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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이 끝났다. 민사과로 오고 나서 두 번째 재판이다. 박 실무관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기록과 문서들을 정리한다. 언제 보아도 성실하다. 그런데 오늘은 안경을 꼈다. 평소에는 콘택트렌즈를 끼곤 했었다.

그래도 참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나와 함께 일을 해서가 아니라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여성이다. 그런데도 아직껏 사귀는 남성이 없단다. 법원 총각들은 다 뭘 하는 걸까.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이 한 지붕 아래에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나도 뭔가를 해야 하는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무엇에 쫓기듯 허둥거린다. 해가 지려는지 창문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컴퓨터로 눈길을 돌린다. 오늘은 어떤 글들이 올라와 있을까. 나는 코트넷(법원 내부통신망)을 열람한다. 많은 글들이 올라와 있다. 모두 다 좋은 글들이다.

나는 메일을 확인한다. 어, 판사가 내게 메일을 보냈다. 재판 중 쟁점이 있는 사건들을 잘 정리했다. 첫 재판할 때도 그랬었다. 나로서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조서 칠 때 중요한 자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재판부 구성원간의 의사소통이 이래서 중요한가 보다.

벌써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가는 모양이다. 직원들이 책상이며 캐비닛을 정리한다. 이제 설날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설 분위기 느껴지질 않는다. 평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법원 곳곳에 선물을 주고받지 말자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전시성 행정만은 아닌 성싶다. 그만큼 공직사회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나는 내내 망설였다. 녀석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녀석 때문이다. 나를 이렇게 허둥거리게 만드는 것은 순전히 그 녀석 때문이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벌써 일주일째다. 그러나 이제 해결되었다. 녀석에게 송금만 하면 된다. 그런데 어떡한다. 녀석이 거래하는 은행을 나는 모른다. 전화로 확인을 해야만 한다.

▲ 친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박희우
그러니까 일주일 전이었다. 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약간의 돈을 빌려줄 수 없냐는 것이었다. 나는 망설였다. 나도 사정이야 뻔했다. 아파트 중도금 때문에 아내가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지 나도 잘 안다. 나로서는 그만한 돈도 큰 부담이 되었다.

나는 여러 날 고민했다. 녀석에게 도움을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녀석은 나보다도 형편이 더 어렵다. 녀석은 그렇다치더라도 녀석 얘들만은 그게 아니었다. 설빔도 해주어야 할 것이다. 설 명절에 아이들의 동심을 멍들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도저히 아내에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나는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좀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아내의 눈치만 살폈다. 아내는 요 며칠 사이 전자계산기만 두드렸다. 그러다가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올 설에는 시댁 어르신들에게 선물도 제대로 못하겠어요."

그래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내의 그런 모습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녀석을 도와주어야 한다. 그때였다. 궁하면 통한다고 기막히게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나는 아내를 불렀다.

"여보, 나도 지금부터 공부 좀 해야겠소."
"공부라니요?"
"사무관 승진 시험 말이요?"
"올해는 시험 보러 가기가 힘들다면서요?"
"아직은 잘 모르오. 설령 못 간다 해도 공부는 지금부터 해야겠소. 선배들 하는 말이 최소한 1년은 해야 합격한다질 않소."
"그렇게나 승진시험이 어려워요?"
"그럼요. 그래서 말인데…"
"말씀해 보세요."
"책을 좀 사야 할 것 같소. 책값으로 ○십 만원만 마련해줄 수 없겠소?"
"그렇게나 책값이 비싸요?"
"말도 말아요. 책이 얼마나 많은지 쌓아 놓으면 작은놈 키만 하다오."
"그래요? 그럼 할 수 없지요.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공부한다는데…."

아내는 말끝을 흐렸다. 슬픈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무척 기뻤다. 아내를 속였다는 죄책감 따위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왜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 보기가 미안해지는 것이었다. 아니 제대로 얼굴조차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내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그런 마음은 더했다.

나는 망설였다. 에이, 차라리 모르는 체 해버려. 녀석은 녀석이고 나는 나야. 녀석 때문에 왜 우리 가족이 고생을 해야 하지. 그런데 그런 마음도 잠시였다. 자꾸만 녀석과 녀석의 처와 녀석의 아이들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갔다.

퇴근 시간이 훌쩍 넘어버렸다. 이제 사무실에 직원이라곤 나밖에 없었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래, 오늘만은 녀석에게 전화를 하자. 나는 녀석의 휴대폰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울리는가 싶더니 음악이 흘러나왔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다. 녀석은 왜 매일 이런 음악만 틀어놓는 것일까? 정말이지 장엄하기가 이를 데 없다. 아니 비통하기조차 하다. 세상에 이렇게 비통한 음악이 또 있을까?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녀석이 안쓰럽기만 하다. 음악이 멈추고 저쪽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응, 나다."
"희우냐?"
"그래. 그동안 미안했다. 내가 너무 늦었지? 송금을 하려 해도 은행을 알 수가 있어야지."
"야, 그런 소리마라. 괜찮다. 나 있지, 일주일 동안 후회 많이 했다. 너한테 돈 부치지 말라고 전화도 많이 했어. 그런데 네 휴대폰이 계속 꺼져 있더구나."
"잔소리 말고 빨리 은행 이름이나 대!"
"정말 괜찮다."
"야, 너 돈 없으면 설날에 고향에도 못 가잖아? 어머니가 보고 싶지도 않니? 너 벌써 몇 년째 고향에 못 가고 있는 거야? 아무 소리 말고 빨리 은행 이름이나 대!"
"괜찮다니까!"
"야 이 새끼야, 너 자꾸 나를 화나게 할래. 네 어머니가 아파서 바깥출입도 못하고 있다. 이 불효막심한 놈아!"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녀석의 이름만 계속해서 불러댔다. 그때였다.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흐느낌이었다. 녀석이 울고 있었다.

"바보같이 왜 우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느새 나도 울먹이고 있었다. 친구의 울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녀석이 미워 일주일 동안이나 휴대폰을 꺼놓은 내가 싫었다. 나는 친구를 불렀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친구야 미안하다."

끝내 나는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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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맞는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저는 수필을 즐겨 씁니다. 가끔씩은 소설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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