임혜경-황재원 커플. ⓒ 유니버설발레단
상대역인 시묜 츄진이 맘껏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편안한 무대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래서인지 관객들은 강예나보다 시묜 츄진에게 더 열렬하게 반응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함께 인터뷰를 진행했던 그 사람이 무대에서 완벽한 동작을 소화해 내는 그녀가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녀는 대단해 보였다.

박수갈채와 환호성 외엔 웃을 일이 없었던 관객들은 3막 후반부 고양이들의 공연장면에서 맘껏 스트레스를 풀게 된다. 익살스런 동작과 실감나는 연기를 보며 아이들은 낄낄거리며 좋아하는 모습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1막에서 4명의 왕자들이 오로라공주와 함께 나오는 장면을 보며 TV프로그램의 연예인 짝짓기가 떠오른다는 점이다.

웬 생뚱맞은 소리냐고 하시겠지만 4명의 왕자 앞에서 오로라공주의 솔로 바리에이션이 이어지는 상황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여러 명의 남자 출연자들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자 출연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고만고만한 내용의 오락프로그램들이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상상에 잠시 잠겨본다.

라일락 요정과 다섯 요정이 함께 공연하는 모습
라일락 요정과 다섯 요정이 함께 공연하는 모습 ⓒ 유니버설발레단
우아함과 화려함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발레공연을 보고나니, 춤에 대한 숨겨진 욕망이 끓어오르는 것 같아 왠지 신이 난다. 딱 까놓고 말해서 같은 기회에 뮤지컬과 발레공연 중 어느 하나를 택하라면 아직은 뮤지컬을 보러 갈 것 같다.

하지만 '딱딱하고 재미없기만 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발레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 것 하나만으로도 성과는 분명 있어 보인다. 이제 발레에 대해 애정을 갖고 또 다른 작품을 보는 것에 도전해도 좋을 듯싶다. 마인드가 생겼다는 것만 해도 대단하다는 뿌듯함이 가슴 한 켠에서 밀려온다.

덧붙이는 글 |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4월 5일부터 9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됩니다. 

맛있는 음식과 멋스런 풍경사진을 테마로 하는 제 홈피 '멀리서 바라보다 뜨겁게 사랑하기' 
(http://blog.naver.com/grajiyou)에도 올려 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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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고 대자연을 누리며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서울에서 평생 살다 제주에서 1년 반,포항에서 3년 반 동안 자연과 더불어 지내며 대자연 속에서 깊은 치유의 경험을 했습니다. 인생 후반부에 소명으로 받은 '상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더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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