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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밭은 원래 잔잔한 호수의 수면처럼 평탄하다. 산비탈에 있어도 밭은 아래로 흘러내리는 법이 없다. 그러나 농부가 그 밭에 이랑을 내면 그때부터 밭엔 물결이 일렁인다. 오늘은 그 밭에 눈이 덮였다. 황토빛 물결이 오늘은 흰빛 물결이 되었다. 나는 발목까지 빠지는 밭에 들어가 물결 위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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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키가 작을 때는 땅에 쪼그리고 앉아 있지만 키가 크게 자라면 그때부터 하늘을 콕콕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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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올리긴 쉽지만 천 년이란 세월은 사실 얼마나 아득한 것인가. 오늘 이 태백산 주목의 아래쪽을 지나간 사람들은 그가 지켜가는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의 세월 속에 아득한 흔적 하나를 남기고 가는 셈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오르는 산길은 태백산 주목이 지켜온 아득한 천 년 세월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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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꼿꼿이 세우고 키를 키운 나무는 하늘을 찌르지만 구불구불 바람에 흔들리며 자라난 나무는 키가 자라도 하늘을 찌르지 않는다. 그냥 날 좋은 날 더듬더듬 푸른 하늘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며 장난을 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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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사람들이 없을 때면 나무를 안아 보고 싶다. 나무가 옆으로 펼쳐든 가지가 나의 포옹을 기다리는 나무의 반가움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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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의 작은 뒷산이나 앞산에 오르면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높은 산에 오르니 저 아래 내가 올려다 보던 산들이 큰 산 아래 올망졸망 모여살고 있다. 큰 산 아래 작은 산들이 모여 살고, 작은 산 아래 마을이 모여 산다. 산 아래 모여사는 것들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언제나 그 느낌이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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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마이크 시험 중. 안녕하세요, 태백산의 온갖 나무, 새, 바람, 동물 여러분! 태백산 이장 천년 주목입니다. 오늘 외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저희 산을 찾아왔습니다. 부디 반갑게 맞아주시고, 외지분들이 등산로 아닌 곳에 들어가지 말고 쓰레기 버리지 않도록 잘 지도해 주세요."

이장님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바람을 타고 태백산 산길에 울려퍼질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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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호리한 몸매로 허리 한 번 비트니 그 자태가 너무 선정적이다. 사람들 눈치보며 몰래 훔쳐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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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은 그 이름은 붉지만 가지 끝의 나뭇잎엔 푸른 색이 산다. 눈이 내리면 그 푸른 색이나 붉은 색 위에 잠시 흰색이 거처하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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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유난히 하늘이 파랬다. 주목이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을 간다는 얘기는 살아있을 때 땅 속 깊은 곳의 물을 길어올려 목을 축이고, 죽어선 푸른 하늘로 목을 축이기에 가능한 얘기이리라. 그러고 보면 주목의 죽어 천 년은 푸르고 시린 이 나라의 하늘이 가져다 준 또 다른 삶인 셈이다. 주목의 옆에서 한참 동안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가슴의 갈증이 크게 가셨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게재했다. 블로그-->김동원의 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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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갖고 돌아다니면 세상의 온갖 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나는 그때마다 사진을 찍고 그들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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