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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림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절대 암흑의 공간. 시간이 멈췄다가 석순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의 굉음에 화들짝 놀라 제 갈 길을 가는 곳. 바로 동굴이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영구암대는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감각을 무력화시킨다. 어둠의 심연과도 같은 이곳에도 과연 생물이 살고 있을까.

안전모에 매달린 헤드랜턴을 켜자 세숫대야만한 물웅덩이에서 무엇인가가 재빠르게 움직인다. 새우다. 신기하다. 이런 곳에서도 새우가 살다니. 이름을 알고 나니 녀석의 터전임을 알 수 있다. 장님굴새우란다. 빛 한줄기 들지 않는 동굴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살다보니 불필요한 눈은 퇴행진화로 사라졌고 몸의 색소가 없어서 반투명의 흰색이다.

눈이 없어 뵈는 것도 없는 것일까. 이 녀석은 먹성이 좋고 난폭하기로 동굴세계에서 유명하다. 장님굴새우가 사는 물가는 다른 생물들이 범접을 금한다니 어쩌면 어둠 세계의 '왕따' 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음습한 곳에 사는 동물들의 세계는 누구에 의해 알려지는 것일까.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고 찐득거리는 곳.

저자 최용근도 처음부터 동굴생물에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산을 좋아했던 저자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산악부를 찾았지만 마침 문이 잠겨있어서 옆방에 있는 동굴탐험연구회를 들어간 것이 동굴과의 첫 인연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해 동굴과는 이별할 줄 알았는데, 원로 동굴연구가인 남궁준 선생이 후계자가 없다는 말을 듣고 12년의 공백을 뛰어넘어 다시 '어둠의 세계'에 발을 딛은 것이 오늘에 이른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동굴관련 책으로 <동굴측량> 이후 5년 만에 선보인 것으로써 어둠 속에 사는 동물(제목은 생물이라고 했지만 주로 동물만 등장한다)들을 밝은 세계에 소개한 것이다. 문헌에 의한 것이 아닌 저자가 직접 발로 뛰며 오랜 시간 관찰한 끝에 그들의 생태를 조명한 것이라서 책에서 진한 땀 냄새가 난다.

일제 강점기인 1918년 평안남도 강동에 있는 청계동 동굴에서 발견된 낯선 벌레 한 마리가 우리나라 최초의 동굴생물로 기록된다. 일본인에 의해 발견된 이 벌레는 지네처럼 생겼으나 흰색을 띠고 있어 전문가에게 넘겨졌지만 무슨 종(種)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20년이 지난 1938년에야 독일 생물학자 베르호프에 의해 새로운 종으로 밝혀지고 '안트로코리아나 그라킬리페스'라는 학명으로 탄생했다. 우리말로 '한국동굴의 가늘고 긴 다리를 가진 벌레'라는 뜻이다.

넉넉한 활자, 풍부한 사진자료, 시원한 편집으로 쉽게 읽힌다.
넉넉한 활자, 풍부한 사진자료, 시원한 편집으로 쉽게 읽힌다. ⓒ 보림
이후 1930년에 두 번째 동굴생물인 등줄노래기가 발견되고 1960년대부터 동굴생물에 대한 탐사와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진다.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약 70만 종이 넘는 생물들이 동굴에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도 계속 새로운 종이 발견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약 600여 종이 발견됐다. 세계 수준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다. 저자는 이를 동굴연구가 늦었고 연구자도 극히 적은 데서 이유를 찾는다.

동굴생물 연구가 시작된 지 50여 년이 흘렀지만 그동안 이를 위해 동굴을 탐사한 연구자는 500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현재 동굴생물 연구자는 손가락으로 꼽고 남을 정도라고 한다. 자신이 직장을 버리고 남궁준 선생 문하로 들어간 격세지감을 느낄만하다.

책은 슬로베니아 한 마을에서 용의 새끼처럼 생긴 '프로테우스 앙구이누스'가 발견되면서부터 눈을 뜬 동굴생물 연구역사를 시작으로 동굴생물의 집인 동굴의 생성과 구조, 우리나라 동굴생물의 세계를 짜임새 있게 보여준다.

넉넉한 활자크기에 방대한 칼라화보, 그리고 스승인 남궁준 선생의 일화 소개는 그에 대한 '헌정'으로 읽힘으로써 어둠 속에서 인간미를 물씬 풍기게 한다. 내용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부담 없이 순식간에 읽을 수 있을 만큼 어렵지 않고 유익하다.

저자는 본문 사이사이에서 우리나라 동굴생물 연구에 맥이 끊어질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험로와 어둠만이 반기는 동굴은 분명 3D 연구 분야이기 때문에 젊은 연구자의 '수혈'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려운 실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저자의 동굴, 동굴생물들에 대한 열정과 남다름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지은이 : 최용근(한국동굴생물연구소 소장)
펴낸곳 : 보림출판사
펴낸날 : 2006. 1. 10
쪽   수 : 205쪽
가   격 : 12,000원


어둠을 정복한 동굴생물의 세계

최용근 지음, 보림(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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