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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집마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온동마을
ⓒ 이상율
국경일이 아니어도 온 종일 태극기가 휘날리는 섬마을이 있다.

여수시 묘도동 온동(溫洞) 마을.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가 생동감을 넘치게 한다. 묘도(猫島)는 면적이 9.59㎢에 495세대 1500여명이 살고 있는 조그마한 섬이다. 북서쪽으로 광양항의 컨테이너 부두가 북동쪽으로는 광양제철이 있고 남쪽으로는 여수시 GS 칼텍스 정유와 삼일항이 있어 그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

묘도는 선조 31년(1598) 정유재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대첩의 격전지이다. 조명 연합군이 순천 왜성(倭城)에 있던 일본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 격전을 치른 곳이다. 순천왜성은 호남을 침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3개월간 쌓은 토석성으로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끈 1만4천여명의 왜병이 주둔해 조·명연합군과 두 차례에 걸쳐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당시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전투에서 적탄에 가슴을 맞고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면서 최후를 마친 관음포 앞바다가 지척에 있고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隣)이 머물렀다고 해서 지명을 얻은 도독(都督) 마을이 이웃에 있다.

도독마을에서 온동 마을은 겨우 1㎞ 남짓, 충무공의 전몰지인 관음포는 눈앞에 있어 이 마을의 태극기는 역사적인 의미를 더 한다.

86호 2백70여명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온동 마을이 태극기 마을이 된 것은 당시 이장 정종권씨(60) 때문이다.

▲ 석양에도 선명한 온동마을 복지회관 태극기
ⓒ 이상율
2001년 7월 마을이장 정씨는 마을 회의를 열어 마을 전체가 태극기 달기를 결의했다. 평소 국경일이 되어도 태극기를 제대로 걸지 않은 집들이 많은 모습이 안타까웠고 특히 이곳은 외국의 화물선이 자주 출입하는 곳으로 마을 단합과 애국심을 고취하고 나라의 상징인 태극기를 외국인에게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이를 추진한 것이다.

마을 기금을 들여 마을회관과 복지회관을 비롯하여 86호의 가정집에 약 6m 높이의 철제 국기 게양대를 만들었고 태극기를 일괄 구입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이 마을의 태극기는 내리는 법이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온종일 펄럭이고 있다.

한편 여수시는 2002년 이 마을을 태극기 시범마을로 선정하고 국기가 훼손되면 즉시 무료로 태극기를 제공하고 있다. 이 마을이 태극기 마을로 지정되면서 분위기는 일신했다. 마을 주민들의 자긍심도 높아졌고 협동심과 자율성이 높은 마을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마을주민 김선숙(42)씨는 “아침이면 신선하고 역동적이어서 항상 새로움을 느끼고 질서도 잘 지키게 된다”고 말했다

이 마을에 또 한 가지 이색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양성평등 문패다. 태극기 달기를 하면서 마을 기금으로 집집마다 부부의 이름이 새겨진 옥돌 문패를 만들어 달도록 했다. 아버지가 없는 집의 문패는 아들과 어머니의 이름이 함께 새겨져있어 남녀평등을 상징한다. 온동 마을의 태극기는 오늘도 힘차게 휘날리고 있다.

▲ 협동작업에는 남녀 구분이 없다. 바지락 캐기 협동작업
ⓒ 이상율

덧붙이는 글 | 새여수신문에도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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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닥다리 기자임. 80년 해직후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밥벌이 하는 평범한 사람. 쓸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것에 대하여 뛸뜻이 기뻐하는 그런 사람. 하지만 항상 새로워질려고 노력하는 편임. 21세기는 세대를 초월하여야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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