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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 자원무장친위대의 전투 모습(좌)과 1943년 라트비아 내에서 자원무장친위대 창설을 명하는 히틀러의 명령서(우).
라트비아 자원무장친위대의 전투 모습(좌)과 1943년 라트비아 내에서 자원무장친위대 창설을 명하는 히틀러의 명령서(우). ⓒ 라트비아 점령박물관 제공
1986년 3월 16일, 라트비아 민족연합정당인 '라트비아의 힘'을 비롯한 우익단체들은 이들 라트비아 자원무장친위대를 기리는 행사를 시작했다. "무장친위대는 히틀러에 충성한 게 아니라 라트비아 독립과 공산주의(소련)를 막기 위해 존재했다"고 주장한 이 행사는 이후 매년 개최되면서 라트비아 내에서도 많은 논란을 낳았다.

특히 라트비아에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은 "무장친위대를 기리는 것은 신나치즘"이라며 맹렬히 비난했다. 라트비아에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의 단체 '슈탑'의 드미트리 총무간사는 "이날(3월 16일)은 기념해야 할 이유가 없는 날이다. 라트비아 자원무장친위대는 명백히 나치 군대의 일원이었으며, 국제법정에서 그들이 독일인들의 전쟁범죄에 참가한 것이 판명됐다. 이날을 기념하는 것은 그들의 저지른 전쟁 범죄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말이며, 이것은 신나치주의를 기념하는 행사와 다름없다"고 역설했다.

세계 언론들도 "나치주의의 부활"이라며 우려의 눈길을 보냈다. 1993년 영국의 <가디언>지는 "라트비아의 무장친위대 베테랑들이 다시 행진을 시작했다"며 "라트비아는 전 세계에서 SS들에게 바치는 기념물이 세워지는 유일한 나라이며 독일에 점령당했던 동쪽 영토 중 유일하게 자신을 순수 아리안족으로 여기는 민족"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라트비아 우익단체들의 자원무장친위대 행사를 흑과 백으로만 갈라보기엔 복잡한 사연이 숨어있다.

2차대전에 휘말린 라트비아의 비운

1939년 8월, 소련과 독일 외무부장관은 폴란드를 중심으로 독일과 소련의 세력권을 나눈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했고, 이를 바탕으로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대전이 시작됐다. 동시에 소련은 폴란드 동부였던 발트 3국을 영향권 아래 넣었고 1940년 6월, 리투아니아를 시작으로 발트 3국을 침공했다.

1941년 6월 라트비아에 진격한 독일군들, 그들을 해방군으로 여긴 라트비아 사람들이 환영하며 꽃을 전달하고 있다.
1941년 6월 라트비아에 진격한 독일군들, 그들을 해방군으로 여긴 라트비아 사람들이 환영하며 꽃을 전달하고 있다. ⓒ 라트비아 점령박물관 제공
소련의 침공은 서유럽 문화권에 속해 있던 발트 3국에 악몽을 안겨 주었다. 소련과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처형됐고 농장과 사유재산은 모두 국가로 넘어갔으며 교회 또한 금지됐다. 1941년 6월 13일과 14일 밤, 당시 라트비아인 1만5천여 명이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됐다. 정치범이라는 이유였지만 실제 정치범의 비율은 낮았으며 어린이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단 1%만이 고향으로 돌아왔을 뿐 상당수는 강제 이주 열차와 집단노동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던 독일과 소련 양국은 1년도 안 돼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사이가 됐다. 1941년 6월 독일 군대는 동쪽으로 진격해 소련의 붉은 군대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소련의 공포정치에 떨고 있던 라트비아인들에게 독일군들은 '해방군'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독일이 라트비아를 위해 함께 싸우며 라트비아를 독립국가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고 히틀러의 독일군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공산주의 소련에 맞서기 위해 독일군에 자원입대했다.

하지만, 그 달콤한 상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독일군은 많은 젊은이를 전쟁터로 끌고 갔고 군수물자 확보에 열중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히틀러는 '전 국토를 전장화하고 국가 전체를 병영화하는' 총력전을 선언하고 1943년 1월 독일이 아닌 다른 민족으로 구성되는 자원친위대를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

1944년 라트비아에 재진격한 소련 '붉은 군대'의 행진.
1944년 라트비아에 재진격한 소련 '붉은 군대'의 행진. ⓒ 라트비아 점령박물관 제공
이에 라트비아 정부는 독일로부터 '종전 후 독립국가 창설을 돕는다'는 약속을 받고 자원친위대 결성에 동의, 3월 16일 라트비아 자원친위대 2개 대대를 창설했다. 하지만, 실제 자원한 사람은 15%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강제동원이었다. 그렇게 해서 약 11만5천 명의 라트비아인들이 전쟁 끝 무렵인 1945년 전선에 투입돼 그중 3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라트비아의 독립과 공산주의로부터 유럽을 수호하려는 라트비아인들의 뜻과는 달리 독일은 유대인 학살에 열중했고 라트비아 자원친위대 역시 그 죄를 함께 뒤집어썼다.

이어 독일은 패전국으로, 소련은 승전국으로 종전을 맞았고 발트 3국은 다시 소련에 복속 됐다. 자원친위대에 입대한 군인들과 가족은 적군에게 동조했다는 명목으로 숙청됐으며 소련의 1차 침략 때보다 두 배나 많은 사람이 시베리아로 압송됐다. 라트비아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라트비아 자원무장친위대는 종전 후 멍에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역사는 현재의 라트비아에도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 라트비아에 살고 있는 라트비아 원주민들과 러시아인들의 충돌로 이어지고 있는 것. 그리고 이들의 내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3월 16일 라트비아 자원무장친위대 추모시위다.

충돌 : 신나치즘 부활이냐, 애국열사 추모냐

라트비아 자유와 독립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 그러나 그날을 철저히 출입이 금지되고 경찰의 통제가 삼엄했다.
라트비아 자유와 독립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 그러나 그날을 철저히 출입이 금지되고 경찰의 통제가 삼엄했다. ⓒ 서진석
지난 3월 16일에도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는 어김없이 라트비아 자원무장친위대 추모 행사가 열렸다. 라트비아 정부가 3월 16일에는 어떠한 시위나 집회도 허락하지 않는다고 공식 발표했으나 100여 명의 시위대는 경찰의 삼엄한 경비와 바리케이드를 뚫고 리가 구시가지에 모여들었다.

'라트비아의 힘'을 비롯해 이날 행사를 준비한 사람들은 돔 성당에서 전쟁용사들을 기리는 미사를 집전했다. 미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젊은이들은 그들에게 꽃을 하나씩 건넸다. 그들은 당시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이거나 사망한 참전 용사들의 가족들이었다.

시위에 참석한 한 노인은 "나는 소련의 볼셰비즘에 저항하는 전쟁에 참여한 용사였다, 2차대전이 시작되자 러시아는 라트비아를 점령했고, 점령자에 맞서 싸우기 위한 해방전쟁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에스토니아 국기를 들고 집회에 참석한 핀란드계 에스토니아인 리스토씨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독일 사람들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해서 라트비아 사람들이 책임질 필요는 없다"고 답했다.

이후 사람들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용사들이 묻혀 있는 묘지로 자리를 옮겼다. 참배를 마친 참가자들은 오후 5시부터 라트비아 점령박물관 앞을 행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시위 참가자들의 행진이 예정된 오후 5시가 다가오자 박물관 앞 광장으로 라트비아 자원무장친위대 추모에 반대하는 러시아인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경찰과 함께 라트비아 참가자들의 길을 막는 러시아인들.
경찰과 함께 라트비아 참가자들의 길을 막는 러시아인들. ⓒ 서진석
러시아인들이 "파시스트들은 가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하자 행진 참가자들은 "라트비아"라는 구호로 대응했다. 한 시간 정도 밀고 밀리는 대치가 계속됐고 박물관 앞에는 처음보다 두 배나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6시경 광장에는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들의 팔에는 나치의 철십자가와 함께 '나치 반대 파시즘 반대'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고 붉은색의 옷에는 소련 시절 사용되던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었다. 그들은 라트비아에 살고 있는 러시아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파시스트의 나라, 라트비아!"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대를 압박했다. 인간띠를 만들고 있던 한 러시아 청년은 "우리는 라트비아에 퍼지고 있는 파시즘을 반대한다. 라트비아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조국"이라고 말했다.

결국, 경찰은 몸싸움을 벌이던 라트비아인들과 러시아인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2차대전 당시 라트비아 군인들이 부르던 노래가 흘러나왔고 라트비아 국가를 비롯한 노래들이 이어졌다. 6시 30분경 행사 주최 측은 폐막을 선언했지만 그 이후에도 인파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날 행사로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에서 온 사람들을 포함, 65명이 체포됐지만 다음날 모두 석방됐다.

'3월 16일을 스탈린주의와 소련의 지배에 맞서 싸운 전투를 기리는 국제적인 기념일로 정한다'라고 적힌 피켓을 든 노인(좌). 전투에 참가해서 목숨을 잃은 할아버지를 추도하기 위해 꽃을 들고 나온 여성이 앞을 막는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우).
'3월 16일을 스탈린주의와 소련의 지배에 맞서 싸운 전투를 기리는 국제적인 기념일로 정한다'라고 적힌 피켓을 든 노인(좌). 전투에 참가해서 목숨을 잃은 할아버지를 추도하기 위해 꽃을 들고 나온 여성이 앞을 막는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우). ⓒ 서진석
라트비아 원주민 vs. 러시아인, '전쟁'은 계속된다

2차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에 참여했던 라트비아 출신의 전범자들은 이미 국제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처벌을 받았다. 올 2월 11일 이스라엘을 방문한 라트비아의 바이라 비체-프레이베르가 대통령은 "라트비아 민족 중에도 유대인 학살에 동조하거나 참여한 사람이 있다"고 시인하고 공식사과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사과는 개인적으로 유대인학살에 동조한 사람들에 대한 반성이었지 라트비아 무장자원친위대 활동 자체에 대한 사과는 아니었다. 라트비아 정부가 2004년 2월 밝힌 공식입장은 친위대 차원의 유대인 학살을 부정하고 있다.

"라트비아 친위대는 라트비아에서 유대인 학살이 끝난 후 약 1년 후에 창립되었다. 2차 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전쟁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나치 정당과 SS 비밀경찰(Sicherheitsdienst)에 참여하긴 하였으나, 이것으로 라트비아 군대 전체가 범죄조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단체도 각각 개인이 저지른 일을 가지고 평가할 수는 없다...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무장친위대는 독일의 무장친위대와는 엄밀히 다르다. 라트비아 군대가 SS(나치친위대) 부대에 포함된 것은 단순히 형식상 차원이다. 1950년 9월 1일 미 전쟁난민위원회도 "발트3국에서의 무장친위대는 독일 SS와 목적, 이데올로기, 업무와 구성에서 전혀 다른, 독립적인 단위이며, 본 위원회는 그들의 전적이 미 정부에 적대적인 활동이 될 만한 것이라 보지 않는다"고 명백히 발표한 바 있다."


라트비아가 겪은 침략과 점령의 역사를 정리해 놓은 점령박물관의 2차대전 역사 전문가인 울디스 네이부륵스도 "자원무장친위대는 독일이 행한 전쟁 범죄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한 사실은 전부 소련 정부가 만들어낸 선전문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2차대전 종료와 함께 세계는 전범국을 심판하고 다시 평온을 되찾았지만 적어도 라트비아에서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 혼란스럽던 시기에 전쟁의 틈바구니에 끼어들게 됐던 라트비아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일지라도 믿지 말았어야 할 대상인 독일을 해방군으로 믿고 그들과 손을 잡았다가 역사의 단죄를 함께 받았다. 그들이 염원해 마지않던 독립은 1991년에야 가능했다.

시위행렬이 경찰에 둘러싸인 채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점령박물관 앞 광장에 해가 지고 있었다. 왼편에 서 있는 위엄 있는 석상은 2차 대전 중 러시아의 편에서 독일에 맞서싸운 소총수들의 동상.
시위행렬이 경찰에 둘러싸인 채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점령박물관 앞 광장에 해가 지고 있었다. 왼편에 서 있는 위엄 있는 석상은 2차 대전 중 러시아의 편에서 독일에 맞서싸운 소총수들의 동상. ⓒ 서진석
이런 역사 속에서 점령군의 위치에 있던 러시아인 상당수는 종전 후 라트비아에 남아 라트비아 국민이 되었다. 라트비아내 우익 뿐만 아니라 원주민 상당수는 아직도 소련에 대한 적개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러시아인들은 그런 라트비아인들을 향해 파시즘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서로 다른 역사인식은 크고 작은 부분에서 3월 16일 시위와 같은 충돌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2차대전 종전 60년을 맞고 있는 라트비아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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