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KBS
KBS 1TV 대하드라마 <서울 1945>(극본 이한호-정성희, 연출 윤창범-유현기)의 극중 배경이 드디어 일제 강점기를 지나 광복 이후로 접어들면서 이야기 구조의 일대 전환점을 맞는다. 60부작으로 기획된 이 드라마는, 제목처럼 해방 전후 시기를 배경으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격동의 시대를 헤쳐나가는 청춘남녀 4명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최운혁(류수영 분)과 김해경(한은정 분), 이동우(김호진 분)과 문석경(소유진 분), 이 네 주인공은 각기 자신이 믿고 따랐던 이념과 사랑을 가슴에 품은 채 비극적인 운명의 미로에서 서로 엇갈리게 된다.

해방 전후사는, 그야말로 한국 근현대사의 모든 상처와 치부를 간직한 '원죄'와도 같은 시대다. 이 시대의 역사적 인식과 해석 여부를 놓고 최근 학계에서도 다시 논란이 되고 있을 만큼 여전히 민감한 사안임을 고려할 때, 비록 드라마라고는 하지만 그 시대의 풍경을 어떤 시각으로 묘사할 것인가는 제작진으로서도 부담스러운 과제일 수밖에 없다.

낭만적 코뮤니스트나 친일파의 후손에 이르기까지, 민감한 설정의 캐릭터들을 중심인물로 내세웠다는 사실만으로도 <서울 1945>는 이데올로기적 색채를 피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일제 강점기만 하더라도 인물들이 대체로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는 동반자적 관계로 그려진 데다, 중심인물들이 초반 이후로 활동 공간을 달리하며 갈등 구도가 크게 부각될 틈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시대로 접어들면서, 인물들은 본격적으로 각자의 이념과 배경, 가치관에 따라 운명이 엇갈리며, 서로에 대한 애증이 교차하게 된다.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최운혁은 여운형을 따라 소련군과 함께, 이동우는 이승만을 따라 미군과 손을 잡고 각각 고국에 돌아오게 되며, 이제 두 사람의 우정은 피할 수 없는 좌우 이념대립의 틈바구니에서 갈라지게 된다.

그리고 두 남자의 사이에서 친일파였던 집안의 몰락을 경험하게 되는 문석경과, 그녀의 몸종에서 해방 이후 사교계의 여왕으로 변신하게 되는 김해경이 얽혀드는 4각 관계가 이어진다.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1991-1992)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1991-1992) ⓒ MBC
드라마는 캐릭터나 시대 배경 면에서 다분히 1991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떠올리게 한다. 최운혁과 김해경, 이동우 세 남녀를 둘러싼 애증 구도와 이념 갈등, 배경 묘사는 <여명의 눈동자>에서 최대치(최재성 분)-윤여옥(채시라 분)-장하림(박상원 분)의 삼각관계와 대단히 유사하다.

<여명의 눈동자>는 아직 군사정권과 보수화의 잔재가 남아있던 1990년대 초반으로서는 파격에 가까울 정도로 일제 강점기와 광복 이후, 6.25 동란에 이르는 격동의 시절을 관통하는 새로운 영상 해석으로 국내 드라마의 한계를 넓혔다는 찬사를 받았다.

<여명의 눈동자>가 걸작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만 하더라도 드라마에서 다루기 힘들었던 우리 근현대사의 민감한 치부들을 외면하지 않았던 작가적 시선에 있었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좀 더 등장인물들의 개인적 이야기에 카메라를 고정시키며 논란을 비켜가야 했고, 공산주의자였던 최대치의 면모를 좀 더 악역에 가깝게 변신시킬 수밖에 없었던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그러나 대체로 일제 정신대와 학도병 징용, 마루타, 반민특위와 제주 4.3항쟁, 빨치산에 이르기까지 종래 다루기 힘들었던 해방 전후 민족사의 상처들을 폭넓게 아우르며,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비교적 객관적인 시선으로 조명해낸 연출은 그 이후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비하여 <서울 1945>는 참신하고 진중한 기획의도에 불구하고, 정통 시대극으로서는 아직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제작 자체의 어려움이나 <여명의 눈동자>에 비하여 예산 부족과 배우들의 내공을 감안하더라도, 시대극이라는 장르에 걸맞지 않게 엉성한 고증과 상황 묘사는 연출과 극본의 한계를 돌아보게 만든다.

ⓒ KBS
무엇보다 <서울 1945>는 전체적으로 주인공으로 멜로드라마적 요소에 치중하며 시대 상황 묘사가 지나치게 한가롭다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된다. 창씨개명과 내선일체를 강요당하며 극심한 수탈에 시달리던 당대 민중들의 절박한 생활상이나 치열한 삶은 드라마에서 등장인물들의 개인적 이야기에 갇혀서 별로 다가오지 않는다. 더구나 2차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며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이른 상황에서도 정작 극 중에서는 아무런 긴박감이나 암시를 찾을 수 없다.

주인공 최운혁이 극적으로 탈출하게 되는 추격 신의 엉성함, 문석경과 개희(김해경 분)처럼 힘없는 여성 둘이 너무도 쉽게 국경을 넘어 무작정 러시아로 최운혁을 찾아오는 과정. 더구나 문석경이 드넓은 도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피아노 연주로만 운혁을 찾게 된다는 어이없는 설정 등, 마치 순정만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현실성이 배제된 우연에만 기댄 전개를 남발하는 것도 극의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그래도 가장 우려를 자아냈던 배우들의 연기가 점차 안정감을 찾아가고 있다는 점은 희망적이다. 극 초반만 하더라도, 김호진을 제외하고는 시대극 경험이 부족한 젊은 연기자들의 어색한 대사 소화는 중견 연기자들과 큰 격차를 드러내며 우려를 자아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새로운 이미지에 적응해나가고 있는 젊은 배우들의 연기가 호평을 받기 시작하면서 극의 매력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앞으로 논란의 시대를 정면으로 헤쳐나가게 될 <서울 1945>가 초심을 지켜나갈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드라마를 현실의 반영으로 여기는 수많은 사람들은 극에서 등장하는 이념논쟁이나 시대 묘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평가는 달라지는 것이며, 지금의 기준으로 당시의 사상이나 상황을 편향적 재단하는 것은 오히려 드라마의 기획의도를 망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제작진이 정치색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당시 상황과 초점에 맞춰서 드라마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다짐을 지켜나가기를 기대해본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