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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마을의 공원 '농바위'
고향 마을의 공원 '농바위' ⓒ 김청구
내 고향의 행정상 이름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2구인데, '농바위'와 '오미' 이렇게 두 마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가 나서 자란 곳은 바로 농바위입니다. 어렸을 적의 고향은 불편한 점도 많았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시골이었습니다.

마을 앞 냇가에 가면 냇물이 씻어낸 예쁜 돌이 수없이 깔려 있었습니다. 장마 끝의 냇물은 자갈밭과 모래 위를 굽이쳐 흘러, 그 물의 맑기는 요즈음의 샘물보다 나을 정도였습니다. 그 시절의 고향 사람들이 수석(壽石)을 알았더라면, 수석으로 돈푼이나 모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냇물 양쪽에는 푸른 논밭이 널리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여름이면 불볕이 쏟아지는 들에서 오전 일을 마친 농부들이 맹위를 떨치는 더위를 피해 피곤한 몸을 달래는 곳은 언제나 농바위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농바위'는 나의 고향 마을 이름으로서의 농바위가 아니고, 그 마을 한 복판에 우뚝 자리잡은 '부락의 공원' 이름입니다. 즉 농바위는 마을 이름인 동시에 마을 안에 있는 공원 이름이기도 합니다.

공원 '농바위'에 있는 느티나무와 흔들바위
공원 '농바위'에 있는 느티나무와 흔들바위 ⓒ 김청구
이 농바위(공원)에는 우리네 큰 방을 가득 채울 만큼 널찍널찍하고 두터운 바위 20여 개가, 사람이 앉거나 눕기 좋게 놓여 있었습니다. 바위 사이사이에는 400~500년은 족히 되었을 느티나무 10여 그루가 노익장을 과시하며 서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본 사람이면, 이것이 마을의 자연발생적 공원임을 누구라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곳에는 둘레가 두세 아름씩 되는 거대한 느티나무들과 크고 널찍널찍한 바위들이 고향을 변함없이 지키고 있습니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여름이면, 논밭에서 볕과 일에 시달린 농민들이 지치고 달궈진 몸을 식히려고 모여드는 곳은 언제나 이 공원 농바위입니다. 공원 농바위로 모이는 사람들은 농바위 주민만이 아니고, 이곳에서 가까운 이웃 3~4 동네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농바위 공원에 자생하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수령400년 정도)
농바위 공원에 자생하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수령400년 정도) ⓒ 김청구
앞뒤가 훤히 트인 시골에서는 앞뒷문 활짝 열어젖뜨리면 집에서도 시원하지만, 공원 농바위의 시원함이란 집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농바위는 그 형태도 작은 동산 모양으로 평지보다 조금 높이 솟아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피곤한 몸을 '큰 대(大)'자로 펼치고 누워, 낮잠 즐기기에 알맞고 시원한 바위들이 있고, 이 바위들은 온종일 10여 그루의 느티나무 가지 그늘에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여름, 고향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어떤 이는 낮잠 한숨 늘어지게 자고, 어떤 이는 장기나 고누를 두기도 하며, 애들은 매미나 올빼미를 잡는다고 기웃거리고 다녔습니다. 어느 시대부터 그곳이 부락 사람들의 안성맞춤 피서지로 생겨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옛날 어느 한량(閑良)이 장기판고누판을 평평한 바위에 음각(陰刻)으로 새겨, 여름철의 휴식 게임으로 아주 좋습니다.

농바위의 자랑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설악산에 가면 '울산바위'가 이름 높듯이, 이곳에서는 '흔들바위'가 명물입니다. 흔들바위는 거대한 바위 3개가 수평으로 층을 이루고 있는데, 2층 바위와 3층 바위는 완전히 밀착되어 있지 않고, 앞뒤로 좁다란 틈이 조금씩 있어, 사람이 3층을 흔들면, 3층만 보일동 말동 조금씩 흔들립니다.

이 바위들은 바위 한 개마다 불도저로도 이동시키기 어려울 만큼 커다랗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아이들이 흔드나 어른이 흔드나, 3층 바위는 똑같은 폭으로 조금씩만 흔들립니다.

공원 땅 주인이 살던 전통식 기와집
공원 땅 주인이 살던 전통식 기와집 ⓒ 김청구
지금은 모두 농기계를 쓰기 때문에 사정이 좀 다르나, 내가 어렸을 때에는 농부들이 이 공원에 모이면, 거기서 품앗이 계획을 짜거나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거나, 즐거운 농담으로 피로를 풀어, 마을 사람 상호간에 우정이 깊어지는 사교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좋은 피서지가 고향에는 지금도 건재하건만, 마을의 공원 농바위가 지금은 옛날만큼 고향 사람들의 인기를 끌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시골집도 모두 도시화하여 선풍기, 에어컨이 있고 즐거운 노인회관까지 있어, 삼복염천(三伏炎天)이라 해도 옛날처럼, 어른 애 할 것 없이 모두 모이지는 않습니다.

몇 백 년씩 살아온 느티나무들과 넓고 큰 바위를 품에 안은 공원 농바위의 풍광(風光)은, 여름이면 예나 지금이나, 그 앞을 지나는 길손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벌써 반세기 전인 50년대였는데도, 자가용으로 이 공원을 지나던 남녀들이 번들거리는 차를 길가에 세워놓고 색안경과 화사한 차림으로 공원에 들어와 자신을 뽐내며 스냅사진을 찍어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 나그네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던 고향 사람 중에는,

"어떤 사람 팔자 좋아. 저렇게 예쁜 여자 손잡고 놀러 다니는데……."

하고 '야유 반, 자탄 반'으로 푸념을 토하는 이가 있어, 마을 어른의 주의와 젊은이의 너털웃음을 사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이름 모를 화가가 불후의 명작을 남기기 위한 밑그림을 그려 가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꿈을 꾸면, 삼십 년 전에 자주 들르던 공원 농바위 모습을 배경으로 하는 꿈을 종종 꿉니다.

고향 농바위의 노인들이 매일 쉬고 즐기는 회관
고향 농바위의 노인들이 매일 쉬고 즐기는 회관 ⓒ 김청구
옛날에는 그 앞에 작은 연못과 가느다란 도랑이 있어, 사철 맑은 물이 조금씩 연못으로 흘러들었습니다. 곁에는 우뚝한 솟을대문과 고래등 같은 전통식 기와집이 있어, 충남과 대전의 교육계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훌륭한 선비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모습이 옛날만은 못하지만, 고래등 같던 기와집은 지금도 일부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자랑스런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온 고향 농바위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모두 어질고 선량해서, 늦은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은 채 집을 비우는 것이 예사이고, 부락민 모두 상부상조하며 오순도순 정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독자들께서도 한여름, 갑사에 가시게 되면 공원 농바위에 잠시 들러 잠시 더위를 식히고 가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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