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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도서출판 삼인
<이 아무개의 장자산책>을 읽었다. 여기서 '이 아무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관옥(觀玉) 이현주 목사이다. 왜 그는 자신의 번듯한 이름 석자를 버리고, 어찌 보면 치기조차 엿보이는 엉뚱한 필명을 사용한 것일까? 책을 펼치기 전에 나는, 판화가 이철수의 솜씨가 인상적인 표지 그림과 글씨를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느릿느릿 이야기'의 박철 목사가 쓴 <행복한 나무는 천천히 자란다>에 소개되어 있는 관옥 이현주 목사의 일화가 떠올랐다. 강화도 교동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박철 목사가 평소 스승으로 생각하며 흠모하고 있던 관옥 이현주 목사를 초청하여 신앙강연회를 가졌다고 한다. 강연회 첫 시간에 관옥이 인사를 하고 나서 말했다.

"좀 전에 들어오다 보니 현수막에 '이현주 목사 신앙강연회'라고 적어놓았던데, 오늘 첫 시간이 끝난 다음에 현수막에 큰 글씨로 쓴 이현주라는 이름을 지우시거나 현수막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찌 내 이름을 앞에 달고 신앙강연회를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나를 초청해 준 박철 목사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안 하면 나는 한마디도 말을 안 하고 가겠습니다."

박철 목사가 관옥의 말대로 했음은 물론이다. 관옥 이현주 목사의 그릇의 크기를 짐작케 해주는 이 일화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10년 전에 출간한 <이현주의 장자 산책>을 손보아 새로 펴내면서 그가 자신의 이름을 버린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렇지만, 흔히 익명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아무개'라는 이름을 필명으로 선택한 그의 깊은 속뜻을 온전히 헤아리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그가 이끄는 <이 아무개의 장자 산책>에 동행이 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는 책을 펼치고 보름 동안 천천히 그와 함께 '장자 산책'을 즐겼다.

깊고 거대한 사유의 숲을 통과하는 그 산책길은 동ㆍ서양을 횡(橫)하고 고금(古今)을 종(縱)하고 있어, 모두 품어내기에는 나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훗날 다시 걷게 될 나를 위하여, 그리고 장자 산책길에 처음 나서는 이들을 위하여, 다만 내가 보았던 나무 몇 그루를 적어두고자 한다.

2.

지구 전체를 동시에 읽는 컴퓨터 문명 속에 살면서, 새삼스레 기원전 4세기 중국의 한 철학자를 읽는 까닭이 무엇인가? 현란한 21세기 최첨단에서 '공자왈 맹자왈'이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도움을 준단 말인가? 노자, 장자가 살았던 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생판 다른데, 그들의 낡은 생각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가르침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질문에 나는 대답한다. 연이 바람 타고 하늘 높이 오르는 것은 그 줄이 땅에 묶여 있기 때문이라고. 줄이 풀어지거나 끊어지면 연은 곧장 땅에 떨어질 것이라고. 장자의 생각이 수천 년 세월에도 사라지지 않은 까닭은 그 뿌리가 대지에 든든히 박혀 있기 때문이요, 근본을 붙잡은 그의 생각을 우리가 잃는다면 21세기 눈부신 컴퓨터 문명도 순식간에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라고. (9-10쪽, 머리말)


'이 아무개'가 장자 산책길의 입구에 세워놓은 이 안내문에 등장하는 연과 나무의 비유는 의미심장하다. 바람 타고 하늘 높이 날고 있는 연과 나뭇가지마다 가득한 꽃과 열매에만 주목하기 쉬운 우리에게, 연을 붙들어 매고 있는 땅 위의 줄과 꽃과 열매를 키우는 땅 속의 뿌리에게로 시선을 돌릴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장자는, 아니 이 아무개는 드러난 현상보다는 그 현상을 있게 하는 근본을 들여다볼 것을 우리에게 주문한다. 근본을 들여다볼 때, 모든 것이 실체는 그대로 있고 단지 겉모습이 바뀐 것일 뿐이라는 진실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래서 숨어 있는 실체로는 만물(萬物)이 일물(一物)이요, 드러난 모습으로는 일물이 만물이다.

우주의 대폭발 이론에서 이미 입증되었듯이, 세계와 나는 같은 뿌리로 소급되는 한 몸인 것이다. 장자의 곤(鯤)과 붕(鵬)이 결국은 한 몸인 것처럼 헤아리는 나(主)와 헤아려지는 세계(客) 사이에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듯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와 한 몸이니, 세상 만물로부터 따로 구별되어 존재하는 '나'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나' 없음, 즉 '무기(無己)'로, 장자 산책길에 내가 첫 번째로 만난 나무의 이름이다. 이 '무기'의 나무 아래 서 있는 사람은 인간의 기준에 입각한 '쓸모(用)'로써 사물을 판단하는 우(愚)를 결코 범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인간의 쓸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들 자신을 위한 나름대로의 쓸모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이른바 '문명'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인간의 관점에서 사물의 쓸모를 착취하여 건설한 것이니 슬프기 짝이 없다. 더 통탄할 일은, 사물의 쓸모를 착취하는데 그치지 않고 남들과 자기 자신마저도 쓸모라는 관점에서 끊임없이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자기의 '쓸모'로만 보는 사람은 자기 자신까지도 '쓸모'라는 관점으로밖에는 보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 노장(老莊)의 근심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인간을 타락시키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막을 것이며 타락 이전의 상태로 돌이킬 것인가?

자기를 '쓸모'라는 관점에서 보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쓰여지지 않을 때 그것을 차마 견뎌내지 못한다. 그래서 오직 쓰임 받고자, 능력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자신에게 이런저런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고 마침내 인생을 파멸로 몰아간다. 인간의 어리석음이 여기에까지 이르렀다! (193쪽, 제4장 인간세(人間世))


우람한 나무가 일찍 나무꾼의 도끼에 찍혀 넘어가듯이 쓸모 있음(有用)은 쓸모없음(無用)만 못한 경우가 많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 누리며 살아가는 자존, 자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의 쓸모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 전제가 되는 것이 바로 '나' 없음(無己)에 대한 자각이다.

그런데 역설적인 사실은, 이렇게 나의 쓸모를 부정할 때 나의 쓸모는 가장 극대화되어 두루 미치게 된다는 점이다. 줄기가 뒤틀리고 속이 썩어 들어가 목재로는 쓰이지 못한 나무가 오랫동안 살아남아 온 마을 주민들이 우러르는 커다란 사당 나무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이루고자 하지 않으면서 이루고, 하지 않으면서 하는 것을 일러 장자는 '무공(無功)'이라 칭하고 있다.

계곡 물이 흐르는 것은 무슨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햇빛이 저렇게 쏟아지는 것은 무슨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래서, 물과 햇빛은 온갖 나무와 짐승을 먹여살리는 것이다. 이를 두고, 하지 않고서 한다고 말한다. 벗 사이의 사귐도 그런 것이어야 한다. 인간의 사랑도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 사이에 아무리 하찮은 정도라도 '계산'이 오고 간다면 그것은 우정도 사랑도 아니다. (308쪽, 제6장 대종사(大宗師))

미리 공(功)을 의도하지도 않거니와 공을 세웠어도 그뿐, 그 공을 자랑하지 않은 햇빛과 물처럼 자연의 모든 사물들은 자신의 공을 자랑하는 법이 없다. 공(功)을 세웠어도 공의 임자로 나서지 않는다. 이처럼 장자 산책길에 만나게 되는 두 번째 나무인 이 '무공(無功)'의 나무는 우리 인간에게 겸손할 것을 주문한다. 특히 자연 앞에서 겸허해지라고 말하고 있다.

자연은 인간의 문명이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근본인데도 우리 현대인들은 그걸 쉽게 잊어버린다. 자랑함이 없이 온갖 나무와 짐승을 먹여 살리는 자연의 위대한 공(功)에 비할 때, 우리 인간이 이룬 문명이란 사실 미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한 줌도 안 되는 공을 자랑하는데 여념이 없다. 이름에 대한 욕심 때문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 속담은 분명 도가(道家)와 상관없는, 상관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도가에서 볼 때 역겹고 저속한 속담이다. 이름을 남기려는 마음이야말로 사람을 그르치는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이 살다 보면 무슨 일인가 하게 되고 그 결과로 이름이 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노장(老莊)이라고 해서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단 이름이 나거든 그 자리에서 몸을 빼라는 것이 노자의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이름을 탐하는 것이야말로 서로를 헐어내리는 것이요 마침내 이웃과 다투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름을 탐하여 서로를 헐어내리게 될 때 이미 덕이란 찾아볼 수 없다.

최고의 덕은 부덕(不德)이라, 그래서 진짜 덕이 있는 것이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해야 비로소 자선이 자선일 수 있다. 이름은 꽃과 같다. 보이지 않는 뿌리를 보는 사람에게는 세상에 드러나 보이는 꽃과 열매에 집착하는 것이 모든 탈의 원인으로 인식되게 마련이다. (153-154쪽, 제4장 인간세(人間世))


따라서 우리는 공을 이루었으되 스스로 제 이름을 내지 않는 '무명(無名)'의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 장자산책길에 만난 세 번째 나무인 이 '무명'의 나무에 이르러, 나는 관옥 이현주 목사가 자신의 이름 대신에 '이 아무개'라는 필명을 내세운 이유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장자>를 주해하는 자리에 부처와 예수, 육조혜능과 서산대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틱 낫한 등 동서고금의 위대한 성인들과 사상가들을 함께 불러들이고 있는 이 책의 만만치 않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결코 현학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바로 지은이의 '무명(無名)'의 마음가짐을 책의 제목에서부터 읽게 되기 때문이다.

지식을 출세의 수단으로, 자기 이름 내는 방편으로 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이 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우뚝 내세우는 대신에 그저 '이 아무개'라고만 밝혀 놓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는 관옥 이현주 목사가 장자의 가르침을 깨닫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철저하게 실천하고 있는 데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3.

그렇다. 우리가 "지인무기(至人無己), 신인무공(神人無功), 성인무명(聖人無名)"을 깨달아 마음속 깊이 담았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그치면 헛일이다. 노장(老莊)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인간, 즉 도(道)의 경지에 도달해 신(神)과 같이 자유자재한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는 부단히 거듭나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참된 깨달음은 단순한 인식이 아니며, 거듭나 새로워지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것 하나로 종신(終身)함에 아쉬울 것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 아무개의 장자산책>을 읽고 내가 마침내 도달한 이 깨달음 역시, 거기 그 자리에 그렇게 처음부터 있어 왔던 자연(自然)에 비추어 보면, 한낱 인위(人爲)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아, 나는 아직 멀었다.

참으로 깨달은 자는 자기가 무엇을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얻은 바 깨달음'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맹인이 눈을 뜸으로써 밝은 세상을 얻는 것은 아니다. 밝은 세상은 거기 그렇게 처음부터 있었다. 새삼스레 얻어낼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깨달음'도 그러하다. 얻은 바 없이 얻는 것이 깨달음이다. (365쪽, 제7장 응제왕(應帝王))

덧붙이는 글 | <이 아무개의 장자 산책> 

ㅇ이 아무개 지음
ㅇ(주)도서출판 삼인 펴냄
ㅇ2004년 10월 11일 초판 1쇄
ㅇ정가 : 18,000원


이 아무개의 장자 산책

이현주 지음, 삼인(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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