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일본이 관객석에서 경기를 즐기던 시절은 지났다. 이제 일본은 직접 링에 올라와 싸워야 한다."

세계적 수준에서의 미군 재편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아미티지 전 미 국무부 부장관의 말이다. 미군의 핵우산 아래 안보를 맡기고 경제 발전에 전념했던 '전후 일본'의 타성에서 벗어나, 이제는 미군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군사 활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충고이자 경고이기도 했던 그의 메시지는 최근의 주일미군 재편 과정을 보노라면 일본에서 철저하게 관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주일미군 재편으로 기지 이전 장소로 결정된 지역 주민들의 반발은 거세다. 지난 3월 12일, 새로운 항공모함 기지로 예정된 이와쿠니에서 실시한 주민투표에서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의견은 87%에 달했다. 주일 미군의 75%가 집중된 오키나와 역시 반대 운동의 열기가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또 오키나와의 일부 기지를 괌으로 이전하는데 있어 미국이 일본에 이전 비용과 신기지 건설 비용의 75%를 부담할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 국민 대다수가 고개를 내젓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지역주민들의 이러한 조직적 저항 운동에도 불구, 거침없이 질주하는 미-일 군사 동맹 강화에 브레이크를 걸기에는 이미 늦은 듯하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 점령군이 맥아더 사령관을 선두로 일본 본토에 처음 발을 내딛은 것은 1945년 8월 30일 오후 2시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당시에는 그 누구도 미군이 60년이 넘는 장기간 동안 일본에 주둔하게 되리라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일본이 다시 독립국가가 되었음에도, '미 점령군'은 '주일미군'으로 변신, 오늘날까지 일본에 잔류하게 된다. 주둔의 명분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과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등 동북아의 위태로운 안보 상황과 격화되는 냉전 체제 속에서 일본 열도를 대소 봉쇄의 전초기지로 활용하고자 한 미국의 전략적 판단의 산물이었다.

구 미일안보조약에서 '극동의 방위'를 역할로 명시하고 있는 주일 미군의 성격이 급격히 변하게 된 계기는 베트남 전쟁이었다. 매일같이 엄청난 양의 폭탄을 무차별 쏟아부었던 미 전투기의 90%는 일본의 미군 기지로부터 이륙하거나 연료를 공급받았다. 베트남 전장에서 부상당한 미군의 70%는 일본의 미군 기지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당시까지 미군의 지배 하에 있던 오키나와는 물론이요, 본토까지 후방기지로서 총동원되어 풀가동되었던 것이다. 오키나와 기지가 없는 베트남 전쟁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 역할은 지대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미군 기지의 전략적 중요성과 주일 미군의 위상은 한층 높아진 것이다.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 체제가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일 미군이 여전히 주둔하고 있는 것도 베트남 전쟁의 '학습 효과' 때문이다. 실제로 걸프전부터 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미군 기지의 역할은 탈냉전 이후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러나 주일 미군의 활동 범위가 극동을 넘어 여타 지역으로 확장되는 것은 명백히 일본의 평화 헌법과 미일안보조약에 위배된다. 공교롭게도 이 번거로운 제도를 뜯어고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1994년 한반도의 북핵 위기였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할 수도 있었던 일촉즉발의 위험 상황에서, 클린턴 행정부가 북핵을 포기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 일본의 준비가 부족했다는 점에 있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수행할 경우, 일본은 후방기지로서 적극적인 지원을 해야 하는데, 일본의 법과 제도의 정비가 여전히 미비했던 것이다. 더불어 한반도의 유사 사태는, 동북아에 밀집되어 있던 엄청난 군사력을 고려하건대 국지전으로 끝나지 않고 주변 국가들 사이의 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즉, 일본은 후방기지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군사력의 행사도 요구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미국(과 일본)은 94년 핵 위기를 제네바 합의를 통해 일시적으로 '봉합'하고 95년부터 이러한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취해왔다. 1996년 미일 신 안보선언이 발표되고, 이듬해 1997년 신 방위 가이드라인이 개정된다.

이를 통해 주일 미군이 일본 '주위' 지역에 개입한다는 방침을 공식화한다. 그리고 1999년 주변사태법이 가결되고, 2001년 9·11테러 후에는 반테러 특별조치법이 제정된다. 이로써 일본은 미국의 후방 지원 뿐만이 아니라, UN의 비준 없이 일본 국회의 사후 승인만으로도 자위대를 해외에 파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이 법이 제정되자마자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자위대 함정이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되었음은 의미심장하다. 마침내 자위대의 역할이 더 이상 '자위'에 머물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03년, 이라크 전쟁의 개전과 더불어 일본은 미국과의 공동 작전을 위해 이지스함을 중동으로 출격시킨다. 지금도 일본의 해상 자위대는 인도양에서, 육상 자위대는 이라크에서 미군과 긴밀하게 보조를 맞추며 군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주일 미군 재편 문제가 미군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일본의 미래와도 직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의 자위대는 이미 주일 미군과 군사 기지를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 첨단 기술과 고급 군사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또 전시뿐만이 아니라 평시에도 연합 작전 훈련을 수행하고 있다. 올해 3월 27일부터는 육·해·공으로 분리되어 있던 자위대가 통합 운용 체제로 재편되어 미군과의 협조를 한층 강화할 태세다. 일부에서 동맹을 넘어 '군사 일체화'에 진입했다고 평하는 것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자위대의 변신과 더불어 일본 열도 전체가 미국의 군사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허브'로서 활용되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미 해병대의 중축을 이루는 제3 해병 원정군은 오키나와에 있다. 세계 최대의 공군탄약보급기지 역시 오키나와에 있다. 또 세계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제 7함대의 모항은 요코스카이다. 세계 유일의 항공모함 전투단과 수륙양용기전단도 일본에 있다.

게다가 2008년에는 유일한 피폭국 일본의 요코스카에 핵 항공모함까지 배치될 예정이다. 이 정도 되면 일본도 링에 올라와 싸워야 한다고 충고했던 아미티지가 최근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일 동맹은 이미 미영 동맹에 버금가는 수준에 도달했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지난해 11월 교토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와 부시 대통령은 돈독한 신뢰 관계를 과시하며 미일 동맹을 '산소'에 비유했다. 일상적으로 느끼지는 못하지만 미일 동맹의 강화는 일본의 안보뿐만이 아니라 지역 질서의 안정, 그리고 세계 평화의 유지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이다.

미일안보체제가 전후 일본의 경이적인 번영의 토대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소중한 산소도 농도가 짙어지면 해가 되는 법이다. 작은 불씨가 대형 화재로 이어지는 것 또한 산소 때문이다. 이미 주일 미군 재편과 맞물린 일본의 재무장화는 동아시아 지역 전체의 군비 경쟁을 야기하고 있다. 탈냉전 이후 세계적 수준에서의 군축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비가 증강하고 있는 유일한 지역이 동북아이다. 작은 분쟁이 엄청난 재앙의 씨앗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시아 국가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하는 것 또한 미국의 세계 전략에 편승한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과 무관하지 않다. 미군과 더불어 자위대가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에 파병될 경우, 언젠가 필연적으로 발생할 미래의 사상자에게 국가에 의한 상징적인 보상을 미리 국민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현재 서서히 그 전모를 드러내고 있는, 21세기 초의 미-영-일의 신 동맹은 20세기 초반의 미-영-일 동맹을 연상시킨다. 즉 부시, 블레어, 고이즈미의 삼각 동맹은, 20세기 초의 영일 동맹과 태프트-카츠라 조약의 뉴 버전으로 읽히는 것이다. 영일 동맹과 태프트-카츠라 조약은 20세기 초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식민지 지배 전략의 담합이었음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한반도의 비극도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21세기 초, 다시금 부활하는 미-영-일 동맹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뉴욕, 런던, 도쿄는 세계 금융 시장의 핵이며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이다. 정보 혁명과 결합된 금융 자본주의의 글로벌화는 세계를 단일한 질서 속으로 포섭했고, 더 이상 제국은 영토에 기반한 식민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군대의 역할도 식민지의 경영과 관리에서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탈냉전 이후의 단일 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미-일 동맹의 성격 변화와 주일 미군의 활동 범위의 광역화, 그리고 자위대의 해외 활동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로써 전후 일본의 토대였던 평화 헌법 개정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일본은 다시 전쟁할 수 있는 1945년 이전의 '보통국가'를 향해 폭주하고 있다. 아니, 이미 전야(戰夜)에 진입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일본 교민지 '한국인 정보'에 함께 실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