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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를 찾아간 50줄의 한동네 초등동기생
선운사를 찾아간 50줄의 한동네 초등동기생 ⓒ 신병철
입구를 지나면 오른쪽에 승탑과 탑비들의 밭이 있다. 스님들의 공동 무덤밭이고 공덕비밭이다. 대부분 조선시대 승탑인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다른 것은 제쳐두고 백파 율사의 비에 관심을 가졌다. 완당학사 김정희가 가깝게 지내던 백파 율사의 일대기를 글로 남겼다. 대기대용(大機大用), 지금의 우리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다. 추사는 대기대용 최고의 율사로 백파를 꼽았다. 우리는 어렵게 표현한 백파 스님의 업적보다 추사체 글씨에 더 집중했다.

추사체가 완연한 백파비, 선운사 입구 오른쪽 부도밭에 있다.
추사체가 완연한 백파비, 선운사 입구 오른쪽 부도밭에 있다. ⓒ 신병철
크고 작은 글씨, 어찌 보면 삐뚤빼뚤한 것 같으나 전체로 보면 조화롭기 짝이 없다. 굵고 가늘고 크고 작은 글씨들이 조화를 이뤄 추상화의 구조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마지막행은 조금 이상하다. 추사체 글씨 같기는 한데 조화가 안 된다. 이 부분을 누실하여 새로이 덧붙인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단다. 탁본하는 사람이 많은지 검은 먹이 스며들어 보기에 썩 좋지 않았다.

이후 2층으로 된 천왕문을 통해 절 안으로 들어갔다. 아래 중간 칸은 문으로 삼고 위층은 종각으로 사용하고 있다. 천왕문과 종각이 한 몸이 되어 있는 보기 드문 구조다. 천왕문을 지나면 정면 9칸 옆면 2칸의 만세루가 턱 앞을 가로 막고 있다. 건물의 넓이가 대단하다. 기둥들이 제각각이다. 굽은 나무를 그대로 사용했다. 굵기도 제각각이다. 기둥만 그런 것이 아니다. 창문, 도리, 서까래 등 일정한 규격을 갖춘 것이 없다. 아예 전형을 생각하지도 않은 듯하다. 절간을 짓고 남은 목재로 얼기설기 짜 맞춘 듯하다.

선운사 만세루, 굽어진 나무 그대로 사용했다. 격식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없다. 이게 우리식인가  보다.
선운사 만세루, 굽어진 나무 그대로 사용했다. 격식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없다. 이게 우리식인가 보다. ⓒ 신병철
우리나라 건물에서 많이 나타나는 특이한 '자연동화주의'라 하겠다. 꽉 짜 맞춘 인위적인 형식이 지니는 부자연스러움을 어떡해서든 넘어서고 싶은 의식이 이런 건물을 출현케 했을 것이다. 만세루에서는 엄격한 장엄함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그러나 푸근하다. 얼마든지 안길 수 있을 것 같다. 부처님의 넓은 가슴을 형상화한 것일까?

만세루를 옆으로 비껴 들어가면 널찍한 정면 5간의 대웅보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만세루와 조금 어긋나게 마주보고 있다. 왜 만세루로 대웅전의 앞을 막아 답답하게 만들었을까? 한 친구가 궁금해 한다. 만세루가 없다면 대웅전 앞이 넓은 것은 사실이지만 느낌이 너무 휑하진 않을까? 건물의 크기와 넓이에 알맞은 마당을 지니는 것이 넘치는 것과 모자람을 조화시키는 미학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각각의 건물 앞에 있는 마당들은 건물의 크기와 비례하여 적당한 넓이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만세루 옆으로 들어가는 대웅전, 옆으로 들어가는 것을 배려해 석탑이 약간 왼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래야 중앙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세루 옆으로 들어가는 대웅전, 옆으로 들어가는 것을 배려해 석탑이 약간 왼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래야 중앙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신병철
만세루와 대웅보전 사이는 경사가 거의 없어 누대를 만들고 그 아래로 통과하여 대웅보전에 이르는 형식을 갖추기 어렵다. 그래서 만세루를 대웅보전과 약간 어긋나게 지어 그 오른쪽 옆으로 들어가게 했다. 자연히 대웅보전은 조금 비뚤하게 보인다. 그러나 6층의 높은 탑은 대웅보전의 정 중앙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6층탑을 대웅보전의 동쪽에 치우치게 함으로써 동쪽으로 들어오는 사람에게는 정 중앙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대웅보전은 적당한 높이의 기단 위에 정면 5칸, 옆면 3칸을 올려 만든 제법 큰 건물이다. "선운사 건물들 중 최근에 지은 2~3채 건물을 빼고 이 절간 건물들의 특징을 하나만 찾으면?"이란 질문을 친구들에게 던졌다. 친구들의 입이 무거워진다. "지붕만 보고 찾기"라고 힌트를 줬다. "책을 조금 벌려 세워놓은 것 같은 지붕"이라고 누군가 말한다. 선운사 절간의 지붕은 가장 간단한 맞배지붕이다. 맞배지붕은 단순하지만 어떤 때는 웅장하게 어떤 때는 아담하게 보인다. 조선후기엔 맞배지붕에 다포식 건물이 많이 등장하는데, 선운사도 이때 지었다.

대웅보전은 다포건물로 내외3출목을 갖추고 있다. 기둥 밖으로 3개의 도리를 걸치기 위해 살미와 첨차를 끼워 맞췄고 안으로 역시 3개의 도리를 받치기 위해 포를 겹쳐서 짜 맞추었다. 자연히 포가 장식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건물에 비하여 장식성이 조금 덜하다. 공포의 끝인 쇠서 역시 아직 하늘로 치뻗은 앙서가 아닌 것이 많다. 조선 중기 건축물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왕실과 재지사족들의 후원과 지원으로 지은 건물로 보인다. 강한 장식성보다는 엄격한 형식성을 나타내고 있다.

선운사 금동보살좌상, 조선전기에 만든 것으로 아름다운 보살상이다.
선운사 금동보살좌상, 조선전기에 만든 것으로 아름다운 보살상이다. ⓒ 신병철
대웅보전의 동쪽에는 자그마한 전각이 하나 자리하고 있고, 서쪽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설법하는 장면을 형상화한 영산전이 자리 잡고 있다. 동쪽의 보살전에는 금동으로 만든 보살상이 얌전하게 앉아 있다. 원만한 얼굴에 두건을 쓰고 있는데, 두건 자락이 허리까지 내려왔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 몸의 윤곽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목걸이와 옷자락 처리 등이 고려후기 불화에서 나타나는 지장보살모습을 닮았다. 조선 초기에 만든 것이기 때문에 고려불화의 화려한 느낌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도솔천 내원궁의 지장보살상과 비교해볼 만한 것 같다.

이제 대웅전 공간에서 벗어난다. 천왕문 옆에 자그마한 문이 하나 있다. 들어올 때는 자만심으로 군자인양 큰 대문으로 들어왔으나, 비로자나불과 원만한 보살의 가르침을 이심전심으로 전해 받은 우리들은 조금 겸손해졌다. 모두 소인의 심정으로 작은 문을 선택해서 바깥으로 나간다. 겸손함이 자신감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천왕문 옆 쪽문,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자만심이 사라지면 나갈 때는 저문을 통해 나가게 되는가 보다.
천왕문 옆 쪽문,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자만심이 사라지면 나갈 때는 저문을 통해 나가게 되는가 보다. ⓒ 신병철
도솔천이 어디 있을까? 위로 올라가면 도솔천일까? 천인과 미륵보살님이 계시는 도솔천은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는 궁금해 하면서 산속으로 들어갔다. 평지를 걷는데도 느낌은 대단히 깊은 산속을 걷는 것 같았다. 눈이 녹아 질퍽질퍽한 길임에도 마냥 즐거웠다. 사실 시골 한 동네 초등학교 동기들이 50살이나 되어 아내들과 함께 모였으니 그냥 걷기만 해도 즐거울 수밖에. 우리는 길을 걸으며 어릴 때 소 여물 먹이던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친구의 할머니인 동네 골목대장 이야기로 돌아가더니 19살, 20살 겨울 꼴방에 모여 옆 동네 처녀들과 놀았던 이야기로 넘어간다. 겨울 오후 해그름의 도솔천 가는 산길은 마냥 범속의 세상살이를 풀어헤치고 있었다.

옛날 이곳 이름이 장사현이었어서 멋들어진 소나무 이름도 장사송이 되었다. 바로 앞의 천연굴은 신라 진흥왕이 와서 수도한 굴이라 해서 진흥굴이 되었단다. 진흥왕이 백제와 동맹을 맺고 한강유역을 확보한 뒤 백제를 배신하고 이 곳에 와서 수도했을 리 만무하다. 왜 이런 전설이 만들어졌는지 알 길이 없으나, 굳이 따질 일은 또 아닌 것 같다.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 있는 장사송, 멋지다.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 있는 장사송, 멋지다. ⓒ 신병철
산길로 돌아 올라가 요사채 한 채, 최근에 지은 법당 한 채를 지나면 드디어 도솔암 내원궁 작은 문에 도착한다. 바위틈으로 난 작은 돌계단을 올라가니, 어머나! 내원궁의 문은 열려 있고, 그 안에 푸르스름한 조명을 받아 무슨 하늘의 천사일 것 같은 지장보살이 온몸으로 우리를 반겨주고 있는 게 아닌가. 보살상을 향하여 적절한 조명을 한 사찰의 배려에 고마움이 쏟아 나온다.

푸른색의 머리 두건에 원만하기 짝이 없는 얼굴, 깊은 사색에 빠졌을 때 자신도 모르게 배어 나오는 미소, 과연 지장보살은 대자대비의 보살이었다. 오른손은 위로 들어 설법하고 있음을 보이고, 왼손은 바퀴모양의 물건을 들고 있어 지장보살임을 알리고 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떨어진 중생마저 한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성불시키고 나서야 해탈하겠다는 서원을 지닌 가장 푸근한 보살이란다.

이 지장보살상이야말로 고려불화의 경향을 가장 많이 풍기고 있단다. 고려 말기 권문세족은 원찰을 짓고 그 안에 치밀하고 아름답고 정교하고 섬세하기 짝이 없는 불화를 걸었다. 조선초기에 만든 불상이나 보살상에 이런 고려말의 경향과 미술과 기술이 남아 있어, 이러한 지장보살상이 될 수 있었다. 부드럽고 화려하면서도 균형 잡힌 아름다움으로 세상의 어렵고 더러운 진흙을 말끔히 씻어 버릴 것 같다. 이런 산중에서 이런 멋들어진 지장보살을 만날 수 있게 한 선운사의 배려가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선운사 도솔암 지장보살좌상, 금빛찬란한 아름다운 보살상이다.  깊은 산중에서 이런 보살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선운사 도솔암 지장보살좌상, 금빛찬란한 아름다운 보살상이다. 깊은 산중에서 이런 보살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 신병철
이제는 하산해야 하나 보다. 우리는 모두 흡족했다. 아무 욕심도 없어져 버렸다. 악착같이 높은 자리도 추구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미웠던 사람도 모두 이해하고 좋아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내원궁을 내려와 왼쪽으로 돌아 바위를 쳐다보는 순간, 어쩌면 저렇게 못생기고 큰 부처님도 다 있는감? 거대한 동불암 마애불상이 나타난다. 눈은 떴는지 감았는지 알 길이 없고, 입은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은지 무언가 끊임없이 불만을 토해내는 모습이다. 내원궁에는 저렇게 아름다운 보살을 모시고, 그 아래에는 왜 또 이렇게 못생긴 부처님을 모셨단 말인가. 이 일을 어쩌란 말인가?

통일신라시대 불상은 엄격한 규격을 지니고 있어 멋있다. 흐트러짐이 별로 없다. '왕이 곧 부처'라는 인식아래 국가적 차원에서 불상을 만들고 관리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지방의 독자성을 표방한 호족들이 연합하여 세운 고려는 불상에게 일정한 틀을 주지 않았다. 지방의 호족이나 향리가 주체가 되어 지방별로 개성적인 불상이 만들어졌다. 농익은 조각술도 없었다. 그냥 지방에서 손재주가 좀 있는 사람이 뽑혀서 제작했다. 불상은 다양해졌고, 못생긴 부처도 많이 만들어졌다.

사실 부처가 꼭 잘생겨야 할 이유는 없다. 부처를 가까이 하고 부처가 되기 위해 평생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못생긴 선운사 동불암 마애불은 우리에게 겉모습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근본으로 돌아갈 것을 말하고 있었다.

선운사 동불암 마애불, 고려전기에 지방적 개성이 넘치는 부처님으로 바위에 새겼다.
선운사 동불암 마애불, 고려전기에 지방적 개성이 넘치는 부처님으로 바위에 새겼다. ⓒ 신병철
조선후기 부정부패로 착취당하여 생존 위기에 처한 농민들은 이런 못생긴 부처님께 의지하기도 했다. 마애불 명치쯤에 구멍을 파고 막아놓았다. 원래는 불경이나 불상제작에 공이 있는 사람명단을 넣어둔 장치였다. 1894년 갑오년 농민들은 새 세상을 열기로 하고 분연히 떨쳐 일어섰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이 농민군 대장이었다. 동불암 마애불 복장에 비기가 들어있는데,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천지개벽한다는 말이 떠돌고 있었다. 군수 누군가가 그것을 꺼내려고 하다 벼락을 맞았단다.

그러나 손화중이 이 비기를 꺼냈다. 농민들은 동학농민혁명에 의해 천지가 다시 열린다고 굳게 믿었다. 동학혁명의 성공을 바라는 농민들이 만든 이야기일 것이다. 비기의 뜻대로 천지가 개벽할 것 같았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은 일본군 관군 연합군에 무참히 패하고 말았다. 비기조차 일본군의 전투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하염없이 속세로 내려간다. 속세로 나가는 길은 어둠에 휩싸였다. 아무도 말이 없다. 올라 올 때 보았던 나무 밑에 파랗게 살고 있는 꽃무릇만 생각하고 있다. 꽃무릇은 9월~10월쯤에 꽃대궁만 올라와 꽃을 피우고 꽃이 사라지고 나면 그때서야 잎이 돋아나는데 그 잎은 겨울을 나고 5월쯤이면 다시 사라져 버린단다. 상사초처럼 기구한 운명의 잎과 꽃이다. 왜 무릇꽃이 아니고 꽃무릇일까? 한 친구가 투덜거린다. 점점 속세가 가까워지고 있나 보다. "이 꽃은 스님과 보살(여자신도) 사이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담고 있어"라고 누군가가 자신 있게 해석한다. 도솔암에서 오늘 저녁에 계획되어 있는 풍천장어를 절대 먹지 않겠다고 한 다짐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군침마저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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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살고 있습니다. 낚시도 하고 목공도 하고 오름도 올라가고 귤농사도 짓고 있습니다. 아참 닭도 수십마리 키우고 있습니다. 사실은 지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개도 두마리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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