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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남고문의 설경
나주남고문의 설경 ⓒ 김정수
멋진 설경 사진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아 아침도 안 먹고 거리로 나섰다. 시내 중심부에 자리한 남고문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9시였다. 남고문은 사적 337호로 지정된 나주읍성지의 성문 중 하나이다.

나주읍성은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457~1459년 나주목사 김계희에 의해 지금의 규모로 확장되어 완성되었다. 조선시대 읍성과 마찬가지로 평지와 구릉을 이용해 축성한 평산성이다.

전체 성벽의 둘레는 3천300여m에 이른다고 전해오는데, 현재 성벽은 남문지 주변 100m 만 남아 있다. 읍성에는 4개의 문이 남아 있었는데 남고문은 남문으로 이중 문루인 철문이었다. 1993년에 복원되어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동문인 동점문, 서문인 서성문, 북문인 북망문이 더 있는데, 동점문은 현재 복원공사 중에 있으며, 2010년까지 사대문을 모두 복원할 계획이다.

남고문에 도착하니 옛추억이 스쳐 지나간다. 지금의 아내가 연애 시절 다니던 직장이 자리한 곳이 나주라 당시에는 거의 주말마다 3시간을 넘게 달려서 도착했던 곳이다. 남고문은 아내의 직장과 200미터가 채 안되는 거리에 자리잡고 있어 차를 타고 수없이 지나쳐 갔던 곳이다.

하지만 지나치기만 했을 뿐 사진은 한 장도 안 찍었고, 자세히 살펴본 적도 없다. 남고문은 사거리와 만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어 로터리 역할을 하고 있다. 2층 구조의 문루에 눈이 수북히 싸여 있어 푸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토록 자주 왔던 나주지만 이렇게 눈이 쌓힌 모습은 처음이라 새로웠다. 문 양옆에는 계단이 있어서 문루로 오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오전 9시인데도 계단 부분은 대부분 눈이 녹은 상태였다. 남고문을 한바퀴 돌며 사진 촬영을 하고는 금성관으로 향했다.

금성관은 나주목 관아의 객사였던 곳으로 나주읍성 안에 들어서 있던 건물이다.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라 안으로 들어가보지는 못하고 입구에서 둘러보았다. 입구의 안내판을 살펴보니 일제강점기 시대에 나주읍성과 나주목 관아가 훼손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금성관의 동·서익현과 망화루 등은 일제 때 없어지고, 금성관만 남았으나 이를 개조하여 상용함으로서 원형이 상실되었다. 그리고 도로공사 등의 영향으로 동서북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제껏 수없는 외침을 겪으면서 수없는 문화유산이 훼손되었지만, 이렇게 일제의 만행에 의해 고의적으로 훼손된 문화유산을 바라볼 때가 가장 안타깝다.

이런 훼손이 없었다면 나주읍성은 순천의 낙안읍성을 능가하는 남도의 대표 관광지가 되었을 것이다. 나주는 사실 인근의 다른 시도에 비해 관광지로 소개할 만한 곳이 그다지 많지 않다. 늦었지만 지금 나주읍성과 나주목 관아, 나주향교 등이 복원공사 중이라 복원이 끝나고 나면 어느 정도 예전의 면모를 되찾을 것이라 생각된다.

나주목 관아문인 정수루의 설경
나주목 관아문인 정수루의 설경 ⓒ 김정수
입구에는 나주목 관아문인 정수루(문화재자료 제 86호)가 서있다. 건물 앞쪽에는 크레인까지 매단 트럭이 불법주차로 건물을 막고 있어서 건물의 정면 모습을 카메라에 제대로 담을 수 없는 게 아쉬웠다.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자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얀 눈을 뒤집어선 지붕이 인상적이다. 건물 중앙에는 큰북이 놓여 있다. 정수루에 설치된 북은 2004년에 제작한 것으로, 한국전쟁 전에는 이곳에 큰북을 매달아서 시민들에게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나주목관아 내동헌의 설경
나주목관아 내동헌의 설경 ⓒ 김정수
나주목 관아 돌담길 너머로 바라본 내동헌
나주목 관아 돌담길 너머로 바라본 내동헌 ⓒ 김정수
이곳은 선조36년(1603년)에 나주목사로 재임한 동계 우복용이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수루를 지나면 외동헌(제금현)과 내동헌(금학현)이 있었는데, 지금은 내동헌인 목사 내아만 남아 있다.

안쪽에 자리한 내동헌이 하얀 눈속에 뒤덮힌 채 서있다. 아직은 복원중인 상태라 다소 썰렁하다. 정수루 왼쪽을 돌아 돌담길을 지나자 한결 생동감이 넘친다. 골목길과 담벼락에도 흰눈에 쌓여 있어 그 너머로 보이는 내동헌이 한결 푸근하게 와닿는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 위에는 새집이 지어져 있다. 일제시대의 훼손만 없었다면 정말 멋진 설경 사진이 나왔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금성관 정문이었던 망화루
금성관 정문이었던 망화루 ⓒ 김정수
돌담길 바로 위쪽에는 망화루가 서 있다. 이곳은 조선 성종 18~20년(1487~1489)동안 이유민 목사가 나주목의 객사인 금성관(유형문화재 제2호)과 함께 건축된 금성관의 정문이었던 건물이다.

일제시대 때 없어졌다가 2001년부터 복원공사를 추진하고 있는데,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있다. 도로 중앙에 건물 한동이 서 있는데, 불법주차 차량으로 인해 건물의 본모습을 제대로 담지 못해 아쉬웠다.

눈길을 조금 더 올라가자 ‘나주 목사 내아(전남 문화재자료 132호)’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조선시대 동헌 근처에 있던 목사의 살림집으로 쓰였던 곳이다. 일제강정기 때 군수관사로 사용하면서 원형이 변형되었다가 최근에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나주목사 내아 문간채의 설경
나주목사 내아 문간채의 설경 ⓒ 김정수
입구에 자리한 문간채는 고종29년(1892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대문 양 옆으로 4개의 방문이 나 있다. 앞쪽은 햇빛에 눈이 다 녹았는데, 안으로 들어서서 내다보니 눈속에 푹덮힌 모습이 솜이불을 이고 있는 듯 하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 위에 많은 눈이 남아 있어서 모처럼 설경다운 사진을 담을 수 있었다.

나주목사 내아 안채는 ㄷ자형으로 자리한 건물이다
나주목사 내아 안채는 ㄷ자형으로 자리한 건물이다 ⓒ 김정수
순조 25년(1825년)에 세워졌다는 안채는 ㄷ자 모양으로 서 있다. 양반의 기풍이 느껴지는 와가로 당시 목사의 지위에 비쳐볼 때 생각외로 단촐하다. 마당에 쌓힌 눈에는 발자국이 하나도 없었는데 아무도 밟지 않은 눈속을 걷는 기분이 상쾌하다. 아직 기자가 사는 경남 마산에 눈이 오지 않아서 이것이 첫눈인 셈인데, 첫눈 밟는 느낌을 제대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기자에겐 첫눈이었지만, 나주를 비롯한 전라도 지방은 벌써 10일 넘게 폭설이 내려 많은 피해가 발생한 상태였다. 나그네에게는 아름답게 와닿는 눈이지만, 현지 주민들에게는 재앙의 눈이었다. 안채 왼쪽에는 사랑채로 보이는 건물 1동이 더 있을 뿐이다. 눈이 녹으면서 처마 끝에 고드름이 길게 늘어선 모습이 눈길을 끈다.

나주목사 내아 처마에 고드름이 매달려 있다
나주목사 내아 처마에 고드름이 매달려 있다 ⓒ 김정수
따뜻한 경남 지방에 살다보니 고드름 역시 접하기 힘든 풍경인데, 올겨울 들어서서 눈이며, 고드름 모두 처음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뽀드득 소리를 들으며 그 속에 있자니 조선시대 양반이 된 듯하다. "여봐라"하고 소리치면 금방이라도 마당쇠가 빗자루를 들고 뛰어나와 눈을 쓸어낼 것만 같다.

나주향교에도 가보고 싶었는데 주변에 물어보아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 주변을 맴돌다, 전남팸투어에 참여하기 위해 무안으로 옮긴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BS 'U포터뉴스'와 '한겨레 필진네트워크'에도 송고합니다.

김정수 기자는 여행작가로 홈페이지 출발넷(www.chulbal.net)을 운영중이다. 저서로 <남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섬진강>, <남성미가 넘쳐흐르는 낙동강>, <주말에 떠나는 드라마 & 영화 테마여행>  등이 있다. 일본어 번역판인 <韓國 ドラマ & 映畵ロケ地 紀行>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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