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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허투루 읽지 않았다. 항상 베개 밑에 두고 한 줄씩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물론 한꺼번에 많이 읽으려고 욕심도 내지 않았다. 하루에 몇 페이지씩 곱씹으며 읽었다.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읽고 나서는 언제나 입맛을 다시곤 했다. 그만큼 내게는 맛있는 책이었다.

▲ <달팽이 걸음으로 제주를 보다>의 표지입니다
ⓒ 박희우
"들꽃과 조우하려면 천천히 느릿느릿 걸어가야겠습니다. '달팽이 걸음'으로 걸어가야겠지요. 그렇게 걸어가면 뒤처지고 더딜 것 같았는데, 아니 그곳에 숨은 지름길을 발견했습니다. 빠른 걸음걸이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지름길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름길 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이고 그 길이 어디로 이어졌는지를 보려고 하니 자꾸만 몸을 낮춰야 했습니다."- 서문에서 -

작가는 꽃과 풀과 제주도에 남다른 애정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꽃과 수풀 속에서 뛰어놀다 보면 배고픔도 잊을 정도라고 했다. 그가 세상을 알 나이쯤 되었을 때 그는 제주도에서 목회생활을 했다. 그런 그가 책을 펴냈다.

제목은 <달팽이 걸음으로 제주를 보다>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 보면 꽃과 풀과 제주도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들풀 중에서도 특히 '잡초'에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그가 말하는 잡초는 바로 우리 이웃이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고, 이름은 있되 그 어느 삼류 일간지에라도 이름 한 번 난 적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서민 또는 민중이라고 불리는 잡초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들풀들 중에 잡초가 가장 많은 것처럼 이 세상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죠."

그 사람들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온 천하보다도 소중한 존재들인데, 마치 잡초를 뽑아버리고, 제초제를 뿌려 뿌리까지 말려 죽이려 한다며 저자는 끝내 가진 자들에 대한 원망을 여과 없이 발산하고야 만다.

"지도자라고 자청하는 자들이,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서민들에게 죽어라 죽어라 무거운 짐을 강요합니다. 아무리 땀 흘려 일해도 늘 그 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 절망감, 아픔을 그들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작가는 서양 꽃들에 자꾸만 밀려나는 우리네 꽃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다. 작가의 눈에는 제주의 들판을 노랗게 물들이는 서양민들레가 곱지만은 않다. 하지만 "토종 것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착이 아니라 서양 것들에 밀려나는 우리네 역사를 보는 것 같아 마음 아프다"는 표현으로 자신의 서운함을 에둘러 표현하기도 한다.

작가의 자연에 대한 숭고함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작가는 책에서 '느릿느릿, 작은 것, 못생긴 것, 단순한 것, 낮은 것'을 삶의 화두로 삼는다고 했다. 바다 예찬도 그 중 하나다. 작가는 바다를 이렇게 정의한다.

"가장 낮은 곳,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 곳이 바다입니다. 그래서 바다는 가장 깊고, 넓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더 낮아지고 낮아지면 나도 바다처럼 넓고 깊어질 수 있을까요?"

▲ 서양 꽃은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들풀은 소박하기만 합니다.
ⓒ 박희우
<달팽이 걸음으로 제주를 보다>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춘, 하, 추, 동이 바로 그것이다. 각각 기후 특성에 맞게 글을 정리해 놓았다. 봄에는 '새싹에 쓴 편지'라는 제목으로 모두 9개의 소제목이, 여름에는 '바다에 새긴 편지'라는 제목으로 10개의 소제목이, 가을에는 '낙엽에 담은 편지'라는 제목으로 9개의 소제목이, 겨울에는 '하얀 눈 위에 쓴 편지'라는 제목으로 8개의 소제목이 각각 붙었다.

"언제 바라보아도 예쁜 꽃, 그 많은 꽃이 사람들과 눈 맞춤을 다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냥 피었다가 보아주는 사람 하나 없이 진다면 그것도 슬픈 일일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이 꽃 저 꽃 바라보며 "안녕!"하고 인사를 합니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며 걸어다니는 길에 발바닥이 간지럽습니다. 혹시라도 그 연약한 것들을 밟을까 조심조심 걷습니다."('변산바람꽃에 빠져보시겠습니까?'에서)

작가의 투명하고 명징한 글들은 모두 그의 청결한 생활에서 나왔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해볼 수 있다. 작가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지금까지 1000편 넘게 글을 기고했다. 2006년도에는 '올해의 뉴스게릴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임어당 선생의 <생활의 발견>을 읽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어려운 곳이란 도무지 없으면서도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는 힘이 <생활의 발견>과 비슷했다. 하지만 <생활의 발견>에는 중국식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달팽이 걸음으로 제주를 보다>에는 한국식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작가는 말한다.

"사실 먹성 좋은 달팽이는 작은 텃밭에 반가운 손님은 아닙니다. 어찌나 먹어대는지 윤기 나는 이파리를 넝마로 만들어 놓으면 밉기도 합니다. 그래도 달팽이가 좋습니다. 느릿느릿한 삶의 화두를 던져주기 때문이고, 달팽이가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먹어야 할 먹거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달팽이에 대한 소고는 이렇다. 달팽이가 느리다고는 하지만 종착지는 언제나 같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쉬엄쉬엄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게 바로 <달팽이 걸음으로 제주를 보다>가 내게 남긴 교훈이 아니었을까.

달팽이 걸음으로 제주를 보다 - 비주얼 에세이 1

김민수 글.사진, 안그라픽스(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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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맞는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저는 수필을 즐겨 씁니다. 가끔씩은 소설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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