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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함께 동고동락한 지기의 마음을 왜 모르랴! 오랜 세월 동안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말을 하는 것이리라. 저승 가서 담명장군과 만나 해야 할 이야기를 그 자식에게 퍼부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허나 그래도 이승에서 퍼부었으니 속은 후련할지 모른다.

"후송. 지기로서 하는 마지막 부탁일세. 들어주겠나?"

"꼭 이래야만 하겠나?"

"오랜만에 노납의 몸에 과거의 어느 때와 같이 맹렬하게 피가 돌고 있다네. 이미 감정마저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까지 노납의 몸속에 이렇게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는지 몰랐다네. 노납은 다시 젊어진 느낌이네."

"자네는 정말 나쁜 친구로군."

"노납은 언제나 자네에게 나쁜 친구였네. 그런 나쁜 친구를 자네는 끝까지 이해하고 용서해 주었지. 자네에게 감사하고 있네."

"몹쓸 친구…."

광와노인은 주위를 한 번 쭉 둘러보더니 말했다.

"자… 이제 비켜 주겠나?"

그 말은 후송에게 했지만 담천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한 말이었다. 후송이 한참이나 광와노인을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에 따라 에워싸고 있던 금색면구인들도 방원을 넓혀 물러섰다.

"괜찮겠나?"

그러자 백결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담천의에게 물었다. 담천의의 상태가 어떤지 아는 까닭이다. 담천의는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했지만 자신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것이 더 마음 아팠다.

"죽기 밖에 더 하겠소? 더구나 이것은 지금까지 내가 찾았던 순간이오."

그 말에 백결은 뭐라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담천의에게 만검을 건네고는 뒤로 물러섰다. 자신은 이제 담천의에게 거추장스런 짐만 될 뿐이다. 그가 물러서자 광와노인이 한 걸음 담천의에게 다가들며 말했다.

"노납은 소림의 일흔두 가지 무공 중 열세가지를 알고 있다네. 허나 지금까지 노납이 사용한 것은 단지 네 가지뿐이네. 지금 역시 노납은 네 가지 무공을 사용할 것이네."

불가에 몸을 담고 있었을 것이라 이미 짐작은 했지만 광와노인은 소림출신인 모양이었다. 칠십이종의 절예 중 열세 가지를 익히고 있다면 현 소림 내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

"탄자권(彈子拳)이라고 들어보았나?"

탄자권은 무리(武理)를 깨닫고 반야신공(般若神功)의 성취가 구성(九成) 이상이 되어야만 익힐 수 있는 무공. 스치듯 맞아도 처음의 충격이 두 번째 골절을 부스러뜨리고, 그 충격은 또 다시 이어진 세 번째 뼈를 바스라 뜨린다는 권공(拳功).

수개월 전 오룡번의 출현으로 혈풍이 불었던 장안루에서 탄자권에 당한 시체가 발견된 적이 있었다. 바로 적령추살(狄靈錘殺) 도삼득(淘三鍀)이었고, 두부가 으깨진 것과 모양처럼 으깨진 금과추와 함께 전신의 뼈가 모두 바스라져 흐물거리는 시신으로 변해 있었던 그 사건. 혜청이 사인을 짚어내지 않았던가?

그 순간 담천의는 광와노인이 누군지 생각해 냈다.

"노인장은 한때 광정(光正)이란 법명을 쓰던 분이셨구려."

"호오……?"

뜻밖이라는 듯 광와노인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이미 잊어버린, 아니 잊고 싶었던 과거의 법명을 들으니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그렇군… 현재 균대위를 이끌고 있으니 전대 균대위였던 인물들까지 알고 있겠지."

그것은 자신이 광정임을 시인하는 말이었다. 파문의 형식을 빌어 소림을 떠나 균대위에 몸을 담아야 했던 소림의 광법(光法)과 광정(光正) 중 광정이었다. 젊어서부터 권에 대한 집착이 남달랐던 인물.

적령추살 도삼득을 탄자권으로 죽이고, 철혈보와의 쫓고 쫓김에서 결국 광지선사에게 무공을 폐쇄당하고 소림으로 끌려가야 했던 소일(少一)이란 인물의 사부 역시 바로 이 노인이었다. 담천의는 시선을 돌려 후송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장 역시 무당에서 청풍(淸風)이란 도호(道號)를 쓰셨던 분이겠구려."

"자네가 짐작한바 대로네."

무당 역시 청운(淸雲)과 청풍(淸風)이 균대위에 몸을 담았던 터. 균대위에 몸 담은 지 얼마 안 되어 청운도장은 죽고, 청풍만이 남아 있었던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두 노인이 과거의 광정과 청풍이란 법명과 도호를 버리고 스스로 자조하듯 광와와 후송이라고 부르는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광와란 아마 나라에 큰 일이 있거나 소림에 불행한 일이 있을 때 소림의 산문 밖에서 무수한 개구리 떼가 나타나 미친 듯 울어댔다는 소문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산문 안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울어대야 하는 심정으로 스스로 '미친 개구리'라 한 것이다.

후송이란 명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송(松)은 청정무구를 의미해 무림에서는 도가(道家)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는 터. 도가 중 최고의 문파는 역시 무당이다. 그 앞에 후(朽)를 붙였으니 이미 세속에 찌들어 다시 무당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빗대어 부르는 것이리라.

"이제 다 알고 나니 속이 후련한가?"

광와노인의 말에 담천의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직 두 가지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소."

"무엇인가?"

"하나는 담가장의 혈사에 관여했던 나머지 자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과 또 하나는 천동의 주인이 정말 모용화천이냐는 것이오."

담천의의 노골적인 물음에 광와와 후송의 낯빛이 변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광와는 고개를 끄떡였다.

"두 가지 질문 모두 사실 명확하게 답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군. 허나 한 가지 만은 분명히 말해 두겠네. 당시 자네의 부친은 천동의 존재와 모용화천이란 인물에 대해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네."

교묘하게 즉답을 피하고 있었지만 굳이 숨기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 대답으로 사실 충분했다. 천동은, 그리고 모용화천은 균대위가 모용화천을 죽이려 쫓는 것만큼이나 담명장군을 죽이고 싶어 했을 테니까….

"이제 자네는 그런 것을 캐묻는 것보다 담가장의 혈사에 관여한 노납에게 복수하는 일이 더 급하지 않은가?"

"맞는 말씀이오."

"준비하게. 자네가 들고 있는 만검은 과거 거대한 산으로 보였던 한 분을 떠오르게 하지만 그렇다고 봐줄 마음은 없네."

담천의는 천천히 만검을 뽑아 들었다. 이미 두 발을 땅에 대고 무릎을 약간 구부린 광와노인의 몸에서는 보통 사람이면 항거할 수 없는 무형의 기운이 주위를 짓누르고 있었다. 과거 광노제란 광법선사에게서 느꼈던 중압감, 그리고 광무선사에게서 느꼈던 무형의 압박감이 떠올랐다. 이미 극복했다고는 했지만 광법선사나 광무선사의 경우에는 생사를 걸고 마주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과는 확실히 달랐다.

"탄자권은 초식이 아니네. 권을 발출하는 진기의 운용이지. 이제부터 노납이 탄자권을 운용한 진정한 소림오권(少林五拳)이 무언지 가르쳐 주겠네."

사람들은 간혹 오해를 하지만 탄자권은 일정한 형과 격을 가진 권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에 진력을 실어 운용하는 공부였다. 그래서 반야신공(般若神功)의 성취가 구성(九成) 이상이 되어야만 익히고 펼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더구나 소림오권은 소림권의 처음이자 그 끝이 되는 권법. 용(龍)호(虎)표(豹)사(蛇)학(鶴)의 다섯 가지 동물의 움직임을 본 따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소림에 입문한 제자는 반드시 입문해야 할 무공이지만 그 위력을 무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기에 탄자권의 운용해 펼친다니….

오른발을 부드럽게 떼어 호보(虎步)를 내딛는 광와노인의 뒤로 거대한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영상이 그려지고 있었다.

(제 88 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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