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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는 백재현(37)씨. 고통의 시간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로 지금의 작은 행복이 더 소중하다고 말한다. 공연 끝나고 웃음지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나까지 덩달아 행복해졌다.
지난 3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는 백재현(37)씨. 고통의 시간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로 지금의 작은 행복이 더 소중하다고 말한다. 공연 끝나고 웃음지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나까지 덩달아 행복해졌다. ⓒ 이동환
<루나틱>은 정신병원의 집단치료과정을 그린 뮤지컬이다. 나 역시 치료를 받기 위해 지난 토요일(25일), 대학로의 '씨어터일'을 찾았다. 제작과 연출은 물론, 출연까지 하고 있는 백재현씨는 지난 2003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서울 중곡동에 있는 '국립중앙정신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단다.

백재현 : "이 뮤지컬을 보고 관객들께서 행복해지는 방법이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가셨으면 합니다. 어떻게 보면 미쳐 돌아가는 세상, 살짝 미칠 수 있다면 차라리 행복하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사느라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놓친 건 아닐까요? 네잎클로버(행운)를 찾아 헤매느라 지천에 널린 세잎클로버(행복)를 마구 밟지 않았을까요?"

뮤지컬 <루나틱>은 정신병동 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끊임없이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은 정말 정상인이냐고.
뮤지컬 <루나틱>은 정신병동 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끊임없이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은 정말 정상인이냐고. ⓒ (주) 루나틱컴퍼니
<루나틱>을 제작하면서 그는 세속적인 많은 것을 잃었다. 투자자를 구하고 싶었지만 그 누구도 창작뮤지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잘 나가던 시절 벌었던 돈 전부, 차압까지 들어오는 상황에서 그는 결국 집을 내놓아야 했고, 지금은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40만 원짜리 열 평 남짓 되는 공간에서 젊은 연기자들과 함께 살고 있다. 설상가상, 그는 가장 힘든 시기에 이혼까지 하고 말았다.

나는 궁금했다. 잘 나가던 방송생활 접고 왜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고집했는지, 혼자 힘으로 가산까지 탕진하며 창작뮤지컬을 제작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과연 정상인지, 외람되지만 직설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학원사업이다 뭐다, 여러 번 실패 끝에 한 때는 죽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던 나로서는 미래가 보장된 평안한 길을 외면한 그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백재현 : "그래요. 저 정상 아니에요. 살짝 미쳤어요(웃음). 물론 절망도 있었습니다. 어떤 순간,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요. 하지만 세상에 죽고 싶다는 생각 한두 번 안 하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대학 때부터 뮤지컬 제작과 연출이 꿈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웃음 속에 생각이 있는 작품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너무 하고 싶은 일이었지요. TV는 제 꿈을 펼치기에 한계가 있어요."

그는 지금 행복에 겹단다. 아직도 빚 갚느라 힘들지만 믿고 따라주는 동료연기자들이 있고 꾸준하게 찾아주는 관객들이 있어 너무 행복하단다. 공연이 끝나고 돌아가는 관객들 표정에 함박웃음이 가득한 것을 볼 때마다 고마움이 북받쳐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단다. 진지하게 대답하며 그의 눈가에 작은 이슬이 언뜻 비쳤다. 그것은, 혹독한 가뭄을 이겨낸 대지가 단비를 만나 비로소 포효하듯, 겸허해진 한 사내가 내비치는 웅지와 감사의 눈물이었다.

우리 모두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살지만…

'어리석기 짝이 없는', '미치광이 같은'이란 뜻의 <루나틱>은 모두 네 개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더블캐스팅으로 굿닥터 역을 맡은 소찬휘, 강지연씨.
더블캐스팅으로 굿닥터 역을 맡은 소찬휘, 강지연씨. ⓒ (주) 루나틱컴퍼니
프롤로그 : 갑자기 무대가 어수선해진다. 눈빛부터 예사롭지 않은 정신병동 환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객석을 누비고 다닌다. 관객들에게 집적대는 환자들을 말리느라 간호사들은 정신이 없다. 실제 상황이라면 사람들 모두 진저리를 칠 터. 친절한 '굿닥터'조차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나제비 역의 김도형, 정재민씨.
나제비 역의 김도형, 정재민씨. ⓒ (주) 루나틱컴퍼니
첫째 마당 '사랑' : 타고난 카사노바 '나제비'는 매사 자신만만하다. 세상 모든 여자를 눈빛 하나로 굴복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그가 현란한 춤과 노래로 '여자낚기' 강의(?)를 할 때마다 객석에서 한숨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의 카리스마는 남자마저도 낚일 정도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진실한 사랑. 그러나 결말이 너무 처참하다. 그 때문에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굿닥터' 앞에 다소곳한 환자로 전락하는 나제비.

고독해 여사 역의 김숙, 정영주씨.
고독해 여사 역의 김숙, 정영주씨. ⓒ (주) 루나틱컴퍼니
둘째 마당 '머니' : 평생 남편 뒷바라지에 헌신해 온 '고독해' 여사. 돈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보이며 아무 상관없는 은행에 무작정 쳐들어가 죽은 남편의 퇴직금을 내놓으라며 막무가내다. 쉴 새 없이 터지는 웃음 속에 문득, 물신자본주의에 시들어가는 우리 영혼의 이면을 보게 된다.

무대포 역의 백재현, 인성호씨.
무대포 역의 백재현, 인성호씨. ⓒ (주) 루나틱컴퍼니
셋째 마당 '섹스' : 종횡무진, 정신병동을 누비고 다니는 '무대포'씨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던 아버지 무대포는 자신의 성적인 개방성향(?)을 늘 자랑한다. 아들의 열여덟 번째 생일 선물로 그는 창녀를 제공한다. 순진하기만 한 아들은 아버지의 어이없는 선물을 거부하려고 발버둥친다. 그러나….

넷째 마당 '당신은 정상인?' : 공연 내내 굿닥터의 관심을 끌던 맨 앞자리 객석의 한 남자. 그는 편안하게 다른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공연을 구경했을 뿐이다. 억지로 끌려나온 그의 입에서 관객들은 상상조차 못할 이야기를 듣게 된다. 소름끼칠 정도의 사연이다. 그는 굿닥터 앞에서 자신이 정상이라고 울부짖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러나 과연 그는, 나는, 우리는 정말, 정신병동에서 나름대로 행복한 나머지 삶을 살고 있는 환자들과 달리 정상인일까?

에필로그 : 휘몰아치던 웃음의 향연이 끝나고 굿닥터는 "이제 오늘의 모든 치료가 끝났어요. 돌아가세요"라고 선언한다. 불이 꺼진다. 그러나 관객들은 돌아갈 태세가 아니다. 한 사람도 자리를 뜨지 못한다. 다시 불이 켜지며 등장한 모든 출연진들. 관객과 함께 어우러지는 한 판 노래와 춤마당이 펼쳐진다. 살짝 미치면 행복하지 않겠냐는 환자들의 노래를 어느새 객석에서도 따라 부르고 있다. 전통 굿판의 뒤풀이 마당을 보는 듯하다.

광란(?)의 집단치료가 끝나고

공연 끝나고 일일이 관객들에게 사인해주는 출연진들.
공연 끝나고 일일이 관객들에게 사인해주는 출연진들. ⓒ 이동환
백재현 : "재미있게 치료 잘 받으셨어요(웃음)? 제가 행복하다고 하니까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신가 봐요. 저는 진짜 행복하거든요. 외롭지 않기 때문이지요. 21세기 인류사회 최대화두가 '고독' 아니겠냐고 하셨지요? 동의합니다. 진실을 보인다면 누구나 주변이 외롭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우리가 너무 진실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온 게 아닐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첫 공연 이후 여기저기 극장을 옮겨 다니느라 고생도 했지만 지난여름 공연 때는 <뱃보이> <아이다> <그리스> 같은 쟁쟁한 수입뮤지컬을 누르고 평균 객석점유율 90%로 인터파크 공연예매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 열화와 같은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루나틱컴퍼니'라는 주식회사도 설립할 수 있었다.

백재현 : "입소문이 나니까 떼돈 버는 줄 알고 이제 와서 투자하겠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 남은 빚 당장 갚아치우고 싶은 욕심에 혹시 눈멀어 그런 투자 받아봤댔자 공연이익금의 상당부분을 떼 가는 방식이라면 소용없지요. 어려워도 이대로 이겨내면서 이익이 생기면 연기자들과 스태프들, 그리고 고마운 관객들에게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지요. 저 한 사람 보며 여기까지 와준 소중한 분들인데요(웃음)."

공연 뒤 두 시간여 동안 대화하면서 내가 백재현씨에게 느낀 점은 딱 한 가지다. 마치 '어린 왕자'처럼 맑은 영과 꿈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서너 번은 약과고 열 번 이상 이 공연을 관람하는 마니아들이 왜 생겨나는지 그 이유를 알 듯싶었다. 장기공연을 선언한 만큼 부디 우리나라 창작뮤지컬의 역사를 다시 쓰기만 바랄 뿐이다. 그와의 만남이 나로서는 또 하나의 '배움'이었다.

덧붙이는 글 | 공연문의 ☞ (주) 루나틱컴퍼니 ☎ 02) 3674-1010
바로가기 클릭 ☞ www.lunaticsho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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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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