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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고랑 만들다가 도라지 심봤다
밭고랑 만들다가 도라지 심봤다 ⓒ 이승숙
우리 집 도라지는 그냥 도라지가 아니다. 그 도라지들은 장장 6년씩 묵은 도라지들이다. 그러니 심봤다를 외칠 수밖에.

강화로 이사 온 그 해 봄에 도라지 씨를 뿌렸다. 도라지 씨는 까맣고 아주 잘았다. 나는 도라지 먹을 셈으로 도라지 씨를 뿌린 게 아니라 꽃 볼 욕심에 씨를 뿌렸다. 그때 시골로 이사 간 딸네를 도와주기 위해서 늙으신 친정아버지께서 보름 정도 우리 집에 와 계셨는데 친정아버지는 도라지를 심겠다는 딸이 걱정스러우셨는지 은근하게 이러셨다.

"야야, 돌개 그거는 가꾸기가 에러븐데. 싹 나마 풀 뽑기가 예사 일이 아이다."

그때만 해도 천방지축 모르고 설치던 나는 아버지 충고를 귓등으로 들으면서 이렇게 대꾸했다.

"아부지요. 그까짓 잡초 그거는 뽑아 주마 되지 뭐요. 그거 뽑는 기 뭐 일이겠심니꺼."

그런데 내 호언장담은 몇 달 못 가서 장탄식으로 바뀌고 말았다.

"아구야. 이 풀을 우에 다 뽑으꼬? 어는 기 도라지고 어는 기 풀인지 모르겠네."

도라지 어린 싹은 참말로 어리고 연약했다. 풀 뽑다가 도라지 뽑기가 예사였다. 그리고 얼마나 촘촘하게 씨를 뿌렸는지 도라지밭 풀 뽑기는 그 해 내 풀 뽑기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그렇게 가꾼 도라지 밭이었다. 도라지는 해마다 때 되면 꽃을 피워주었다. 나는 내 꿈대로 도라지꽃을 실컷 보는 낭만에 빠져 살 수 있었다.

꽃망울 터뜨리는 재미가 더 좋은 도라지꽃
꽃망울 터뜨리는 재미가 더 좋은 도라지꽃 ⓒ 이승숙
남편이 삽으로 푹푹 캐 준 도라지는 잘려진 거도 있었고 끊어진 것도 많았다. 도라지를 풍성하게 받은 기쁨은 잠깐이었고 그걸 다 깔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그래서 꾀를 냈다.

"여보 여보, 도라지 당신이 좀 까줘 응? 나는 다른 거 좀 할게."

일요일 아침 우리 집 밥상은 도라지 무침으로 평정했다. 봄도라지는 쓰지도 않고 맛이 아주 좋았다.

도라지 무침 한 접시에 아침상은 그득하다
도라지 무침 한 접시에 아침상은 그득하다 ⓒ 이승숙
도라지 키워서 반찬 해 먹을 생각은 안하고 꽃 볼 생각만 하는 아내를 밉다 생각지 않고 늘 곱게 봐주는 마당쇠 남편이 있어서 우리 집은 삐거덕대면서도 잘 굴러간다. 보라색 꽃만 피우는 도라지 밭보다는 하얀색 꽃도 드문드문 피어 있는 도라지 밭이 더 아름답듯이 현실에 발을 담그고 살면서도 꿈을 꾸면서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도라지 씨를 같이 뿌렸던 친정 아버지는 한 해 한 해 늙어가시는데 도라지는 해해년년 속이 차고 알이 굵었습니다. 새콤달콤하게 무친 도라지 무침 속에는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도 같이 들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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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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