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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밝혀진 역사적 사실로 볼 때, 김옥균(1851~1894년)이 20대였을 당시에 조선인들이 중국에 대해 갖고 있던 감정은 문화적 콤플렉스, 경계심, 멸시, 모멸감 등이었다. 이것은 현대 한국인들이 중국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보다는 훨씬 단순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서를 전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대(對)중국 콤플렉스였다.

그런데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인들의 대중국 감정에는 '극복의식'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추가되었다. 이러한 대중국 극복의식을 '몸'으로 보여 준 인물이 바로 김옥균이다. 그는 현대의 '반미 투사'를 연상시키는 일종의 '반중국 투사'였던 것이다.

아마 이 대목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김옥균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로 분분하지만, 그를 '친일파'로 인식하는 시각 또한 만만치 않다. 그런 인식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에서 김옥균을 '반중국 투사'라고 평가한다면, 분명 적지 않은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인식할 것이 있다. 김옥균이 살았을 당시의 조선인들은 지금 우리가 느끼는 정도의 반일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시대의 조선인들은 일제 식민지를 겪은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느끼는 정도의 '치욕'을 경험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 때에 일본에게 어느 정도의 수모를 당하기는 했지만, 그 수모는 일제 치하에서의 수모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운요호 사건(1875년)과 강화도조약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조선 지배계층은 세계관의 동요를 별로 느끼지 않았다.

따라서 김옥균이 살았을 당시의 조선인들은 지금 우리가 일본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또 당시의 한일관계 역시 지금의 한일관계와는 다른 것이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한일관계를 거울로 당시의 한일관계를 인식하는 것은 분명 오류일 것이다.

그리고 일제 식민지배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은 한국인들은 모든 문제를 지나치게 '친일이냐 아니냐'라는 기준으로 다루려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친일과 무관한 사람들에 대해서까지 친일의 잣대를 쉽사리 들이대는 것이다. 그리고 대한제국 멸망에 한몫을 한 '친일파'를 추적하다 보니, 일본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무조건 친일 기준으로 단죄하게 되는 것이다. 김옥균도 바로 그러한 경향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옥균과 그의 시대를 평가할 때에는 친일이라는 기준보다는 '그 당시를 지배하고 있던 핵심적인 문제'를 기준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럼, 김옥균이 살았을 당시에 조선인들을 지배하고 있던 핵심적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중국 청나라의 조선 침탈이었다. 김옥균이 29세이던 1879년부터 청나라 광서제와 북양대신 이홍장은 조선에 대한 적극간섭정책을 시작했는데, 이러한 간섭정책은 한중관계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것이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그리고 청나라는 자국이 영국 등 서양 제국주의국가들에게 당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조선에 대한 침탈을 시도했다. 서양열강에게 뺨 맞고 조선에 와서 화풀이하는 격이었던 것이다.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제국주의적 침탈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1882년 임오군란과 그 해에 체결된 조선-중국 상민수륙무역장정이다. 청나라는 임오군란을 빌미로 사상 최초로 내정간섭을 위한 파병을 감행했으며, 또 조선-중국 간의 무역장정을 통해 조선을 경제적으로 침탈하기 시작하였다.

청나라가 사상 초유의 강도 높은 방법으로 조선을 침탈하자, 조선 내부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조선정부가 취한 방법 가운데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외교적 노력이었다. 조선은 청나라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러시아 등 외세를 끌어들이는 방법을 취하기로 했다.

이처럼 중국의 제국주의적 침탈이 가중되는 속에서 김옥균은 '중국 극복' 즉 반중국 노선을 시대적 과제로 설정하였다. 그러므로 김옥균의 목표는 '반중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생각은 당시 조선사회의 의식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옥균은 '반중국'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외교적 방식을 선택했다. 물론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또 하나의 외세를 끌어들인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당시의 절박한 상황에서 그에게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김옥균이 '반중국'을 위해 처음에 접근한 외세는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였다. 비록 고종 임금의 명령을 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임오군란 이후에 일본에 간 김옥균은 일본주재 러시아공사 로젠에게 수교의사를 전달하였다. 그리고 1883년과 1884년에도 김옥균은 일본주재 러시아공사 다비도브에게 다시 한 번 수교를 요청했다.

김옥균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노력을 기울인 결과로, 1884년 7월 7일 조선과 러시아는 국제적 견제를 뚫고 수교에 성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옥균은 러시아 세력이 조선에 들어오는 한편 청이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서, 1884년 10월 조선주재 일본군 병력을 이용하여 갑신정변을 단행했다.

중국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지만, 김옥균이 보여준 행동은 '중국 극복'이라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들을 본다면, 김옥균에게 있어서 일본은 그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러한 '중국 극복의식'은 비단 김옥균에게서만이 아니라 고종을 포함한 당시의 조선인들이 대체적으로 공유한 것이었다.

결국 중국은 조선에서 극복되었지만, 그것은 조선인들 스스로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에서 중국을 극복한 것은 조선 자신이 아니라 청일전쟁 이후의 일본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남이 대신 나서서 해결해 주었기 때문에, 이후 조선의 운명은 기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위와 같이 김옥균이 살았던 시대에, 중국에 대한 조선인들의 정서에는 '극복의식'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그런데 이후 조선과 중국이 일제 침략을 받고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됨에 따라, 또 두 민족이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하게 됨에 따라, 한국인들의 대중국 감정 속에는 '막연한 연대의식'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때에 '중공군'을 경험한 한국에서는, 지배층이나 주류사회를 중심으로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 퍼지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으로부터 40여 년 뒤인 1990년대 한중수교 이후로 한국인들이 접한 중국인의 이미지는 다소 색다른 것이었다. 자본주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한국인들은 중국이라는 나라를 전체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돈이 얼마나 있는가'라는 기준으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연변'에서 온 조선족 동포들을 통해 중국을 인식하는 일부의 경향도 나타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인들의 대중국 감정 속에는 '무시'라는 새로운 정서가 추가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수천 년간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한국인들의 대중국 감정 속에는 문화적 콤플렉스, 경계심, 멸시, 모멸감, 극복의식, 막연한 연대의식, 적대감, 무시 등의 정서가 복합적으로 포함되었다. 전반적으로는 대중국 콤플렉스가 지배하는 가운데에서 중국에 대한 멸시·극복의식·무시 등의 정서가 뒤엉키게 된 데에는 위와 같은 역사적 연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제4편에서는 한국인들의 대북 감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제4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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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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