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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폰아타에서 바라본 이식쿨 호수.
촐폰아타에서 바라본 이식쿨 호수. ⓒ 김준희
바람소리에 잠을 깬 나는 밖을 내다보았다. 산악지역인데다 호수가라서 그런지 밤과 새벽에 불어오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자면 마치 빗소리가 연상될 정도다. 기온이 낮아서가 아니라 바람 때문에 춥다고 느껴지는 곳이다. 쌀쌀한 오전 날씨 때문에 다시 침대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강했지만,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나니 그런대로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빵과 주스로 대충 밥을 때우고 밖으로 나왔다.

촐폰아타는 작은 도시다. 도시라기보다는 그냥 마을이라고 하는 것이 어울릴 만큼 작은 곳이다. 내가 타고 온 버스의 길이 중심가이고 그 주변으로 많은 민박집과 카페와 상점과 바자르가 늘어서 있다. 민박집의 상당수는 시즌이 지나서인지 영업을 하지 않고 있고 카페도 문을 닫은 곳이 많다.

햇살은 따갑지만 산악지대인데다가 호수에서 불어오는 찬바람 때문에 낮에도 긴 옷이 필요한 곳이다. 이런 촐폰아타는 중심가에 원형으로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호숫가를 따라서 길게 늘어서 있다.

난 중심가에서 호수쪽으로 뻗어 있는 작은 길을 걸었다. 햇살은 따갑고 인적이 없는 거리에는 개가 뛰어다니고 있다. 양옆으로 나무가 늘어서있는 길을 따라서 10분 정도 걸어가니까 이식쿨 호수가 나타났다. 그곳에서 맞은편을 보면 촐폰아타의 다른 편이 보인다. 내가 본 이식쿨 호수의 첫인상은 바로 그 장면이었다.

정상에 만년설이 쌓인 높은 산과 그 아래로 늘어선 키 큰 나무들,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작은 집들. 파란 호수와 만년설 위에 얹혀진 구름과 파란 하늘. 이 장면은 여태껏 보아왔던 다른 호수들보다 더 아름다웠다. 바이칼의 웅장함, 홉스골의 아늑함과도 다른 이식쿨 호수의 첫 느낌은 아름다움이었다.

이식쿨 호수
이식쿨 호수 ⓒ 김준희
이식쿨 호수
이식쿨 호수 ⓒ 김준희
난 호숫가를 따라서 걸었다. 철 지난 해수욕장 같은 이곳에는 모래사장과 벤치가 군데군데 놓여 있다. 호숫가를 따라서 서쪽으로 걷다보면 뭔지 모를 공사를 하는 곳이 있고, 문 닫은 카페가 있다. 그곳에서 오른쪽을 보면 넓은 이식쿨 호수의 수평선이 눈에 들어온다. 호수는 아침햇살은 받아서 반짝이고 있고 그 위로 흰 새가 날아다니고 있다.

잔잔한 파도가 이는 호수를 보면서 난 모래사장에 앉았다. 이식쿨 호수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다. 처음 여행을 계획했을 때부터 이식쿨 호수를 마지막 지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앉아서 이식쿨 호수와 그 너머로 보이는 눈 덮인 산맥을 보고 있자니 그렇게 계획을 세우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이 경치를 보고 나면 도저히 다른 곳으로는 떠날 엄두가 나지 않을 것만 같다.

캐쉬미르 접경에 있는 달 호수(Dal Lake)를 바라보면서 누군가는 공포를 느꼈다고 하던가. 이식쿨 호수의 모습은 공포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외경임에는 틀림없다. 바이칼 호수가 깍은 듯한 기암괴석과 함께 샤먼과 주술의 분위기를 풍기며 웅장함을 나타낸다면, 몽골의 홉스골에선 완만한 산과 수풀로 인해 포근함을 느낄 수 있다.

이식쿨 호수는 만년설을 얹은 채 호수를 둘러싼 천산산맥 속에서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아니 아련하게 보이는 천산산맥은 호수를 둘러싼 것이 아니라 해발 1600m 호수 위에 둥실 떠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러니 오래전부터 이 호수 깊숙한 곳에 거대한 괴물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도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이식쿨 호수. 멀리 눈 쌓인 천산산맥이 보인다.
이식쿨 호수. 멀리 눈 쌓인 천산산맥이 보인다. ⓒ 김준희
이식쿨 호수.
이식쿨 호수. ⓒ 김준희
예전에 육상 실크로드가 한창일 때, 이 인근에 살던 투르기스족의 수령은 겨울이면 이곳으로 군대와 가축을 옮겨와서 겨울을 보냈다고 한다. 겨울에는 많은 눈이 내리고 호수바람 또한 차가울 테지만, 아무리 추워도 얼지 않는다는 이 호숫가는 아늑하게 겨울을 보내기 좋은 장소였을 것이다.

그리고 1400여 년 전에 불경을 구하기 위해서 천축으로 향하던 당나라의 승려 현장 삼장도 이곳을 거쳐 갔다고 한다. 현장 삼장은 이 호수를 가리켜서 '거대한 칭(靑) 호수'라고 말했다고. 현장은 아마도 이식쿨 호수의 남쪽을 따라서 지나갔을 테지만, 남쪽에서 본 풍경도 그리 큰 차이는 있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당시에는 지금 볼 수 있는 많은 집들 대신에, 보다 원시적이고 개발되지 않은 나무숲과 만년설이 쌓인 산이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호수에는 배 한척 떠 있지 않고 이곳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다. 여기에 앉아서 파란 호수와 구름이 얹혀진 산들을 보고 있자니, 과장된 생각일지 모르지만 내가 이걸 보기 위해서 그 먼 길을 돌아서 여기까지 왔구나 싶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식쿨 호수.
이식쿨 호수. ⓒ 김준희
촐폰아타에서 편안하게 3일을 보냈다. 촐폰아타에는 박물관이 하나 있지만, 박물관에 별 관심이 없던 나는 많은 시간을 호숫가에서 빈둥거리며 보냈다. 철이 지난 호숫가에는 현지인도 관광객도 없고 조용하게 찰랑이는 물소리 뿐이다. 많은 물줄기가 들어오지만 빠져나가는 물줄기는 없다는 이식쿨 호수. 그런데도 항상 지금의 수량을 유지하고 넘쳐나지 않는 것은 언제나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 때문일지 모른다.

호숫가 보다 내가 더 좋아했던 장소가 있다. 촐폰아타의 뒤쪽 그러니까 호수쪽이 아니라 산쪽이다. 촐폰아타의 뒤에는 민둥산 같은 낮은 산들이 있고 그 뒤로는 정상에 눈이 쌓인 높은 산이 있다. 마을 뒤로 나있는 길을 구불구불 따라서 뒤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넓은 벌판이 나오고 듬성듬성 집들이 있다. 그리고 소와 양이 풀을 뜯는 모습이 보인다. 거기서 좀더 뒤쪽으로 나아가면 낮은 산의 밑자락에 도착할 수 있다.

내가 좋아했던 장소는 그곳이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고 깨진 병이나 쓰레기도 없는 곳이다. 그곳에 놓여 있는 작은 바위 하나에 걸터앉아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온갖 바위가 놓여 있는 넓은 벌판과 키 큰 나무 사이로 여러 색의 지붕들, 그리고 그 너머로 이식쿨 호수가 보인다.

촐폰아타의 뒤쪽 산.
촐폰아타의 뒤쪽 산. ⓒ 김준희
촐폰아타의 뒤쪽 산
촐폰아타의 뒤쪽 산 ⓒ 김준희
늦은 오후에 혼자 이곳에 앉아서 호수와 집들을 바라보며 캔맥주를 홀짝이다 보면 세상에 남부러울 것이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집이나 호수조차 보기 싫을 때는 그냥 뒤로 돌아서 앉으면 된다. 뒤로 돌아앉으면 만년설이 얹혀진 산과 바위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10월 중순의 촐폰아타는 조용하다. 여름에는 많은 여행객들로 붐비고 시끌벅적한 곳이겠지만, 여행철이 지난 지금은 차도 사람도 별로 없고, 낮이나 밤이나 개 짖는 소리와 바람소리 외에는 들리는 것도 없다. 여행을 떠나면서부터 조용한 곳을 찾았던 나는 결국 여행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2005년 7월 부터 10월까지 4개월간 몽골-러시아(바이칼)-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키즈스탄을 배낭여행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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