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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 인터뷰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 인터뷰 ⓒ 오마이뉴스 남소연
2004년 6월 14일 오후 서울 중구 신라호텔 로비.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의 얼굴 표정은 상기돼 있었다. 기자들이 따라 붙었다. 관심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의 면담내용이었다. 강 위원장은 "이 회장과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했다"고 했다. 이어 "삼성에 대한 국민의 애증을 설명했다"는 말도 이었다.

잠시 후 이건희 회장이 모습을 나타냈다. 담담한 표정이었다. 불안한 경제에 대한 전망을 묻자 "서민과 영세민이 문제다", "(대)기업은 괜찮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한창 논란이 되던 재벌 금융계열사의 의결권 축소에 대해선 "그런 얘기한 적 없다"고 짤막하게 말했다.

20여분 남짓이었다. 그럼에도 강 위원장과 이 회장 사이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이례적인 공정위원장과 4대 재벌 총수사이의 단독면담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재계 한 관계자는 "그룹마다 약간 차이가 있겠지만, 사실상 4·15총선에서 압승한 정부·여당이 총수들에게 재벌개혁에 대한 최후통첩을 했던 자리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위헌 논란까지 빚었던 공정거래법은 결국 그해 겨울, 정부안대로 국회를 통과했다.

참여정부에서 '재벌개혁 전도사'로 불리는 강 위원장의 뚝심이 발휘던 순간이다. 2003년 3월 민간인으로는 처음 공정위원장에 오른 그가 오는 9일 퇴장한다. 법으로 정해놓은 3년 임기를 꽉 채웠다. '경제검찰' 총수로서 그의 3년은 재벌과의 끊임없는 줄다리기 연속이었다.

취임 한 달만에 재계 '입'과 맞부닥치다

2003년 4월 3일.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5단체는 성명을 발표한다. 경제가 침체돼 있기 때문에 정부의 출자총액제한제도 등은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날인 4일 신임 공정거래위원장과 4대재벌 구조조정본부장의 오찬 간담회를 앞둔 시점이었다.

강 위원장은 이들 구조조정본부장에게 "경제단체장들이 집단으로 대국민 성명 발표 방식으로 개별 정부정책에 대해 시시비비를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강한 톤으로 비판했다.

그의 이같은 지적을 두고 보수언론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7일자 신문 사설을 통해 "'토론공화국'을 자처하는 이 정부에서 '말도 못하느냐'는 소리가 벌써 나오고 있으니 모양이 우스워지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경련이 대주주인 <한국경제>는 사설에서 "전시대적이고 고압적인 발상", "수준이하", "어불성설" 등의 용어를 써가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신문은 "개혁을 하려면 현실감이 있어야 한다"면서 "기업의욕을 더 꺾어도 좋은 상황인지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준엄하게 꾸짖기도 했다. 보수언론의 '강 위원장 길들이기'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같은 달 18일. 강 위원장은 박용성 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전 두산그룹 회장)과 맞부닥친다. 박 전 회장은 재계의 마당발로 거침없는 '입심'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박 전 회장이 강 위원장을 아침 간담회에 초청한 것.

이날 자리에서 박 회장이 대놓고 "출자총액한도를 폐지할 생각이 없냐"고 직설적으로 묻자, 강 위원장은 "폐지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금융기관의 의결권 제한도 풀어달라는 박 회장의 청탁(?)도 "작년에 30%까지 허용하지 않았나?"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기도 했다.

강 위원장은 LG를 좋아한다?... 취임 100일 선물 안긴 SK그룹

강철규 공정위원장은 지난 2004년 5월 31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최태원 SK(주) 회장과 두번째 재계 총수화의 회동을 가졌다. 강 위원장과 최 회장이 어색한 표정으로 같은 방향을 응시하고 있다.
강철규 공정위원장은 지난 2004년 5월 31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최태원 SK(주) 회장과 두번째 재계 총수화의 회동을 가졌다. 강 위원장과 최 회장이 어색한 표정으로 같은 방향을 응시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성규
그해 6월 12일. 강 위원장은 전경련 회장단 간담회에 직접 참석한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라는 속담을 실천에 옮기기라도 하듯. 그는 이 자리에서 재벌체제의 대안을 내놓았다. 그것도 '과도기적'이라는 단서를 붙이면서.

하나는 지주회사 체제다. 또 하나는 독립기업으로 분사하거나, 소그룹으로 분리하라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브랜드와 이미지를 공유하는 느슨한 형태의 연계체제도 제시했다. 세 번째 방법은 새로운 안이었다. 바탕에는 현재의 '재벌체제는 안 된다'는 의식이 강하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6월 18일 SK그룹은 구조조정본부 해체를 전격 발표한다. 그룹 운영방향도 SK라는 브랜드와 이미지만 공유하고 계열사별 독립경영체제로 가겠다는 청사진을 밝혔다. 강 위원장의 세 번째 대안과 똑같은 체제다.

재계 일부에선 "SK 분식회계와 부당내부거래로 공정위 조사에 걸려있는 SK가 백기를 든 셈"이라며 "취임 100일만에 4대 재벌 가운데 한 곳으로부터 큰 선물을 챙겼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강 위원장은 이미 지주회사체제로 변신한 LG그룹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는다. 지난해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그는 4대 재벌 가운데 지배구조가 가장 투명한 곳으로 LG를 꼽았다. 또 구본무 회장에 대해선 "참 좋은 분"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재벌 오너의 지배권을 분산시키고, 소유구조를 단순화해서 투명하게 한다는 것이 그의 지주회사 애찬론이다.

삼성과의 끈질긴 악연... 지배구조 해법 놓고 곳곳서 충돌

4대 재벌 가운데 강 위원장의 지배구조 대안에 가장 비켜있는 곳이 삼성그룹이다. 이미 지주회사체제인 LG는 빼놓더라도 SK그룹은 브랜드를 공유하는 느슷한 형태 체제, 현대자동차그룹은 이미 자동차로 독립된 상태다.

유독 삼성그룹만이 이건희 회장 중심의 1인 총수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강 위원장이 매번 비판을 날을 세우고 있는 구조조정본부도 가장 강력하게 움직이고 있는 곳이다.

강 위원장이 지주회사 체제를 대안으로 이야기하면, 삼성 쪽은 "비용이 너무 든다"며 난색을 표했다. 또 "지배구조의 정답은 없다"는 말과 함께 사상최대의 기업 실적표를 함께 내놓았다.

강 위원장은 2003년 7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삼성이 지주회사로 가기 어려우면 삼성전자만이라도 독립기업화 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고, 구조본의 폐지에 대해서도 강한 신념을 내비쳤다.

2004년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두고 삼성은 "위헌" 운운하며 강하게 반대했다. 금융계열사의 의결권 축소 등의 내용을 담은 법은 사실상 삼성 지배구조 개선을 염두에 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해 6월 이 회장사이의 단독 면담한 강 위원장은 "(이 회장이) 금융계열사 의결권 축소를 수용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삼성 쪽은 이를 부인했다.

헌법소원으로 방어나선 삼성, 'X파일' 사건으로 무너져

이건희 삼성 회장이 지난 2004년 6월 14일 오후 신라호텔에서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을 만난 뒤 호텔을 나서다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지난 2004년 6월 14일 오후 신라호텔에서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을 만난 뒤 호텔을 나서다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2004년 4월 총선에서 압승한 정부와 여당은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금융계열사 의결권 축소와 함께 계좌추적권도 도입됐다. 공정위와 지배구조를 놓고 사사건건 대립해 온 삼성으로선 비상이 걸렸다.

삼성의 반격은 다음해인 5월 법 시행에 앞서 헌법소원을 내면서 시작됐다. 정부와 여당 일부에선 '심각한 도전'이라는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강 위원장은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삼성이) 헌법소원을 낼지 몰랐다"고 소개하고 "매우 유감"이라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여론은 삼성 편이 아니었다. 삼성공화국 논란에 이어 최고위층의 불법대선자금 연루를 담은 'X파일' 사건이 터져 나왔다. 국정감사와 검찰 수사가 이어졌다. 삼성 에버랜드의 주식의 헐값매각 재판도 유죄로 나왔다. 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삼성 승계구도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었다.

100년의 형제 우애를 지켜왔다는 두산그룹은 '형제의 난'으로 국민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두산 박씨일가의 수백억원에 달하는 회삿돈 유용과, 수천억원의 분식회계 등 재벌 오너 경영의 치부가 속속들이 드러났다.

강 위원장은 "대기업 정책은 재벌주도 성장과정에서 나타난 폐해를 시정하기 위한 것"이라며 재벌개혁에 대한 의지를 재차 강조하기도 했다.

지난 2월 이건희 회장 귀국과 함께 삼성은 자세를 바꿨다. 불법대선자금과 지배구조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발표했다. 8000억원 사회공헌기금도 내놨다. 정부를 상대로 한 헌법소원도 취하했다. 삼성일부에선 '백기투항'이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일부 보수언론에선 '강철규의 3년 공정위'를 기업을 규제로 옥죈 시간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고별 기자회견문에서 "재벌이 자유경쟁을 저해한다면 재벌정책은 필요하다"는 말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강 위원장의 후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차기 위원장을 두고 벌써 말이 무성하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말 그대로 공정하고 올바른 시장을 위해 존재한다. 부당한 내부거래나 불법적인 담합, 총수일가의 인사와 경영전횡이 계속되는 한 '제2의 강철규'는 필요하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은 재벌과 부패문제와 관련, 이론뿐 아니라 현실운동에도 적극 개입해 왔다. 특히 재벌개혁과 금융실명제, 부동산실명제 등을 오랫동안 강력히 외쳐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한 다음,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이후 정책연구위원장과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이론과 실천의 접목을 꾀했다.

국민의 정부 때인 99년 반부패특별위원회 회원과 2000년 규제개혁위원장을 지내면서 정부에 합류했다. 2002년엔 부패방지위원장을 역임했고 개혁의 실천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참여정부 들어 공정거래위원장 3년을 지내면서 '재벌개혁의 전도사'라는 명칭을 얻기도 했다.

재벌에 대한 그의 인식은 91년 경북대 장지상 교수와 건국대 최정표 교수와 함께 쓴 <재벌, 성장의 주역인가, 탐욕의 화신인가>와 99년 펴낸 <재벌개혁의 경제학 : 선단경영에서 독립경영으로>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특히 2003년 공정거래위원장 시절에 <투명경영, 공정경영 : 망할 기업은 망해야 흥할 기업이 흥한다>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한때 책 제목을 두고 출간을 미루는 등 말이 무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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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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