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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일자리 창출사업 구인구직 만남의 날
ⓒ 이명숙
고용안정센터의 사회적 일자리 덕분에 인생이 달라졌다는 순임씨는 47세 여성가장이다.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던 처녀시절 꿈은, 한 남자를 택한 그 순간부터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결혼하고 3개월 후부터 외도를 일삼은 남편.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지겠지. 세월이 흐르면, 무디어지겠지. 순임씨의 기약 없는 기다림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남편의 바람은 그저 스쳐지나갈 바람이 아니라, 끈질기면서도 거센 폭풍이었다.

가정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던 세월이 6년. 내성적인 순임씨의 속은 시커먼 숯보다 더 까맣게 타들어갔다. 똘망똘망한 두 아이들 생각해서라도 어떻게든 견뎌내려고 했던 순임씨는 이혼을 안 해 준다며 폭행까지 일삼은 남편의 억지 앞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경제적인 능력이 없었던 순임씨는 아이들 양육권마저 넘겨주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혼자 몸 굶어죽기야 하겠냐. 설사 굶어 죽는다 하더라도 내 배 아파서 난 내 자식마저도 마음 놓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데 세끼 꼬박 꼬박 챙겨먹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었다. 밝은 해 아래 서면, 자꾸만 어지럼증이 일었고, 어두운 방 안에 누워 있으면, 격자무늬 천정이 마음 아래로 내려앉았다. 친정식구들이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기운 차리고 보라는 듯이 잘 살아야 되지 않겠냐'며 이런 저런 일들을 주선해 줘도 마음 속에서는 삭풍만 몰아쳤다.

3남 3녀의 막내딸이었던 순임씨가 정신을 차린 것은 친정어머니 때문이었다. 암 투병 중이면서도 막내딸에게 고통을 더해 주기 싫다며 절대로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던 친정어머니. 어머니가 저 세상으로 가시던 날, 통곡을 하는 순임씨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니가 무엇이 못나서 그렇게 사냐. 짠한 것. 더 이상 엎드려 살지 말아라. 그래야 이 에미가 눈을 편히 감는다'는 것이었다. 친정어머니는 혼자 사는 순임씨를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17평짜리 아파트를 물려주고 갔다.

친정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가구, 어머니의 숨결이 살아 있는 방안에서 순임씨는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얀 쌀밥을 양판 가득 담아 어머니가 아픔을 견뎌내며 만들어놓은 빨간 고추장을 놓고 비벼서 숟가락 가득 밥을 뜨는데, 눈물이 앞을 가렸다. 밥인지, 눈물인지, 범벅이 된 비빔밥을 오직 살아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다 비운 후, 순임씨는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친정식구들에게 손 안 벌리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고 싶었다.

그때 나이가 서른 살이었다. 무작정 길을 나섰다. 순임씨는 충장로1가부터 판매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면 무조건 들어갔다. 하루 종일 발에 물집이 생기도록 돌아다녀도 경험이 없는 순임씨를 채용하겠다는 데는 선뜻 나타나지 않았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찾아다니기를 이 주. 순임씨가 취업한 곳은 가방을 판매하는 가게였다.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하루 13시간 판매를 하고 나면, 발이 신발에 꼭 끼었다. 식비, 교통비를 제하고 남은 돈은 바로 은행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고달파도 악착같이 견뎌냈다.

몸이 고된 것은 마음이 허기진 것보다 견디기 쉬웠다. 그러기를 3년. 비록 보증금에 월세를 내야 하는 가게지만 자신의 속옷가게를 차릴 수 있었다. 엄마의 손을 잡고 가게에 온 아이들을 보면서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보고 싶은 자식 생각에 혼이 나간 듯 때때로 멍해지기도 했지만, 견뎌냈다. 견뎌내는 일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려면 돈이 필요했다.

순임씨의 나침반은 동서남북이 아니라 단 두 곳뿐이었다. 집, 가게. 가게, 집. 초등학생이 된 아들과 딸을 교문 밖에서 기다리다 자장면이라도 먹이고 돌아온 날이면, 아이들의 어두운 얼굴이 눈에 밟혀 밤새 가슴을 쥐어뜯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재혼을 한 전 남편이 잘 살아주었으면 했다. 키우겠다고 데리고 갔으면 적어도 아빠노릇은 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전 남편은 끝내 사고를 치고 말았다. 자신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던 전 남편이 직원들에게 줄 월급을 가지고 잠적을 해 버린 것이다.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고 있다는 아이들 소식을 접하고 순임씨는 얼마나 울었던지, 목이 쉬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이들을 데려올 수도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는 아픈 마음이 육체로 전이 되었다. 몸이 바로 종합병원이었다. 긁히고 쩍쩍 갈라진 마음이 아물지 않은 이상, 몸이 나을 리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아이들을 데리고 오려 했으나, 그 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른들 잘못에 병이 든 것은 자식들이었다.

자식들 때문에 속병이 들어버린 순임씨를 보면서 다 잊어버리고 한 살이라도 더 들기 전에, 새롭게 시작하라며 주위에서 부추겼지만 그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속절없는 시간을 그저 견뎌내는 것뿐이었다. 속옷가게는 화장품가게로 바뀌었고, 혼자서는 힘들어 종업원을 채용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었다. 아이들은 아빠를 떠나 제 발로 엄마를 찾아왔다. 아이들이 순임씨를 택한 것이다. 그때부터 순임씨에게 부양가족이 생겼다. 여성가장이 된 순임씨에게 하루는 25시간이었다. 아이들 뒷바라지, 가게 경영. 가게에서 나오는 수입이 넉넉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갈 만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 가지 않았다. 가게세마저 내지 못할 만큼 경기침체가 이어졌고, 갈수록 적자는 누적되었다. 계속 버티다가는 그동안 모아놓은 약간의 여유자금마저 날릴 판이었다. 더 이상 끌고 가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을 내리고, 권리금만 겨우 받고 가게를 넘겼다.

대학생이 된 아들, 고등학교 3학년인 딸은 여전히 부양해야 할 대상이었다. 당분간은 모아 놓은 돈으로 그런 대로 생활이 가능하겠지만, 그 기간이 길어서는 안 되었다. 이 궁리 저 궁리를 해 봐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마흔을 훌쩍 넘긴 주부에게 일자리가 있을리 만무했다.

순임씨는 2003년 가을에 인연이 된 구직자였다. 심층상담을 통해 이십년 가까이 어떤 세월을 살아 왔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하루 빨리 순임씨에게 맞는 일자리를 찾아주고 싶었다. 순임씨의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몸이 지탱할 만한 일자리를 찾아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직업상담원이라는 내가 그렇게 무능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일자리도 인연인데 힘들어도 끝까지 한번 찾아보게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잖아요."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다 가도록 일자리는 없었다. 모아 놓은 돈도 바닥을 드러냈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 수급자가 되고 싶어도 본인 명의의 집이 있다는 것 때문에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 사회적 일자리 창출사업 기관에 면접을 보고 있는 구직자들
ⓒ 이명숙
사회적 일자리 창출사업 구인 구직만남의 날

그러던 차에 사회적 일자리창출사업이 생겼다. 사회적 일자리창출 사업이란 비영리 단체가 중장년 여성이나 장기실업자를 고용해 독거노인, 장애인, 저소득층에게 저렴하게 간병, 가사, 산후조리, 방과 후 지도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게 하고 노동부가 1인당 70만원의 인건비와 사업자 부담분 사회보험료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제일 먼저 순임씨에게 연락을 했다. 출근을 하기 전에 고맙다는 인사차 고용안정센터를 찾아온 순임씨와 내 눈엔 이슬이 맺혔다. 형편을 고려해 교통비와 식비가 들지 않은 집에서 가까운 장애인복지관으로 추천이 된 덕분에 순임씨는 지출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비록 많은 액수는 아니었지만 그 돈은 가계를 꾸려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장애인들이 자립하기 전에 기술습득을 하는 것을 도와주는 일을 했던 순임씨는 그곳에서 근무를 하면서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형편과 나이를 생각하면,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순임씨는 큰 결심을 했다. 전문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입학을 한 것이다. 공부를 하면서 복지 분야 중에서도 노인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올해 사회복지학과 졸업반이기도 한 순임씨는 3년째 사회적일자리창출사업에 참가중이다. 작년부터는 복지관에서 노인주간보호사업인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돌봐주는 일을 하고 있다.

"사회적 일자리 덕분에 내 인생이 달라졌어요. 자식들 다 키워서 시집 장가 보내고 나면 노인시설에 들어가 노인들을 돌봐주는 일을 하면서 말년을 보내고 싶어요. 그동안에는 마음 속에 시커먼 구름만 끼어 있었는데, 장애인이나 몸이 불편하신 노인들과 함께 생활을 해 보니,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겠어요."

한 세상 사는 거, 크게 속상할 일도, 아파할 일도 아닌데, 그동안 왜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는 순임씨는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대목을 항상 머릿속에 새기며 산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그것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바로 지금 이 순간이래요."

순례자 같은 미소를 짓는 순임씨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덩달아 편안해졌다. 장애인들과 1년, 몸이 불편한 노인들을 돌보기를 2년 째, 그 사이 아들은 군대에 입대했고, 딸은 헤어디자이너 꿈을 키우고 있다. 사회적 일자리 덕분에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간다는 순임씨의 꿈은 오늘도 탱글탱글 영글어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국정브리핑에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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