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충렬사 입구에 서 있는 자그마한 비석입니다. 마치 충렬사가 작은 동네 속에 있다는 듯 이 비석도 무척 조그맣네요. 그러나 큰 사람이든 작은 사람이든 누구든지 품을 수 있는 곳이기에 참 좋지 않나 싶어요.
충렬사 입구에 서 있는 자그마한 비석입니다. 마치 충렬사가 작은 동네 속에 있다는 듯 이 비석도 무척 조그맣네요. 그러나 큰 사람이든 작은 사람이든 누구든지 품을 수 있는 곳이기에 참 좋지 않나 싶어요. ⓒ 권성권
스물 다섯(1618년)이 되었을 때 그는 드디어 무과에 급제한다. 이어 1624년(인조2)에는 이괄의 난 진압하여 진무원종 1등 공신이 된다. 그 뒤 우림위장과 낙안군수를 거쳐 1630년(인조8)에는 평양중군이 되어 검산성을 쌓고, 3년 뒤에는 청북방어사 겸 영변부사가 되어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세운다. 그 무렵 명나라를 배반하여 난을 일으켰던 공유덕도 진압하여 명나라로부터 총병관이라는 벼슬까지 받기도 한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인조14)에는 의주부윤으로 임명되어 그는 백마산성(白馬山城)을 지키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청은 임경업 장군을 피해 남하하게 된다. 그런데 청이 다른 길목을 통해 조선의 남한산성을 쳐들어간다는 사실을 그는 그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충렬사 가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사당'이예요. 저 안에 임 충민공의 근엄한 영정사진이 크게 걸려 있어요.
충렬사 가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사당'이예요. 저 안에 임 충민공의 근엄한 영정사진이 크게 걸려 있어요. ⓒ 권성권
그로 인해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수치심 때문에, 그는 할 수만 있으면 설욕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래서 1640년 청이 명나라 금주를 공격하고자 조선에 원병을 청할 때 그는 자신이 자원하여 그 싸움터에 들어갔다. 이유인 즉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명을 도와 청의 공격을 방해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일은 뜻 때로 되지 않고, 결국 일이 들통이 나고 그는 청나라에 체포된다. 하지만 그를 압송해 가는 길목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명나라로 망명한다. 그때가 바로 하늘이 도운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기회였다. 그렇지만 그 때를 맞춰 조선에서는 신기원의 모반사건이 일어났고, 그에 연루되었다며 조선에서는 그를 압송하게 되고, 온갖 고초와 심문을 겪은 끝에 김자점에 의해 최후를 맞게 된다.

왼쪽이 임경업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정조가 친히 글을 지어 왕명으로 세운 '어제달천충렬사비'이고, 오른쪽이 부인인 전주 이씨(혹은 완산 이씨)의 충렬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렬비(貞烈碑) 예요. 8.15광복절이나 6.25사변 같은 큰 일이 있는 때에는 이 비에서 땀이 흘러나온다고 하네요.
왼쪽이 임경업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정조가 친히 글을 지어 왕명으로 세운 '어제달천충렬사비'이고, 오른쪽이 부인인 전주 이씨(혹은 완산 이씨)의 충렬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렬비(貞烈碑) 예요. 8.15광복절이나 6.25사변 같은 큰 일이 있는 때에는 이 비에서 땀이 흘러나온다고 하네요. ⓒ 권성권
남편과 아내는 본디 한 몸이라고 했던가. 임경업 장군의 부인 또한 장군 못지 않게 정말로 심지가 굳은 여인이었다. 임 장군이 청에 체포되어 압송 도중에 명나라로 망명하자, 청나라는 임장군 대신에 그의 아내를 감옥에 가두게 된다.

'전주 이씨(혹은 완산 이씨)'라는 것 밖에 달리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던 그녀는 그곳에 온갖 모욕과 심한 고문까지 받게 된다. 그런데도 임 장군이 어디로 갔는지, 어떤 계략을 꾸미는지, 조선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발설하지 않았고, 그녀는 끝내 옥에서 자결하게 된다.

이에 조선에서는 숙종 23년에 임경업 장군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고 관직을 복관시켰고, '충민'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리고 그의 고향인 충주에 '충렬사'를 세워 제향했고, 부인인 전주 이씨에게도 정려를 명하였다. 영조 3년에는 임금이 직접 나서서 이곳을 '충렬사'라 불렀다. 더욱이 정조 때에는 어제달천충렬사비(御製達川忠烈祠碑)를 세웠고, <충민공실기>를 책으로 내려 임경업 장군의 음덕을 찬양토록 하였다.

'임충민공유적정화기념비', 이른바 성역비예요. 기념비 뒷 부분에는 이은상 님과 이성복 님이 1979년 7월에 쓴 글이 새겨 있습니다.  물론 임경업 장군의 충정과 부인 이씨의 정절을 새기기 위한 글이예요.
'임충민공유적정화기념비', 이른바 성역비예요. 기념비 뒷 부분에는 이은상 님과 이성복 님이 1979년 7월에 쓴 글이 새겨 있습니다. 물론 임경업 장군의 충정과 부인 이씨의 정절을 새기기 위한 글이예요. ⓒ 권성권
한편, 충렬사 안에 있는 '유물전시관' 안에는 임경업 장군이 썼던 '추련도(秋蓮刀)가 소장돼 있다. 그 칼 배의 양면에는 28자에 달하는 한시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그것을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때여, 때는 다시 오지 않나니
한번 태어나서 한번 죽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도다
장부 한평생 나라에 바친 마음
석자 추련도를 십 년 동안 갈고 갈았도다


'성역비' 뒤쪽으로 걸어갈 수 있는 오솔길 같은 곳이에요. 예쁘고 멋진 분수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있네요. 하지만 겨울이라 그런지 그 폼이 쓸쓸하고 허전한 것 같아요.
'성역비' 뒤쪽으로 걸어갈 수 있는 오솔길 같은 곳이에요. 예쁘고 멋진 분수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있네요. 하지만 겨울이라 그런지 그 폼이 쓸쓸하고 허전한 것 같아요. ⓒ 권성권
겨울이라 그런지 충렬사에는 아직 사람들 발길이 뜸한 편이다. 아마도 달천이라는 자그마한 동네에 한적히 파묻혀 있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더군다나 쌀쌀하고 매서운 바람이 낙엽까지 온통 쓸어가고 있는 형국이니, 이 추운 날씨는 그 이유를 더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 날씨 탓에 성역비가 놓여 있는 뒤편 분수도 쾌활해야 할 터인데 왠지 쓸쓸하게 물을 품어 내고 있다.

그러나 봄이 오고 날이 풀려 따뜻해지면 사람들 발길이 이곳을 찾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이 곳이 우리나라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까닭에 전국 어디에서나 오고 가기도 쉽고, 무엇보다도 당시 나라를 위해 한 몸 던졌던 임경업 장군의 충정을 온 몸과 마음에 새길 수 있는 까닭이리라.

세상 일이나 역사가 그렇듯 귀한 것일수록 흔치 않는 법이다. 귀한 것일수록 분명 희귀하기 때문이다. 임경업 장군의 사당이 있는 충렬사도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조그마한 동네 속에 숨어 있는 듯해서 찾는 이가 드물지만 그만큼 더 귀한 가치를 지닌 곳도 없지 않겠나 싶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