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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늘은에 선홍빛 홍매화가 활짝 피어 고가의 운치를 더하고 있습니다.
파란 하늘은에 선홍빛 홍매화가 활짝 피어 고가의 운치를 더하고 있습니다. ⓒ 서재후
어느 봄날 아침, 창 안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놓았다 잠을 쫓습니다. 이미 해는 바지런히 올라와 정수리를 향하고, 큰 창문 밖으로 보이는 마당엔 봄빛이 경쾌한 리듬으로 내려앉았습니다. 비가 내려도 좋습니다. 봄비니까요. 이제 봄이 제대로 왔구나 싶습니다.

남사마을의 고가에 난 쪽문이 막혀있지않아 좋습니다.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탐방할수 있으닌까요.
남사마을의 고가에 난 쪽문이 막혀있지않아 좋습니다.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탐방할수 있으닌까요. ⓒ 서재후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길, 전날의 피로도 잊은 채 밤새도록 남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꽁무니를 빼며 사라지는 불빛만이 현재 위치가 고속도로라고 알려줄 뿐입니다. 몽롱한 상태에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힘들게 도착한 숙소에 여장을 풀고 잠을 청했지만 뒤척거리다 온몸에 힘이 빠지더니 새벽녘에야 잠이 듭니다.

최씨가의 홍매가 하늘을 받고 있습니다.
최씨가의 홍매가 하늘을 받고 있습니다. ⓒ 서재후
우리의 옛 선인들은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 매선(梅仙)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옛 시인들은 매화를 가까이 두고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처럼 의인화 하여 불렀습니다. 또한 매서운 겨울바람을 이기고 봄꽃 중 맨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기에 모든 꽃 중 으뜸으로 여겼습니다. 경남 산청에는 오래된 매화가 유난히도 많습니다. 매실을 얻기 위해 대단위로 심어놓은 매화(倭梅) 와는 태생부터가 다릅니다. 한국의 토종매화입니다.

산천재에 남명매 한가지가 아침햇살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산천재에 남명매 한가지가 아침햇살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 서재후
경남 산청의 산천재(山天齋)에는 남명매(南冥梅)가 있습니다. 이곳은 남명 조식 선생이 제자를 양성했던 곳입니다. 여느 지방의 작은 도시처럼 고요합니다. 문 앞에는 동네 노인이 봄 햇살 잘 드는 석대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일찍 찾아온 방문객을 번갈아 봅니다.

산천재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환하게 웃으며 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매화나무가 반갑게 손짓을 합니다. 어서 오라고 말이죠. 이곳 매화는 300년 수령의 백매(白梅)로서 주변의 매화나무에 비해서는 젊은 축에 속합니다. 그래서인지 가지마다 매화가 가득가득 합니다. 뜰 안에 매향도 한가득 입니다. 코끝에 은은하게 묻어있는 남명매의 향을 느끼며 단속사지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단속사지의 정당매 입니다. 지금은 윗둥이 잘려나가 볼품이 없지만 여전히 활짝 꽃을 피워 매향을 짓습니다.
단속사지의 정당매 입니다. 지금은 윗둥이 잘려나가 볼품이 없지만 여전히 활짝 꽃을 피워 매향을 짓습니다. ⓒ 서재후
단성면 운리 단속사지에는 인재 강희안의 조부인 통정공 강회백이 소년 시절 글공부를 하며 손수 심어놓은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이곳 매화는 백매를 피우는 고매(古梅) ‘정당매’(政堂梅)라는 이름으로 현존 한국 최고(最古)의 매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 정당매를 보고 지은 많은 옛시인들의 시 내용을 보면 이 매화의 연대를 추정하기 쉽지 않지만 대략 700년 수령이라고 합니다. 줄기는 본래 세 개였는데 줄기 2개가 고사하여 윗부분을 잘라 내었습니다.

지금은 윗둥이 잘려 그저 나지막한 뒷방 노인신세이지만 웅장한 나무에 가지들 마다 봄이면 어김없이 화려하게 꽃피웠던 날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봄이면 곁가지에서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홀로 서서 단속사의 흥망을 지켜보았을 생각을 하니 봄꽃놀이를 나온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여행 출발 전 한 친구의 말이 귀가에 선 합니다. “오래된 나무 좀 쉬게 냅둬” 라고 말이죠. 그 친구와 같이 왔습니다. 운리에는 정당매의 영향을 받아서 인지 논두렁, 밭두렁에 야매(野梅)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 정당매 좌측으로 있는 오래된 두 그루의 매화나무는 누구하나 돌봐주지 않는 야매의 강인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무거운 마음을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려 남사마을로 향했습니다.

남사마을의 최씨고가의 홍매입니다. 고가의 기풍과 잘 어울리게 홍매가 피었습니다.
남사마을의 최씨고가의 홍매입니다. 고가의 기풍과 잘 어울리게 홍매가 피었습니다. ⓒ 서재후
남사마을은 성주 이씨 고가(古家)를 비롯하여 최씨 고가, 하씨 고가 등 경남의 옛 고택들이 즐비한 곳입니다. 지금은 남사예담촌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씨고가는 사양정사라는 별채가 따로 있습니다. 특징은 건물 오른쪽에 지금의 아파트 베란다처럼 앞이 트인 공간이 마련되어있습니다.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나지막한 책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책을 읽던 곳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직도 후손들이 살고 있거나 관리를 하고 있어 비교적 정리가 잘 되어있습니다. 또한 고가들 안에는 고풍스런 주택과 잘 어울리는 오래된 매화나무들이 있습니다. 최씨 고가의 뜰에는 100년쯤 되는 홍매(崔氏梅)가 만개하여 있습니다.

남사마을의 하씨고가의 분양매 입니다. 제 몸을 감아 늘어진 줄기는 세월의 흔적을 말합니다.
남사마을의 하씨고가의 분양매 입니다. 제 몸을 감아 늘어진 줄기는 세월의 흔적을 말합니다. ⓒ 서재후
매화 집으로 알려져 있는 하씨 고가에는 600년이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홍매(汾陽梅)가 있습니다. 이 고가는 원정공 하즙이 살았던 곳으로 동학란 때 소실 된 채 지금은 그의 31대손인 하철(河澈)이 새로 집을 지어 "분양고가(汾陽古家)"라는 '석정(石汀)'이 쓴 액자를 걸어 놓아 옛 명문가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으며, 사랑방 앞에는 대원군의 '원정구려(元正舊廬)'라는 친필액자가 보관 되어 있습니다.

마침 방문했을 때 하씨 할머님이 계셔 이 고가의 내력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작년에는 고매의 어린가지에 홍매가 피었으나 올해는 꽃망울만 올라온 상태입니다. 안타깝게 꽃을 짓기엔 기력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내년 봄을 다시 기약하며 돌아 나오는 순간, 하씨 할머니는 뒤뜰에서 분양매 묘목을 주시며 분양매가 피면 다시 오라고 당부합니다. 잘 키우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마지막 여행지로 발길을 돌립니다.

남사마을의 사양정사로 들어가는 돌담길에 아지랭이가 피어있습니다.
남사마을의 사양정사로 들어가는 돌담길에 아지랭이가 피어있습니다. ⓒ 서재후
사군자에 드는 매화는 함부로 살찌지도 않고, 번성하지도 않으며 고매가 되어서는 가지가 구불구불해지는 모습을 합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묵향 짙은 수묵화들로 우리곁에 다시 태어나곤 합니다.

도전리 마애불상군은 4층의 기단에 총 29기의 불상이 새겨져있고, 많은 불상이 한꺼번에 집단으로 배치되어 있는것은 극히 이례적이라 합니다.
도전리 마애불상군은 4층의 기단에 총 29기의 불상이 새겨져있고, 많은 불상이 한꺼번에 집단으로 배치되어 있는것은 극히 이례적이라 합니다. ⓒ 서재후
이번 여행과는 약간 동떨어진 주제이지만 여행객의 욕심일까요? 놓치면 아쉬울 듯 합니다. 마지막 여행지인 도전리 마애불상군은 자연암반에 30cm 크기로, 모두 4단으로 배치되어 있고 총 29기의 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불상의 모습은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석가여래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불상이 모여 있는 것은 당시의 신앙과 관련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전체적인 조각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말에서 고려시대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어집니다. 누구의 불심이었을까요? 이런 절벽에 자신의 불심을 아로새겨놓은 주인공이. 원인의 근거도 남기지 않은 채 말이지요. 무지한 후세인으로서는 도무지 그의 도량을 가늠 할 수 없습니다.

추운 겨울의 두툼한 옷 위로 느껴지는 햇살과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느끼는 봄은, 비록 백지 한 장 차이이지만 온몸의 신경망을 타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번져가는 봄의 온기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봄날은 분명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와 있습니다.

산천재의 앞 뜰의 남명매입니다. 산천재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뜰안의 그윽한 매향이 가득합니다.
산천재의 앞 뜰의 남명매입니다. 산천재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뜰안의 그윽한 매향이 가득합니다. ⓒ 서재후

덧붙이는 글 | 제블로그에 오시면 더 많은 사진과 글을 보실수 있습니다.

가는길: 서울 → 경부고속도로 →대전∼통영 고속도로 단성나들목(20번 국도)→남사마을→호암교→단속사터→호암교→산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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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잊고 살았던 꿈을 조금이나마 실현해보기 위해서라면 어떨지요...지금은 프리렌서로 EAI,JAVA,웹프로그램,시스템관리자로서 일을 하고 있지만 어렸을때 하고싶었던일은 기자였습니다. 자신있게 구라를 풀수 있는 분야는 지금 몸담고 있는 IT분야이겠지요.^^;; 하지만 글은 잘 쓰지못합니다. 열심히 활동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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