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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협려
신조협려 ⓒ 김영사
최근에는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문학적으로 한 '교양'하시는 분들 앞에서 섣불리 무협이라는 장르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가는 '사회적 왕따'를 자처하기 십상이다.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무협이라는 것은 다분히 허황되고 과장된 설정으로 범벅이 된, 동네 만화방이나 도서대여점에 널려있는 싸구려 B급 문화의 유물로 인식된다.

그러나 무협은 알고 보면 가장 동양적인 가치관을 대표하는 대중문학의 한 장르다. 영화로도 제작된 <소오강호> <동방불패> <칠검> <무극>부터 현재 제작중인 한국영화 <중천>과 뮤지컬 <불의 검>같은 작품들의 뿌리는 모두 무협에 있다. 서양에서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같은 작품을 보고 유치한 B급 문화로 취급하는 사람이 없듯, 무협은 동양의 신화와 역사, 사상에 그 뿌리를 둔 환타지 문학이다.

무협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중화권의 수많은 작가들 중에서도, 오늘날 현대적인 무협 장르의 모든 원형을 만들어낸 거장으로 평가받는 이가 바로 김용이다. 양우생과 함께 신파 무협의 거두로 불리는 김용의 작품들은 저자의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을 기초로 방대한 스케일과 탄탄하면서도 긴박감 넘치는 구성, 매력적인 캐릭터가 넘쳐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겉보기에 하늘을 나르고 태산을 쪼개는 절대고수의 과장된 무용담으로만 인식되기 쉬운 장르지만 김용은 진정한 무협이란, 동양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전제되어 있어야함을 늘 강조하곤 했다. 인문학적 소양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작가들이 뼈대와 기교에만 의존하여 무협을 싸구려 대중문학으로 변질시킨 것과 달리, 김용의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문학적 텍스트이자 중국 고전문학의 교본으로 인정받아왔다.

<사조삼부곡> <녹정기> <천룡팔부> <벽혈검> 같은 김용의 대표작에서 보듯, 그의 소설들의 배경은 대부분 중국의 실제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종종 인용되는 중국의 고전 시조나 서화에 대한 풍부한 지식, 당대의 사회상에 대한 정교한 고증과 묘사, 여기에 실존했던 역사적 사건들을 작품속에서 독특한 시각으로 재해석해내는 능력도 탁월하다.

사조영웅전
사조영웅전 ⓒ 김영사
허구의 이야기 속에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절묘하게 배합시켜 내는 김용의 작품들은 동양적인 '팩션(팩트+픽션)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

대중문학적인 측면에서 김용의 작품이 가지는 최대의 매력은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한 텍스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데 있다. 등장인물들이 역경과 시련을 거치며 당대의 영웅으로 성장해가는 이야기에는 무협물 특유의 장쾌한 어드벤처가 살아있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사건 속에는 숨겨진 진실을 파헤쳐가는 스릴러의 긴박감을 보여준다. 그런가하면 오랜 세월에 걸친 남녀주인공들의 애절한 연애담은, 순도 높은 로맨스 소설로도 손색이 없다.

다양한 장르로서의 매력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섬세한 묘사의 힘이다. 김용의 작품에서는 얼핏 소소해 보이는 장면에도 묘사에 많은 분량이 할애된다.

극중 시대와 공간 배경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확한 형상화, 대결장면에서 벌어지는 다채로운 무공의 초식(항룡십팔장, 암연소혼장, 독고구검 등)과 고수들의 섬세한 움직임, 등장인물들의 만남과 엇갈림마다 벌어지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시선은 주-조연의 구분이나 사건의 크고 작음과 상관없이 소설의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이야기에 힘을 불어넣어주는 매력적인 캐릭터들도 빼놓을 수없다. 김용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입체적이면서도 상당히 현대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겉보기에는 영웅의 풍모를 지닌 주인공들도 알고 보면 완벽하지 않으며 저마다 치명적인 결함을 하나씩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결함이 인물의 개성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을 덧입혀준다는 것이 김용 소설의 특징이다.

<신조협려>의 양과나 <소오강호>의 영호충은 영웅의 자질을 지니고 있지만 틀이나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고 개인의 선택과 행복을 무엇보다 중시한다는 점에서 자유분방한 현대의 젊은이를 닮았다. 우유부단한 <의천도룡기>의 장무기나 반영웅에 가까운 <녹정기>의 위소보같은 인물들은 무협물의 전형적인 영웅과는 분명 거리가 있음에도 대단히 흥미로운 캐릭터로 나타난다.

김용의 작품에서 언제나 빠지지 않는 것이 정파와 사파의 대립이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정파와 기존질서에 저항하는 사파간의 대립은 얼핏 보면 전형적인 선악구도로 보이지만, 작품 속에서 이 관계는 언제나 역전된다.

때로는 정파가 사파보다 더 악랄하고 사파가 오히려 정파보다 정정당당하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언제나 정파와 사파의 경계선에 서서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정도인지를 고뇌하는 인물들로 나타난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보수와 진보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는 이런 설정들은 김용의 작품을 종종 정치적인 텍스트로 읽혀지게 만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의 무협소설 역시 보수적인 중화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작품 속에서 강조되는 정의의 기준이 결국 중국인 위주의 내셔널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철저한 한족 우월주의 가운데 외부 민족에 대한 편견과 배타적 시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은 뛰어난 작품 자체의 완성도에 불구하고 한계로 지적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60~80년대에 주로 만들어졌던 그의 무협소설들은 반세기가 되어가는 최근에도 여전히 중화권과 한국에서 널리 읽혀지는 무협의 고전이자, 오늘날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대중문화의 다양한 장르로 변주되고 있다.

팔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식지 않는 만학의 열정을 보여주고 있는 김용은 최근 무협소설 절필을 선언한 상태지만 여전히 많은 마니아들에게 무협의 거장으로서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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