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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그림
책 겉그림 ⓒ 샘터
사람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배우게 된다. 만나는 사람을 통해서 배우고 환경을 통해서도 배운다. 어린 아이에게서도 배우고 생이 얼마 남지 않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통해서도 배운다. 그리고 곧 죽은 사람, 화장터 위에 누워 있는 시신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

그때에 '배운다'는 것은 글이나 문자로 익히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길 위에서, 삶의 지평 위에서 몸으로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지혜는 결코 글이나 문자 위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부대끼는 삶을 통해 얻는 것이다.

여기 그 배움을 위해 길을 떠난 여인이 있다. 그저 되풀이되는 일상 속에서도 얻고 배우는 게 있겠지만 그 일상을 박차고 나선 여인이다. 바로 인도와 티베트라는 불교의 성지들을 찾아 떠난 여인이요, 그녀의 이름은 정희재이다.

"우리가 순례를 떠나는 것은 순례 길에 오른 그 순간만이라도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라고. 고통스러운 삶의 경험에서 뭔가를 배우고 깨우쳤더라도 사람은 배우고, 또 배우고, 행하고, 또 행해야 한다고. 살아가는 동안 완성은 끝이 없고, 배우고 익혀서 심장에 간직한 자비와 사랑일지라도 우리를 시험하는 순간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 '무엇이 세상을 이기는가'에서


그녀가 쓴 <나는 그곳에서 사랑을 배웠다>(샘터·2006)에 나오는 첫머리이다. 그녀가 순례의 길에 나선 것은 부단히 배우고 행하기 위함이라고 밝힌다. 끝이 없는 삶의 여정을 걷다보면,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자신 속에 들어차 있는 더러운 찌끼들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형편을 보며, 그들에게 필요한 사랑이 과연 무엇인지 그 길 위에서 진지하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는 인도와 티베트를 걷는 여정 속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특별히 인도에서는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은 말할 것 없고,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티베트 불교의 성자 달라이 라마도 직접 만났으며, 인도 곳곳의 화장터 위에서 타 들어가는 시체들도 숱하게 보았다.

달라이 라마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존재이다. 베이징 지도자들은 그를 가리켜 '모국을 분열시키고 인민을 버리고 떠난 위선자'라고 공격하지만, 정작 그를 따르는 티베트 사람들은 그를 못 보는 일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일'이라고 할 정도다. 그토록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 망명해 있는 티베트 사람들에게는 신적인 존재이다. 그런 성자를 만났으니, 얼마나 기쁘고 행운이겠는가.

더욱이 갠지즈강을 비롯해 도처에 자리잡고 있는 화장터를 보며 무엇을 느꼈을까? 그 위에서 타들어가는 시체의 냄새를 맡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람의 몸은 허망하기 짝이 없이 타서 사라지지만, 그가 남긴 삶의 족적들은 분명 가치 있는 향내가 된다는 것이다.

시체마다 타는 속도도 다 다르다. 하지만 그 시체가 다른 시체에 비해 일찍 타든 혹은 늦게 타든, 돼지고기 굽는 냄새와 닮았든 아니면 오히려 더 비릿하든, 그 속에 들어있는 영혼의 순수함과 고결함만은 그의 죽음을 값지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녀가 인도 곳곳을 돌며 본 사람들 가운데에는 굶주림에 처한 아이들과 부모들이 너무나 많이 있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들 가운데에는 티베트에서 망명해 온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이었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늙은 사람들까지, 다리가 성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중국의 감시병들을 피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그 땅에까지 들어왔던 것이다.

하여 그녀는 그 티베트를 직접 가 보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곧장 길을 떠난다. 그녀가 세운 여정은 인천에서 '톈진'까지 배로 들어가 톈진에서 '베이징'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런 뒤 베이징에서 동서로 횡단하는 중국 내륙의 열차를 타고 '시닝'으로 가고, 거기서 '꺼얼무'로 들어가 곧장 신의 땅인 '라싸'로 들어가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세운 여정이 우리나라의 선조들이 거닐었던 옛 길이라는 것. 천년 전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가 다녀갔던 길이 그 길이요, 고구려의 유민인 고선지가 당나라의 장수로 티베트 정벌에 나섰던 길이다. 또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에 불모로 잡혀갔다가 유배당해 삶을 마쳤던 길이 바로 그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열 여덟 시간에 걸친 길고도 긴 여정이었지만, 선조들의 발자국을 따라가면서 느꼈던 뿌듯한 행복감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런 행복과 뿌듯함도 잠시인 것 같다. 정작 거대한 중국이라는 땅 속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티베트 땅을 밟아 들어가는 길은 정말로 사지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곳곳의 길목마다 지키고 있는 중국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는 그야말로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경계 길목을 피하여 돌아가더라도 꾸역꾸역 그곳을 밟아 들어갔고, 그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의 거룩한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티베트는 중국에 의해서 1950년부터 무력으로 침공을 당했다. 백만 명이나 달하는 민간인들을 학살을 당했고, 6천여 개에 달하는 사원들이 파괴됐다. 그 전까지만 해도 불교가 강력하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고, 그 탓에 1300년 동안은 환경도 잘 보전돼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장악한 이래 불교는 그 힘을 잃게 됐고, 티베트 곳곳도 관광지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포탈라 궁전을 비롯한 곳곳의 사원마저도 이제는 원치 않게 상업화로 물들고 있다.

그만큼 중국은 티베트를 옥죄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관광특구를 노리고 있고 또다른 편으로는 티베트인들을 감시하고 처벌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경찰들도 곳곳의 사원들을 지키는데 전기봉까지 갖추고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것도 중국계 경찰이 아닌 티베트 말에 익숙한 티베트 사람이 그 짓을 하고 있다니 경악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순사보다도 더 악랄하게 동포를 괴롭혔던 친일파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듯하다.

그러한 악순환의 고리가 점철되고 있는 그 땅을 걸으며 그녀는 무엇을 위해 합장했는가? 푸른 불꽃의 야광과 폭력의 전기봉들이 사라지고 태고(太古)적 순수와 원시적 신비로운 바람이 하루속히 불어 올 것을 빌고 또 빌었다. 인간의 욕망으로 상업화에 물든 곳곳의 사원들이 다시금 성스러운 혼과 정신을 곧추 세울 수 있도록 바라고 또 바랐다. 그 속에 끼어 있는 사람들이 중국과 티베트라는 두 줄을 타는 것보다는 오로지 한 줄만 타도록 염원하고 또 염원했다.

그토록 길 위에서 빌고 또 빈 그녀의 간절한 합장이야말로, 사람을 사랑하는 참된 배움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사랑을 배웠다 - 희망과 치유의 티베트.인도 순례기

정희재 지음, 샘터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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