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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그는 왕신복을 조용히 불러놓고 일렀다.

"이제 발해는 기틀을 잡아 하나의 대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무관으로서 만주 벌판을 달려 적을 무찌르고 영토를 확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내치를 다지며 발해 문화를 꽃피는 일이 더 시급하다. 넌 문관으로 관계에 나가야만 한다."

"저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받아 이 발해의 기틀을 잡고 싶습니다."

"아니다. 내 시대는 이미 기울었다. 이제 다가올 시대는 칼이 아니라 붓으로 이 발해를 중흥시켜야 한다."

"하지만 당나라는 호시탐탐 우리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 발해는 침입하지 않겠다는 당나라의 약속을 받아냈다. 이를 위해 사신을 교환하며, 해마다 조공사라는 이름의 사절을 보내기로 했지. 앞으로는 전쟁보다는 외교가 중요해질 게야."

이미 세력을 뻗치며 강성해진 발해를 당나라도 경계하기 시작했다. 당나라는 발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국호를 부르기도 했다.

"문제는 신라다. 우리 발해가 당에 가까워질수록 신라는 바짝 경계를 할 게야. 이미 작년에 발해와 접경 지역인 개성에 새로 성을 쌓았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다. 신라는 유별난 경쟁의식을 갖고 우리를 노릴 게 뻔할 것이야.

대조영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무왕은 충실하게 부왕의 위업과 의지를 이어받았다. 무왕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계속 주변 종족을 병합하면서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의 옛 땅마저 회복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에 신라는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당에 사신을 보낼 때에도 예전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고 있었을 때처럼 육지로 나가지 못하고 뱃길을 택해야 할 정도였다. 신라는 성덕왕 20년에 명주 지방의 장정 2천 명을 징발하여 발해의 경계에 긴 성을 쌓는 등 군사 위협에 대비했다. 왕신복은 무관이 되어 대조영에 이어 무왕의 뜻을 받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오랫동안 무예를 연마해왔다.

"지금이 바로 고구려의 영토를 되찾으며 위세를 펼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왕영명은 의미 깊은 눈짓으로 물끄러미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의 어조는 지극히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의 내 나라는 발해이지만 신라 또한 칼끝을 겨눌 수 없는 곳이다. 그쪽에 너의 어머니가 살고 있어. 나도 그곳에서 오랫동안 녹봉을 받아왔었다. 되도록 신라와의 분쟁에는 참여하고 싶지 않구나. 너를 그곳에 보낼 수 없단 말이다."

왕신복은 그런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 왕영명의 강력한 권유로 당시 발해에서는 매우 드물게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 외국 유학생을 위한 빈공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관리가 되기도 했다. 절도사(節度使)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이 된 그는 중국의 여러 관제와 행정제도를 배워 발해로 귀국했다. 처음에 왕신복은 6부중 의부의 외교 사무를 담당하는 미관말직을 맡았다.

여태 아버지의 말을 묵묵히 지켜온 왕신복의 불만은 컸다. 무관으로 나갔으면 지금쯤 장군의 호칭을 받고 있을 그였지만 문관의 길을 걸어 미관말직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왕영명은 언젠가 좋은 때가 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군자는 모름지기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언젠가 이 나라가 너의 실력을 알아줄 때가 올 것이다."

그런 왕영명의 예상은 적중했다. 무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문왕은 영토의 확장 대신 내치를 안정시키고 대외관계를 강화시켜 선진문화의 수입에 역점을 두었다. 이러한 선진 문화의 수입은 고구려 멸망 후 사라진 고구려 선진 문물의 복원과 더불어 당의 문화를 접목시켜 대등한 수준으로 발해의 문화적 수준을 격상시키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문왕은 대외관계에 밝고, 국제정세를 꿰뚫 수 있는 인재가 필요했다.

그런 그가 주목한 사람이 바로 왕신복이었다. 그는 당나라의 빈공과에 장원으로 합격한 수재인데다 오랫동안 당나라의 관리로 머물면서 그쪽 사정에 무척 밝았다. 문왕은 모든 관직 체계를 당나라와 유사한 형태로 바꾸고 유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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