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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밑의 창고에는 담비 50벌과 말곰 가죽 20벌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 가죽들은 모두 고가의 것으로 황금 몇 백냥과 맞먹는 가치가 있었다. 일본인들은 이 가죽옷을 차지하기 위해 발해사절을 간절히 기다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어르신!"

"우린 어떻게 해서든 살아서 일본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 조공을 빼앗긴다고 해서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데 크게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양태사는 왕신복의 말을 듣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목숨이었고, 그래야만 일본으로 무사히 갈 수 있는 것이다. 양태사는 해적의 두목으로 보이는 자를 직접 찾아갔다. 그는 창을 들어 양태사를 위협했지만, 양태사는 날렵한 동작으로 창끝을 피하고는 그 앞에 바짝 붙어 섰다.

"너희는 어느 나라 놈들이냐?"

그렇게 물었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직감적으로 그의 말을 알아듣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태사가 내처 말을 이어갔다.

"우리 배의 선실 창고에는 아주 귀중한 담비와 말곰 가죽이 여러 벌 있다. 이것을 너희에게 넘길 터이니 너희는 속히 물러가거라."

해적의 두목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며 미간이 좁아졌다. 하지만 이내 원래의 표정을 회복하고는 들고 있던 창끝으로 양태사의 목 쪽을 내리쳤다. 양태사는 아슬아슬하게 몸을 피해 그에게서 떨어졌다. 이어 왕신복이 있는 선실로 달려갔다. 그러자 해적들이 떼를 지어 그 뒤를 쫓아왔다. 5명이 넘는 놈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오는 게 보였다.

"좌윤 어른! 어서 피하십시오."

왕신복은 뒤쪽의 선실입구를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들어가서는 갇힌 꼴이 되고 만다. 그는 선실을 옆으로 끼고 돌아 선미 쪽의 갑판으로 뛰어갔다. 양태사가 칼을 휘두르며 적들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왕신복도 들고 있는 칼을 빼어들었다. 그 순간 심한 충격과 함께 앞으로 쓰러졌다. 옆에서 누군가 칼집으로 그를 내리친 것이다. 상대는 복면을 하고 있는 기골이 장대한 사내였다. 두건으로 보이는 두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 했다. 그는 심호흡을 크게 하며 칼을 내리쳤다. 왕신복은 몸을 옆으로 굴려 그 칼끝을 피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칼로 그의 얼굴을 내리쳤다.

상대는 동작이 빨랐다. 정면으로 향하는 칼끝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허리를 뒤로 숙였다. 하지만 칼끝을 온전히 피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며 쓰고 있던 두건을 잘라냈다. 순간 상대의 얼굴이 드러났다. 뺨 위에 커다란 점이 난 놈이었다. 그 점 옆으로 칼이 스쳐가 핏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순간 그와 두 눈이 마주쳤다. 사내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천천히 뒷걸음질치며 칼을 다시 움켜쥐었다.

왕신복 또한 오른손으로 칼의 손잡이를 잡고, 왼손을 곧추 뻗어 공격자세를 취했다. 그가 칼을 들어 힘껏 내리치려는 순간,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서너 명의 해적이 달려왔다.

혼자서 그들을 당해내기는 무리였다. 왕신복은 얼른 몸을 피했지만 배 끝부분의 막다른 곳에 이르고 말았다. 그의 앞에는 다섯 명이 넘는 해적들이 칼과 창을 겨누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시커먼 바닷가 아가리를 벌이고 있는 것처럼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맨 앞에 선 해적 두 명이 기합을 내지르며 동시에 달려들었다. 아슬아슬하게 그들을 피하자, 이번에는 나머지 놈들이 창을 휘두르며 압박해왔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대로 버티다가는 그들의 칼끝에 난도질당할 것이 뻔했다.

왕신복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잠시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뒷걸음질치며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몸이 바다 속이 잠겼다가 다시 물 밖으로 몸이 떠올랐다. 그러자 이번에는 해적들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지독한 놈들이었다. 경황이 없는 중에도 그들의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해적이라면 귀한 물품만 약탈하고 재빠르게 사라지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자신을 쫓아와 죽이려 하고 있다.

왕신복은 화살을 피하기 위해 다시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쉭, 쉭. 화살이 바다 속으로 함께 날아왔다. 그는 더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더 이상 화살이 날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물 속에서 오랫동안 버틸 수는 없는 노릇. 손발을 헤느적거려 다른 쪽으로 움직였다. 배에서 많이 떨어졌다 싶은 곳에서 다시 물위로 올라왔다.

숨을 쉬려고 고개를 쳐들자 회색 하늘이 보였다. 배에서 멀어지자 주위가 검은색을 덧칠한 암흑의 세계로 바뀌고 말았다. 하늘과 같은 색깔을 머금은 파도는 성난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다.

파도소리와 함께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의 것과 흡사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양태사의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쪽으로 가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는 그런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몸이 지쳐가며 차츰 밀려오는 듯한 감각과 함께 공포감이 전신을 휩싸기 시작했다. 가물가물 멀어지는 의식의 끈을 잡으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귓속에는 파도소리 대신 '지잉'하는 낮은 울림이 퍼져갔다.

양태사가 있는 쪽으로 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과 발을 허우적거려 보았지만 두 발과 손은 허공을 저을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파도머리와 골 사이로 빠지고 앞 뒤 물의 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파도가 머리 위를 지나가고 바닷물이 입과 코로 흘러들었다. 매운 기침을 뱉아 내자 호흡이 가빠왔다. 혹독하게 수영연습을 했지만 갑작스런 상황에, 더구나 파도가 거세게 몰아쳐 손발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지자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손발이 따로 움직였다.

숨을 쉬기 위해 턱이 아프도록 입을 벌렸다. 하지만 몸은 금새 수면 아래 끌어내려 물이 위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머리카락이 해초처럼 흔들거리며 가라앉는 게 보였다. 새파란 입술에는 동물 같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물 속에서는 공명이 되어 퍼져나가지 못했다.

물위로 오르자 있는 힘을 다해 널빤지가 있는 쪽으로 헤엄을 쳐갔다. 손을 뻗어 겨우 널빤지 한쪽 귀퉁이를 짚었다. 하지만 손에는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손바닥을 펼쳤다 오므렸다 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아득한 심연으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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