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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1월초 가스공급을 중단했을 때 리투아니아 뉴스포털(www.delfi.lt)에 실린 시사만평.
러시아가 1월초 가스공급을 중단했을 때 리투아니아 뉴스포털(www.delfi.lt)에 실린 시사만평. ⓒ delfi
정치란 권력의 동등한 분배작업이라 했던가. 다량의 에너지를 소유하고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국가는 강대국이 되기 마련이고, 그와 반대로 에너지 종속국인 나라들은 약소국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올해 초 세계의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천연가스 분쟁은 그 에너지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만방에 내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천연가스 분쟁은 현재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스분쟁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발트 해가 있다. 발트 해는 덴마크에서 시작하여 스칸디나비아를 아우르는 바다로, 발트 해로 이어지는 강들을 따라 러시아 내륙으로도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중세시절부터 무역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러시아와 유럽에서 벌어지는 에너지 분쟁은 발트 해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유럽 천연가스 분쟁은 '발트 해 쟁탈전'

천연자원이 극도로 미비한 발트3국에서 전력공급원을 확충하는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 특히 전력의 80% 이상을 공급하던 원자력발전소를 주변 국가들의 압력에 못 이겨 폐쇄해야 했던 리투아니아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그런 배경에서 폴란드, 발트3국, 핀란드 등 발트해안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은 러시아로의 에너지 종속성을 탈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하단 박스 참조>

발트 해를 가운데 둔 에너지 분쟁에 불을 지핀 것은 2005년 9월 8일 러시아가 독일이 공동으로 핀란드와 인접한 러시아의 도시 비보르그(Vyborg)에서 발트 해를 통과해 바로 독일로 연결하는 북유럽가스관(North European Gas Pipeline) 건설계획을 본격적으로 착수하면서부터이다.

독일과 러시아가 추진하고 있는 이 발트 해 지하 가스파이프 매설공사는 총 40억 유로가 투자될 어마어마한 공사이다. 러시아의 가즈프롬(Gazprom)이 이 프로젝트의 51%의 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독일의 바스프(BASF)와 에온(E.ON)사가 각각 24.5%씩 지분를 소유한 사상 최대 규모의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2010년에 완공 예정으로 우크라이나나 벨로루시 같은 문제의 소지가 많은 나라들을 지나지 않고 바로 독일과 서유럽으로 가스를 공급할 수 있다.

북유럽 가스관 노선도.
북유럽 가스관 노선도. ⓒ <발틱타임스>
에스토니아 언론 <에스티 패에바레흐트> 2005년 12월 17일자에 실린 만평. 슈뢰더와 푸틴이 가스와 관련된 춤을 선보이고 있다.
에스토니아 언론 <에스티 패에바레흐트> 2005년 12월 17일자에 실린 만평. 슈뢰더와 푸틴이 가스와 관련된 춤을 선보이고 있다.
그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에서 도난당하는 가스의 액수가 연간 수백만 유로에 이른다고 주장해왔는데 이 북유럽 가스관을 통해 이들 나라를 거치지 않고 가즈프롬이 유럽으로 수출하는 양의 3분의 1을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독일과의 연결공사가 끝나면 네덜란드와 영국까지 확장된다.

그러나 정작 폴란드나 발트3국 같은 발트 해 인접 국가들은 그 가스관이 자기들의 앞바다 밑바닥을 통과해 지나갈 뿐 자신들 영토를 통과하지 않기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들 나라들은 자신들을 거치지 않고 가스관을 건설했을 때 비용도 훨씬 더 많이 든다는 점을 들어, "경제적 가치보다 정치적 실리를 챙기려는 수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러시아-독일의 '에너지동맹', 저의가 뭔가

라트비아 바이라 비체-프레이베르가 대통령은 <발틱 타임스(Baltic Times)>와 가진 인터뷰(2005.9.15)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을 정도다.

"이 프로젝트는 지금까지 운영해왔던 방법보다 3분의 1이상의 비용이 더 든다. 그리고 주변 국가들에 건설될 가스보관시설에 직접적인 연결이 불가능하다는 점 등 기술적인 문제로 보아 효용성도 떨어진다. 경제적인 가치가 적다면 분명 이것은 정치적 저의가 있는 것이다. 분명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주요 에너지원이, 다른 다수의 유럽연합 국가들에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는 사실은 간과한 채 독일이 러시아와 함께 모든 통솔권을 가질 것이라는 생각만 염두에 둔 것이다. 이는 유럽연합의 결속을 무시한 처사다."

리투아니아 독립의 영웅이자 초대 국무총리였던 비타우타스 란스베르기스 역시 동일매체에서 "독일과 러시아가 가스관 공동건설계획을 추진하는 것은 현대사에 새로이 부상하는 또 다른 형태의 러시아와 독일의 '에너지 동맹'"이라며 "이것은 유럽의 정치지도를 바꿀 수 있는 사건이지만 애석하게 지금 유럽은 그 사업에 돈을 대려고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환경 문제도 지적되고 있다. 발트 해는 환경 차원에서 여전히 주의가 필요한 지역이다. 러시아가 2차대전 중에 사용한 폭탄과 화학무기들이 여전히 발트 해 바닥에 매장돼 있고 아직 정확한 위치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대부분이 화학무기이기 때문에 제대로 처리되지 않으면 큰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많다는 것.

러시아와 독일이 추진중인 북유럽가스관이 시작되는 러시아의 비보르그.
러시아와 독일이 추진중인 북유럽가스관이 시작되는 러시아의 비보르그. ⓒ 서진석
<발틱 타임스> 11월 3일자는 "리투아니아의 발다스 아담쿠스 대통령은 2005년 10월 말 독일 방문 시 국가의 에너지 공급을 보장하는 일은 주권적인 특권이라 말한 적이 있는 슈뢰더가 파이프라인 건설 프로젝트 수립 시 폴란드와 발트3국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직접적으로 표현했다"고 보도했다. 발다스 아담쿠스는 프랑스 신문 <르 피가로(le Figaro)>와의 인터뷰에서도 "슈뢰더는 주변 국가들에 대한 무관심을 공식적으로 드러내 보였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 후 북유럽가스관을 둘러싼 논쟁은 국가 간 감정싸움으로 치닫는 성격을 보이기 시작했다.

발트3국의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발트총회(Baltic Assembly) 역시 이 프로젝트에 발트3국의 의사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것에 대한 반감을 표했다. 이들은 11월말 탈린에서 열린 24차 회담에서 독일과 러시아가 추진하고 있는 북유럽 가스관의 위험성에 대해 의견을 같이 하고 프로젝트 추진 이전에 환경관계자들과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은데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특히 2차 대전 중 발트 해 바닥에 가라앉은 화학무기들을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심각한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슈뢰더-푸틴 조약은 제2의 '히틀러-스탈린 조약'"

에스토니아 언론 <포스티메스(Postimees)>는 독일과 러시아의 북유럽가스관 추진을 비판하는 만평을 실었다. 1월 3일자에 실린 만평. 왼쪽 곰이 묻는다. "오. 조종사 놀이하는 거야? 무슨 기계야?" "오늘은 우크라이나, 내일을 유럽을 시도해 보려고."
에스토니아 언론 <포스티메스(Postimees)>는 독일과 러시아의 북유럽가스관 추진을 비판하는 만평을 실었다. 1월 3일자에 실린 만평. 왼쪽 곰이 묻는다. "오. 조종사 놀이하는 거야? 무슨 기계야?" "오늘은 우크라이나, 내일을 유럽을 시도해 보려고."
발트3국과 폴란드는 북유럽가스관의 청사진이 세상에 나온 직후부터 러시아가 북유럽가스관을 에너지 봉쇄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발트 3국 통과를 요구해왔다. 이 과정에서 이 협정을 1939년 나치 독일과 스탈린이 동유럽과 발트3국을 나누어 가진 독소불가침조약에 빗대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당시 폴란드 대통령이던 알렉산드르 크바스니엡스키 대통령도 폴란드 라디오 제트(Radio Zet)를 통해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다.

이와 관련 라트비아 주재 러시아 대사인 빅토르 칼류즈니는 라트비아에서 발행되는 러시아어 신문 <텔레그라프> 인터뷰에서 "라트비아 정치인들은 그 '가스관 건설'이라는 배에 함께 올라탈 결정적인 기회를 놓쳤다"며 " 내가 라트비아에 처음 부임했을 당시(2004년 11월 16일), 라트비아 정치인들에게도 독일 러시아간 가스관 프로젝트에 참가할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말해 라트비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엠시스는 러시아 대사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전혀 없다고 발표했다.

독일 내부에서도 그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독일의 정치비평가인이자 대 러시아 관계 전문가인 로날드 괴츠(Roland Goetz)는 <발틱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독일과 러시아는 폴란드와 발트3국의 위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지난해 12월 13일 퇴임한 독일 총리 슈뢰더가 러-독 북유럽가스관 사업의 감독위 의장직을 맡으면서 이 사업에 대한 비판이 더 거세어지고 있다. 독일은 현재 가즈프롬에서 가장 많은 주식을 소유하고 있고, 그 크기는 발트3국 세 나라의 국민총생산을 합친 것을 능가한다.

세계사적으로도 발트 해의 무역활동이 시작되고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비교적 최근까지도 발트 해의 주도권은 거의 러시아와 독일이 잡고 있었다. 이제 무역이나 경제활동이 아닌 에너지를 무기로 발트 해가 그들의 무대로 또 변해버릴 수도 있다는 경고가 커지고 있다.

핀란드와 발트3국, 에너지 '사면초가'

▲ 핀란드와 발트3국을 잇는 에스트링크 케이블 지도.
ⓒABB 홈페이지

발트3국과 주변지역은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에너지 대란에 우려로 리투아니아 내 원자력발전소 건설계획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는 1986년 폭발된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발전소와 동일한 운행방식인 RBMK-1500(흑연감속 경수냉각비등수형) 발전소라는 이유로, 유럽연합으로부터 폐쇄압력을 받았던 원전. 그런데 이제 와서 원전이 위치한 이그날리나 시가 차기 원자력 발전소 건설의 후보도시로 거론되고 있는 것. 이미 이그날리나에는 원자력 발전소를 운영하던 기반사업과 숙련된 노동력이 있다는 게 그 이유다. 폴란드와 에스토니아 정부의 관심이 지대하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이그날리나 원자력발전소의 폐쇄 이후를 대비하여 또 다른 원전 건설을 추진할 계획을 공식화하여 현재 전 세계로부터 투자자들을 기다리고 있으나 유럽연합 에너지위원회는 20억 불이 들어갈 이 프로젝트에 정부차원의 참여는 안 된다고 권고하고 있다.

이에 앞서 에스토니아와 핀란드를 잇는 전력케이블 설치공사도 발트3국에서 생산될 전력을 북유럽에 효과적으로 공급한다는 계획으로 2005년 4월 29일부터 시작됐다. 에스트링크(Estlink)라는 이름의 이 전력케이블은 발트3국과 북유럽을 연결하는 최초의 연결조직망으로, 총 1억천만 유로가 투입될 예정이다.

이 케이블공사는 에스토니아의 전력공사 Eesti Energia, 라트비아의 Latvenergo, 리투아니아의 Lietuvos Energija 등 발트3국의 전력공사와 핀란드의 두 업체가 공동 참여한 노르딕 에너지 링크(Nordic Energy Link) 프로젝트가 추진하고 있다.

2006년 후반기 완공 목표인 에스트링크의 목적은 북유럽-발트 간 전력공급의 원활화와 미래에 발생할지 모르는 전력공급불균형 문제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발트3국과 핀란드는 이러한 것들이 러시아 에너지에 종속된 주변 국가들의 에너지 공급 상황을 호전시키리라는 희망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러시아-독일 간 북유럽가스관 건설 발표로 심각한 장애에 부딪힌 상태다. 12월 16일 러시아 비보르크와 비소츠크 항구의 관리부장은 에스토니아 핀란드 간 전력케이블이 러시아-독일 간 북유럽가스관 건설에 장애를 줄 것이라 발표했다. 그 두 관이 만나는 자리에 엄청난 자기장이 발생하게 돼 핀란드만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것. 발트3국 입장에서는 에너지 자급력 확보방안이 막막하기만 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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