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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집에서 준 구아바.
아랫집에서 준 구아바. ⓒ 김관숙
며칠 전에는 옆집인 딕 스미스(DICK SMITH) 사장이 자기네 농원에서 가져왔다고 하면서 싱싱한 바나나를 두 송이나 주었습니다. 이 집을 비롯해 한 블럭에 줄지어 들어선 주택들이 거의 모두 그의 소유이고, 알아주는 상당한 재력가인데도 바나나송이를 들고 와서 자랑을 하면서 줄 정도로 아주 검소하고 소탈한 사람입니다.

딕 스미스 사장이 주었습니다.
딕 스미스 사장이 주었습니다. ⓒ 김관숙
사실 나는 딸이 사는 이 집에 처음 들어섰을 때만 해도 이웃들이 이렇듯이 따듯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딸애 집도, 이웃집들도 모두 철저하게 중무장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웃집과의 사이에 담을 대신하는 철조망들이 높다랗게 둘러쳐져 있어 이웃집 정원과 집이 훤히 바라보이는데 창문이며 현관문들이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건설 현장에서나 볼 수 있는 굵은 철근으로 만든 안전망과 안전망 덧문을 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알루미늄이나 스테인레스로 만든 안전망이 아닙니다.

그런데다 해가 저문 후에는 가급적 외출을 삼가라고 하고 어느 집이던 포치(PORCH)나 현관 앞에는 새벽까지 밝은 보안등을 켜 둡니다. 집 안에는 성능이 우수한 방범 경보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두어 달 동안이기는 해도 이웃들과 자자분한 정을 나누고 살기는커녕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다가는 서울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창문입니다.
창문입니다. ⓒ 김관숙
현관문입니다.
현관문입니다. ⓒ 김관숙
그런데 어느 날 아침입니다. 출근하는 딸애를 대문 밖까지 배웅을 하고 나서 남편과 포치에 앉아 종아리에 달려드는 까만 모기들을 신문으로 쫓으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철조망 저쪽에서 "굿모닝"하고 말을 건네 오는 부드러운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랫집에 사는 중년남자입니다. 한 눈에 봐도 인도사람입니다.

나는 그 남자가 철조망을 따라 그의 집 대문을 향해 길을 천천히 올라가면서 꽃을 따는 것을 보았지만 인사를 건네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망설이던 중이었는데 그가 먼저 말을 건네 온 것입니다. 반가움보다는 숨통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습니다.

아랫집은 대문까지 나가는 오름길이 우리가 사는 집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 나 있습니다. 철조망 밑으로는 그 집 쪽으로도 우리 집 쪽으로도 크고 작은 온갖 꽃나무들이 있습니다. 중년의 그 남자가 철조망을 따라 가면서 바구니에 똑 똑 따 넣는 색색의 예쁜 꽃들은 물어보지 않아도 집에서 종교적인 행사에 사용하는 것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 이후 나는 그가 꽃을 따거나 새벽에 식빵을 사가지고 그 아름다운 길을 내려가거나 하면 먼저 "굿모닝"하고 인사를 건네고는 했습니다. 가끔 그는 승용차를 타고 그 길을 오가기도 합니다. 그럴 땐 그가 열린 창으로 얼굴을 돌리고 웃음을 날렸습니다. 나나 남편이 포치에 나와 있거나 뜰에 있으면 한 번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멀리 아파트가 보입니다.
멀리 아파트가 보입니다. ⓒ 김관숙
밑에 인도아저씨 집이 보입니다.
밑에 인도아저씨 집이 보입니다. ⓒ 김관숙
그는 아침이나 한 낮에 꽃들을 따고는 합니다. 작은 바구니 가득히 땁니다. 꽃을 따는 그의 모습은 얼마나 평화로워 보이는지 모릅니다. 어떤 날은 은은한 색상에 사리를 입은 몸피가 좀 있는 그의 부인이 나와서 꽃을 따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그의 부인도 아주 상냥합니다.

그 남자가 구아바가 담긴 하얀 비닐봉지를 우리에게 내밀 때 그의 얼굴에는 바로 그가 꽃을 따고 있을 때의 그 평화로움이 어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를 못했습니다. 마치 허물없는 가족 누군가가 주는 것을 별 생각 없이 받는 편안한 기분이었는데 남편은 그렇지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가 외국인이고 나이도 남편보다는 십여 년은 아래로 보이는데다가 우리 정서대로 고마움과 체면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딸애는 그가 무엇을 주고받기 위해서 구아바를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라 그냥 주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서 그랬을 거라고, 원래 이 곳에 인심이 그렇게 넉넉하고 또 사람들도 착하니까 부담은 갖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남편은 "거 그러면 쓰냐, 오는 게 있음 가는 것도 있어야지"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오늘 또 얻어먹고 있는 것입니다.

푸른 구아바를 연거푸 두 개를 먹고 난 남편이 또 창으로 푸른 숲에 덮인 아랫집을 바라다보며 말했습니다.

"거 미안하네, 우린 뭐 줄 게 있어야지."

나는 아무 말도 안 합니다. 서울에 가면 비싸기도 하지만 구경하기도 어려운 과일이라는 생각에 그저 욕심껏 먹기만 합니다. 구아바도 그렇지만 요즘 내가 먹는 열대 과일들 모두가 서울 가면 우리 형편에는 구경도 못할 것들입니다. 대형마트에 열대과일 코너가 있기는 해도 가격이 엄청 비싼지라 그 쪽 코너로는 가 볼 생각도 안 하고 살았었습니다. 수바에 있는 동안 아주 실컷 먹어둘 생각입니다.

실컷 먹어둘 생각입니다.
실컷 먹어둘 생각입니다. ⓒ 김관숙
"거 우리 쓰는 인삼비누 말야, 거 괜찮을 것 같은데."

문득 남편이 그렇게 말을 하더니 화장실로 가서 수납장을 열어 봅니다. 인삼비누가 달랑 세 장 남았습니다. 남편은 한 장을 꺼내 들고 수납장 문을 닫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수납장 문을 열더니 한 장을 더 꺼냅니다. 남편은 인삼비누 두 장을 하얀 비닐봉지에 싸면서 즐거운 눈으로 나를 봅니다.

"기회가 되면 줘야지."

다음 날은 토요일이었습니다. 버스터미널 옆에 있는 수바 시장은 토요일에 아주 큰 장이 섭니다. 빌리지 사람들이 새벽부터 싱싱한 물건들을 가지고 모여드는 날이기도 합니다. 일요일에는 장이 서지를 않습니다. 시장도, 크고 작은 상점들도 철저하게 휴업을 합니다. 나는 아침 설거지를 마치자마자 장을 보러가려고 대문을 나섰습니다. 중국인이 파는 배추와 비름나물 카사바를 살 생각입니다. 남편은 걷기운동을 하러 나갔습니다.

한적한 인도를 오르내리는 걷기운동을 하다가 말고 남편이 우리 대문과 엇비슷이 나 있는 아랫집 철근대문 안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 남자가 꽃을 따며 길을 올라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주변에서 놀고 있던 누렁이 한 마리가 남편을 보고 길길이 무섭게 짖어댑니다. 그의 제지로 누렁이는 얌전해졌습니다.

그도 남편도 아주 반가운 얼굴로 "굿모닝"합니다. 남편이 그가 들고 있는 바구니 속에 꽃들을 보고 참 아름답다고 하면서 바지 주머니에서 하얀 비닐봉지에 싼 인삼비누를 꺼내 주자 그는 이게 아닌데 하는 몹시 난처해 하는 표정이다가 곧 "땡큐 땡큐"했습니다. 그가 무엇을 주고받기 위해서 구아바를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라 그냥 주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서 그랬을 거라고 하던 딸애의 말이 떠오른 순간이기도 합니다.

나는 조금 부끄러워집니다. 남편도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던지 얼른 돌아서고 있습니다.

"아, 창피해. 얼른 시장이나 같이 가요."
"잊어버리자구."

그러나 나는 잊어버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만큼을 살고도 그의 순수한 마음을 읽을 줄을 모르다니 헛살아도 보통 헛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그 집 정원에서 딴 구아바를 구경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구아바는 시장에 가면 얼마든지 있는 거지만 그건 훈훈한 이웃 정이 흐르는 구아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만큼 오던 남편이 뒤를 돌아보고 빙긋 웃고 있습니다. 그가 비닐봉지에서 인삼비누를 꺼내어 코에 대고 향을 맡고 있습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그가 꽃을 딸 때와 같은 잔잔한 평화로움이 어려져 있었습니다. 그가 남편의 마음을 이해했나 봅니다.

갑자기 남편이 버스정류장을 향해 활기차게 성큼 성큼 앞장서 가면서 말했습니다.

"얼른 가자구, 불볕 퍼지기 전에."

덧붙이는 글 | 지난 겨울 피지의 수도 수바에 있는 딸아이의 집에서 지낼 때 겪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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