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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자를 성추행해 국회 윤리특위에 제소된 최연희 의원은 '버티기'로 일관하며 국회 안팎의 의원직 사퇴 요청을 무시하고 있다.
여기자를 성추행해 국회 윤리특위에 제소된 최연희 의원은 '버티기'로 일관하며 국회 안팎의 의원직 사퇴 요청을 무시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정계를 뒤흔들 것 같던 최연희 의원(전 한나라당 사무총장)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 국민적 비난 여론이 들끓던 사건 초기 거세던 의원직 사퇴 요구 목소리도 수그러드는 듯하다.

사건 발생 이후 17일째 잠적 중인 최 의원은 주변과 연락을 끊은 채 강원 동해시 근처의 펜션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 78%가 사퇴를 원해도(여론조사기관 리서치엔리서치 8일자 조사결과) '은둔' 전략 하나로 버틸 수 있는 그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답은 뻔하다. 국회의원들의 윤리위반을 처벌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국회 안에 윤리특별위원회(위원장 김원웅 의원)가 있지만 '있으나 마나' 하다. 그동안 윤리특위는 윤리심사안이나 징계요구안을 접수, 회의를 여는 정도에 그쳤다.

윤리특위가 이처럼 무력화된 것은 일차적으로 허술한 제도에 원인이 있다. 여기에 노회한 정치인들의 기막힌 '생존전략'이 가세하면서 윤리특위는 식물위원회로 전락해 버렸다. 17대 국회 윤리특위에 제소된 건수는 모두 42건. 하지만 징계는커녕 공개사과를 한 국회의원은 지금껏 한 사람도 없다.

17대 국회 윤리특위 제소 주요 의원
소속 성명 제소 이유처리 결과

열린우리당

김한길2000년 한솔부회장으로부터 1억원 수수윤리규정 위반
천정배국감 중 군사기밀 폭로 야당 의원에게 '스파이' 발언부결
정청래김정훈 의원 대정부질문 도중 욕설 주장폐기
김낙순술자리에서 동석자 폭행폐기
김덕규행정도시건설법 처리 편파적 의사진행기각
최재천국가보안법폐지 법안 기습 상정폐기
이은영이강두 의원 건설업체 뇌물 수수 허위폭로공개회의 경고
박영선국회 운영위원회에서 남경필 의원 모욕철회

 최용규

 이원영

 정성호

국감 중 대구술자리 추태

        폐기

한나라당김문수국회 본회의에서 명패 던지는 등 물리력행사출석정지 5일
곽성문대구지역 상공인들과 술자리에서 맥주병 투척윤리규정 위반
김태환골프장 경비원 폭행윤리규정 위반
김정훈정청래 의원 욕설 사실 부인하며 맞고소폐기
임인배국회의장 점거농성 중 국회 여직원에 욕설계류중
남경필노회찬 의원 보좌관이 한나라당 의원 비서관 폭행했다고 주장폐기
전여옥노회찬 의원 보좌관이 한나라당 의원 비서관 폭행했다고 주장폐기
주성영이철우 의원 간첩 암약 주장, 국감 중 대구술자리 추태 등공개 사과
박승환이철우 의원 간첩암약 주장, 행정도시건설법 관련 회의장 점거경고
김기현이철우 의원 간첩암약 주장경고
이재오 박계동 배일도행정도시건설법 관련 법사위 회의장 점거공개회의 경고
최연희술자리에서 동아일보 여기자 성추행계류
이종구국회 정무위 회의 도중 욕설, 물리력 행사폐기

주호영김성조

국감 중 대구술자리 추태

폐기

민주노동당노회찬최구식 의원 비서 폭행폐기
ⓒ 오마이뉴스 김영균


버티기와 감싸기... "일단 3개월만 보내자"

제소된 국회의원이 윤리특위를 무력화시키는 가장 좋은 첫 번째 방법은 '버티기'. 욕설이나 폭행, 취중 추태로 제소돼도 일정 기간만 지나면 무사하다. 현행 국회법상 윤리특위 제소는 사건 발생 10일 이내, 안건 상정과 처리는 3개월 이내로 제한돼 있다. 이 기간이 지나면 제소할 수도, 처벌할 수도 없다. 이른바 '기한만료 자동폐기' 규정이다.

국회의원들은 이 규정 덕을 톡톡히 활용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는 지난해 파문을 일으켰던 '대구국감 술자리추태'. 이 사건으로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 등 모두 7명이 제소됐지만, 윤리특위는 안건을 논의조차 못하고 자동 폐기했다. 3개월 기한이 끝났기 때문이다.

최연희 의원의 성추행 사건도 마찬가지다. 여야 의원들이 최 의원을 윤리특위에 제소했지만, 3개월 내 결론을 내리지 못하면 이번 안건도 자동폐기된다. 물론 윤리특위 결의로 심의기한을 3개월 더 연장할 수는 있다. 하지만 윤리특위 결정이 최 의원 사퇴에 아무런 법적 구속력을 미치지 못하는 점을 본다면 크게 기대할 게 사실 없다.

국회의원들의 윤리특위 무력화를 위한 두 번째 방법은 '감싸기'. 당 지도부나 유력한 정파의 권력자에 힘입어 윤리특위 상정 자체를 가로막는 전략이다. 지난해 '대구국감 술자리 추태' 뒤 여당 윤리특위 간사인 이상민 의원이 현장에 있던 같은 당 의원들을 제소하자 당시 정세균 열린우리당 의장은 "정신이 있는 거냐"고 진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의장은 윤리특위 제소 다음날인 그해 10월 6일 오영식 공보담당 원내부대표를 통해 "국회 윤리특위 여당 간사인 이상민 의원 등이 소속 법사위원들을 윤리특위에 제소한 것을 철회해줄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비록 이상민 의원의 반발과 국회 안팎의 비난 여론으로 제소는 철회되지 않았지만, 어이없는 '식구 감싸기'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였다.

물타기-동정론도 한몫

지난해 5월 28일 지역구 저녁식사 자리에서 주먹을 휘둘러 물의를 빚어 국회 윤리특위에 제소됐으나 3개월 기한만료 폐기조항에 의해 아무런 처분을 받지 않은 김낙순 열린우리당 의원.
지난해 5월 28일 지역구 저녁식사 자리에서 주먹을 휘둘러 물의를 빚어 국회 윤리특위에 제소됐으나 3개월 기한만료 폐기조항에 의해 아무런 처분을 받지 않은 김낙순 열린우리당 의원. ⓒ 오마이뉴스 이종호
버티기와 감싸기 외에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은 '물타기'. 도덕적 비난을 받아야 할 일이 분명한데도 '정쟁'으로 몰아가 여론의 초점을 흐려버리는 전략이다.

가까운 예로 한창 논란이 진행 중인 최연희 의원 성추행 사건과 이해찬 총리 골프사건이 있다. 최 의원의 성추행으로 궁지에 몰린 한나라당은 이 총리 '골프 사건'을 강하게 비난하며 사퇴까지 압박하고 있다. 물론 이 총리의 부적절한 골프모임 참석은 비판의 대상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이를 기회로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다면 그 태도 역시 적절하다고 볼 수 없다.

물타기 시도 뒤 국회의원들이 주로 기대는 수단은 '동정심 유발'이다. 국의원들은 언론을 통해 폭행, 욕설 사건 등 추태사실이 터지면 곧바로 지역구로 내려가 해명을 늘어놓기 바빴다. 지역여론을 등에 업어서라도 의원직을 유지해 보겠다는 심산. 여기에 동료 의원들의 동정론까지 가세하면 금상첨화다. "취중에 실수할 수도 있는 일"이라던가 "너는 깨끗하냐"는 동료 의원들의 옹호론을 얻으면 도덕성 시비를 잠재우는데 큰 힘이 됐다.

최 의원의 성추행 사건도 이 단계에 와 있다. 그가 무려 17일째 입을 다물고 버티는 사이, 그의 지역구 동해·삼척에서는 특정 단체를 중심으로 "최연희를 살리자"는 구명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심지어 동해시의회 의장은 "술도 약한 사람이 폭탄주를 견디겠느냐"며 공개적으로 비호하고 나섰다.

동료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최연희 의원 성추행 사건 초기 손봉숙 민주당 의원은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남성 동료 의원들 사이에서도 최 의원을 옹호하는 분위기가 있다"며 탄식한 바 있다. 동정여론이 일면, 윤리특위가 국회의원을 처벌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이도저도 싫다면 국회의원들은 철저한 '무시전략'을 택한다. 17대 국회에서 윤리특위에 제소된 의원은 30여명에 이르지만, 스스로 반성한 의원은 없다. 국회의원들은 윤리특위가 열리든 말든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이 때문에 한 번 제소된 국회의원이 비윤리적 행위를 되풀이하는 경우도 있다. 주성영(3회) 한나라당 의원이 바로 그렇다.

무시하거나, 혹은 아프거나

이렇듯 국회의원들이 윤리특위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윤리특위 결정이 실제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행 국회법상 윤리특위 결정은 본회의에서 의결돼야 효력이 발휘된다. 그러나 17대 국회에서 윤리특위 결정이 본회의 안건으로 상정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다.

최 의원의 경우는 사태가 워낙 커진 바람에 '무시 전략'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 무시할 수도 없고, 의정활동도 제대로 못하게 된 탓인지 최 의원의 와병설까지 나돌았다. 박순자 한나라당 여성위원장은 8일 "최 의원이 본인 의사를 전달할 수도 없고, 사람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다"고 전했으나 이 역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제1야당 사무총장까지 지낸 3선 의원이 자칫 정치적 생명이 끊길 위기에서 가슴앓이 하는 심정은 이해할 만도 하다. 하지만 최 의원의 '와병설'을 들으며 휠체어를 타고 검찰에 출두하는 거물급 비리 정치인의 모습이 겹쳐진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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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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