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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신호음만 계속해서 울려댔다. 어디 가신 것일까? 갑자기 걱정이 들었다. 어머니는 눈이 어두우시다. 나는 어머니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때 문득 눈에 띄는 게 있다. 전화기에 찍힌 숫자다. ○○○-○○○○. 어머니 집 전화번호다. 나는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련함으로 바뀐다. 어머니 집 전화는 햇수로 18년 되었다.

▲ 제 두딸(각 양쪽 끄트머리)과 처남 아이들입니다
ⓒ 박희우
1988년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88서울올림픽에 열광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가정집에 전기보일러를 가설해주는 일을 했다. 나는 인부였다. 기술이 없는 터라 단순노동을 해야 했다.

작업은 힘들었다. 해가 뜸과 동시에 일을 시작했다. 나는 어깨가 빠개지도록 질통을 짊어지고 다녔다. 1층은 그런대로 견딜만 했다. 문제는 2층이나 3층이었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계단에서 주저앉기를 되풀이했다. 어깨는 피멍이 들어 쓰리고 따가웠다.

질통을 메지 않을 때는 콘크리트를 쳤다. 여럿이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내가 힘들다고 함부로 쉴 수도 없었다. 손에 경련이 일어날 때까지 삽질을 계속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정말 참기 힘든 일은 방에 들어가서 구들장을 뜯어내는 일이었다.

방바닥은 콘크리트로 단단했다. 나는 곡괭이로 방바닥을 내리쳤다. 한 번 내려칠 때마다 퍼석퍼석 뿌연 연기가 일어났다. 조금 지나지 않아 방은 온통 먼지로 가득하다. 아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쿨럭쿨럭. 나는 연신 기침을 해댔다.

몸에서는 비 오듯 땀이 흘렀다. 어디랄 것도 없었다. 팬티까지 땀에 흠뻑 젖었다. 수건은 이미 물걸레가 된 지 오래다. 노동은 혹독했다. 나는 계속해서 물을 들이켰다. 그래도 갈증은 계속되었다. 이미 내 손에는 물집이 잡힌 지 오래다. 나는 저절로 터질 때까지 내버려두었다.

밥을 먹을 때는 숟가락 쥔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밥맛도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물에 밥을 말아먹곤 했다. 하지만 절대로 표시를 내지 않았다. 행여 일 못한다고 쫓아내지 않을까 겁이 났던 것이다. 사장이 밥을 먹다말고 내게 물었다.

“박군, 이런 일 처음이지?”
“예.”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힘든 노동은 처음이었다. 우리 집이 찢어지게 가난했으면서도 나는 이렇다 할 고생을 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책상에 앉아 공부만 했다. 어머니와 형들과 여동생은 내 학비를 대기위해 죽도록 일만 했다.

나는 가족들의 희생에 힘입어 무사히 법대를 졸업했다. 그때가 1987년이었다. 하지만 사법시험에는 번번이 떨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1988년에 법원 일반직 시험에 합격을 했다. 가족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좋아했다. 나는 그때 결심했다. 발령을 받을 때까지 어머니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었다.

"사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사장님이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살아가면서 큰 경험이 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공사가 끝났다. 계산해보니 15일 동안 일했다. 나는 더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사장님이 일거리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화왕산에서 찍은 제 모습입니다
ⓒ 박희우
사장님이 내 손에 돈을 쥐어주었다. 나는 돈을 받으면서 기어코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내가 힘들어서 흘린 눈물이 아니었다. 나를 위해 고생만 하신 어머니와 가족들에 대한 눈물이었다. 나는 집으로 뛰어갔다. 내가 번 돈 전부를 어머니에게 드렸다. 나는 어머니에게 신신당부했다.

“어머니, 이 돈으로 꼭 전화기를 놓아야 돼요. 그래야 제가 멀리 발령받더라도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리지요.”

그때 설치한 전화가 바로 이 전화다. 물론 우리 집에서 처음 들여 논 전화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더욱 애착이 간다. 내가 가지고 있는 통장번호나 <오마이뉴스> 비밀번호도 바로 이 전화번호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불효막심하게도 나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뭐가 그리 바빴는지 전화도 자주 드리지 못했다. 그런 못된 버릇이 50이 다 돼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머니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으신다. 아마 누님 손을 잡고 이웃집 할머니한테 놀러 가신 모양이다. 저녁 먹고 다시 해봐야겠다. 어머니께서 전화를 받으면 이렇게 말씀드려야겠다.

"어머니, 내일 들를게요. 뭐 드시고 싶으신 것 없으세요? 그냥 몸만 오면 된다고요. 알겠습니다, 어머니. 그럼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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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맞는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저는 수필을 즐겨 씁니다. 가끔씩은 소설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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