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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백제국
대백제국 ⓒ 구자일
484년 청녕천황이 죽은 뒤에 왜무왕을 찬탈한 일본의 현종천황이 고구려와 내통하고 대마도를 통한 중국과 고구려 진출 왜국 군사들의 보급을 방해하였다. 488년 백제 모도대왕은 고구려와 내통한 대마도를 토벌하고 일본으로 가서 현종천황을 죽이고, 스스로 일본의 인현천황이 되었는데 백제에서는 동성대왕이라고 하였다.

이때 백제에는 모도대왕의 손자인 모대대왕이 즉위하였다. 한편 465년부터 시작된 중국 산동반도 경략은 송나라가 망하여 남제국이 서는 혼란기에 더욱 활성화되고, 489년 모대대왕은 수십만의 북위 군대의 두 차례 대 공략을 막아내서 산동반도를 지켜냈다는 국서를 제나라에 보낸다.


개로대왕비 반풍황녀는 해외 원정중인 왜무왕, 무녕대왕을 대리하여 일본의 조정을 맡았고, 평군시비(平群志毗)에게 정사를 위탁하였다. 이때 평군시비의 부친인 평군진조숙녜(平群眞鳥宿禰)는 백제에서 모도대왕을 수행하였고 평군시비(平群志毗)는 일본에서 무녕대왕이 사랑하던 오도히메인 난파소야왕(難波小野王)을 자기 집에 데리고 있었다.

한편 각자궁에 기탁해 있던 이치베오시와(市邊忍鹵王)의 작은 아들이자, 백제 모도대왕의 동생인 홍계(弘計)가 무녕대왕이 사랑하는 오도히메(小野王)를 가로채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평군시비를 습격하여 죽이고, 오도히메를 차지하였다. 이는 왜왕위의 찬탈이나 같다.

반풍천황(~483)이 483년 11월에 죽고, 홍계가 484년에 현종천황(顯宗天皇451~488)으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무녕대왕의 비였던 오도히메, 난파소야왕을 황후로 세웠다. 현종천황은 난파소야왕에게서 추촌(麁寸), 즉 무열천황을 낳았고, 무녕대왕과 난파소야왕이 낳은 어린 곡녀(哭女)를 범하여 포전녀(飽田女)를 낳았다.

현종천황은 즉위 3년 486년에, 가야신인 고황산령(高皇山靈)에게 제사드렸는데, 그가 왜왕으로 즉위하는 데에는 왜국에 뿌리박았던 가야인들이 협조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고구려계 윤공천황의 증손녀인 황후 난파왕이 모종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487년에 현종천황은 고구려와 내통하였다. 임나의 기대반숙녜(紀大磐宿禰)는 451년 개로대왕의 구주 정벌 때에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었지만, 구주 임나에서 제멋대로 하였고, 그가 임나 구주에서 스스로 신성(神聖)이라 칭하고 독립을 꿈꾸면서 고구려와 통했다.

또 임나 대마도의 좌로(佐魯) 등을 이용해서 백제 장수 적막이해(適莫爾解)를 고구려 땅에 유인하여 죽였다. 좌로(佐魯)는 대마도 북도의 좌호천(佐護川)에 있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기대반숙녜(紀大磐宿禰)는 구주 동쪽 좌백항(佐伯港)에 대산성(帶山城)을 쌓고 길을 막았다. 그래서 식량을 운반하는 항구가 끊겨 원정나간 군사들을 기아에 빠지게 하였다. 이 시기에 백제 군사는 중국 산동반도를 공략중이었다.

백제대왕인 모도대왕이 대노하여 고이해(古爾解)와 막고해(莫古解)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기대반숙녜는 임나에서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백제국은 대마도 임나의 좌로(佐魯) 등 300명을 죽였다.

488년 모도대왕은 백제왕위를 손자인 모대왕(牟大王)에게 물려주고 일본으로 돌아가서 현종천황(顯宗天皇)을 죽였다. 그래서 현종천황 고분은 고작 21m x 21m의 네모난 고분이고, 그 안에 석실이 있다. 당시 죄악으로 인하여 크게 묘를 만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인현천황은 일본에 건너가 있으면서 실제적인 백제대왕이었기에 백제에서 동성대왕(東城大王)이라 칭한 것으로 고려된다. 백제의 동성(東城)은 일본인 것이다.

인현천황이 일본 천황으로 즉위하니 현종천황의 황후인 난파소야왕도 궁에서 축출되었다.<일본서기/인현천황기>에 기구하게 살다가 한탄에 빠진 여자의 노래 가사로 난파소야왕의 운명이 기록되었다.

제목이 어머니모세(於慕尼慕是) 아레니모세(阿例尼慕是)라는 한탄의 노래다. 그 뜻은 어머니의 남편이 내 남편인데 떠났다는 슬픈 노래였다. 그 사연은 한백수랑한(韓白水郞暵=무녕대왕)이라는 남자가 난파 즉어녀(鯽魚女=난파소야왕)와 살다가 곡녀(哭女)를 낳고 떠났고, 산저(山杵=현종천왕)라는 남자가 즉어녀(난파소야왕)와 살며 추촌(麁寸)을 낳았다. 이후에 산저(=현종)는 곡녀(哭女=무녕대왕의 딸)도 통하여 포전녀(飽田女)를 낳았다.

이후 산저의 아들 추촌(麁寸=무열천황)은 포전녀와 살았다. 그후 추촌은 고구려로 가는 사자 편에 고구려로 떠나버렸다. 488년 현종천황이 고구려와 내통하여서 형인 인현천황에게 제거당하자, 현종의 황비인 난파소야왕(461~498)은 자살을 했다고 했는데, 무녕대왕의 딸인 곡녀 입장에서 산저(현종천황)가 어머니에게도 남편, 나에게도 남편이고, 포전녀의 입장에서 추촌이 아버지 족보로는 형인데 어머니 족보로는 삼촌이고 함께 살았으니 남편인데 버리고 떠났다고 한탄한 것이다.

498년까지 인현천황은 일본에서 고구려계를 제거하고, 옛 충신인 좌백부(佐伯部)를 찾아서 구주 오오이타현(大分縣) 좌백항(佐伯港)에 보내어 구주도 안정되었다. 모도대왕(牟都大王)은 483년에 한산성을 순무했는데, 대동강 평양에 있던 한산성이다. 479년에 <일본서기>의 고구려 공략 기록에 따른 성과로 보인다.

게다가 황하 하구 유역과 산동반도, 양자강 북쪽 회대 지방에 상당한 연합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개로대왕이 빼앗겨 고구려가 차지했던 평양성, 즉 한산성에 대한 무력 탈환이 충분히 가능하였다. 중국 동부 지역을 다스리려면 무엇보다도 강력한 해군력이 필요한데 동성대왕은 그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무렵에 백제는 중국 땅에서 놀라운 활약이 있었다. 458년 개로대왕은 이미 중국에 열한명의 장군을 파견하여 중국 땅을 경영하였다. 458년에 개로대왕이 중국에 보낸 백제 장군은 관군장군우현왕 여기(餘紀), 정로장군좌현왕 여곤(餘昆)(일본 청녕천황이 되었다), 정로장군 여훈(餘暈), 보국장군 여도(餘都)(백제 모도대왕이 되었다.), 보국장군 여예(餘乂), 룡양장군 목금(沐衿), 룡양장군 여작(餘爵), 녕삭장군 여류(餘流), 녕삭장군 미귀(麋貴), 건무장군 우서(于西), 건무장군 여루(餘婁) 등 11명이다.

이들 11명의 장군이 중국 땅 어디에 있었는지 알고 싶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464년 경부터 송나라가 말기적 증세를 보였고, 각 지방에서 송나라 장수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회수(淮水) 북쪽 땅을 잃고서 찾지 못했으며, 그 땅은 북위(北魏)에 일부 흡수되었다.

그런데 산동반도의 뿌리 부분인 청주(靑州)와 산동반도 남쪽 경계 동양성(東陽城)에서 주로 전투가 이루어지며, 그로부터 동쪽인 청도시(靑島市) 동쪽은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즉 문등군, 동래군, 성양군 등 해안과 도서(島嶼) 지역에서 위에 적힌 11명의 백제 장수들이 나와서 경영하였을 것으로 고려된다.

또한 490년 모대대왕이 남제에 보낸 국서 내용에는 465년에서 471년 사이에 백제의 3장군을 추가로 중국에 내보냈다. 송나라가 위나라에 잃은 회북을 공격하러 간 것이다. 건위장군、광양태수、겸 장사신 고달(高達), 건위장군、조선태수、겸 사마신 양무(楊茂) 선위장군、겸 참군신 회매(會邁) 등이 태시(465~471년) 중에 이미 송나라에 건너가 있었다.

개로대왕은 471년에 관군장군 불사후 여례(餘禮)와 용양장군 대방태수 장무(張茂)를 북위국에 사자로 보내서 고구려 공격을 제안하였다. 황해도 봉산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 고분은 468년에 만들어졌는데, 위에 나온 대방태수 장무의 부형(父兄)일 것이다. 이들이 중국에서 차지했던 지명은 488년과 495년에 중국 제나라(南齊)에 보낸 백제 모대대왕(牟大大王)의 국서에서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백제 모대대왕 때인 488년 겨울에 북위국(北魏國)이 산동반도의 백제를 쳤다. 산동반도의 백제군은 북위국의 수십만 대병의 침략에 맞서 싸워 이겨서 산동반도를 수호하였다. 모대대왕은 북위군을 격파하고나서 승전한 백제 장수들을 승진시켰다. <삼국사기>에는 동성대왕 10년 488년에 위나라가 백제를 치러오다가 패하였다고 짧게 기록하였다. <제서(齊書)>에도 이 부분의 백제 기록이 파훼되었는데 남아있는 것만 보면 아래와 같다.

다음은 모대대왕이 남제국에 올린 국서 내용이다.

“노고에 보상하여 이름을 길이남긴다. 영삭장군신 저근(姐瑾) 등 4인이 충효를 다하여 국난을 막았다.... 이 4인의 장수에 대하여 임시책명을 정식으로 황명을 내려 책명해 주기를 바랍니다. 녕삭장군、면중왕 저근(姐瑾)을 관군장군、도장군、도한왕으로.건위장군 팔중후 여고(餘古)를,,,녕삭장군, 아착왕으로.건위장군 여력(餘歷)을,,,룡양장군, 매로왕으로.광무장군 여고(餘固)를...건위장군, 불사후로 책명을 바랍니다.”

이들 4명은 488년에,,,산동반도에 있다가 서북에서 쳐들어오는 북위의 침략을 물리친 백제 장수들이었다.

490년에 모대대왕은 여기에 더하여 3장군을 산동반도에 보냈다.

“행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신 고달(高達), 행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신 양무(楊茂)
행선위장군, 겸 참군신 회매(會邁) 등이 태시(465~471년) 중에 송나라에서 봉사하였고 지금은 나의 신하로 봉사중이다.(比使宋朝,今任臣使) 그러한 선례에 따라서 이 장군들에게 새로 제나라의 책명을 바란다. 광양태수 고달(高達)은 용양장군, 대방태수로, 조선태수 양무(楊茂)는 건위장군, 광릉태수로, 참군 회매(會邁)는 광무장군, 청하태수로.”

남제 무황제(武皇帝)는 모대왕이 열거하고 원하는대로 백제의 세 장군들에게 군호를 내리고 중국의 태수로 임명하고, 모대대왕을 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봉하였다.
(詔可,竝賜軍號,除太守.為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

그리고 사자를 백제에 파견하여 모대대왕에게 조부 모도대왕을 세습하여 백제왕이라는 책명을 주고 인장과 인수, 옥부, 동부, 호부, 죽부 등 여러가지 선물을 하였다. (여기서 모도대왕은 망亡자가 없으니 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는 일본에 가서 인현천황이 되었다.)

한편 <남제서>에는 이때 490년에 다시 북위 수십만이 2차로 백제를 공략했으나 모대왕이 보낸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우나(木干那) 등 장군이 부대를 이끌고 북위군을 습격하여 대파하였다고 기록했다.
(是歲,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 率衆 襲擊虜軍,大破之.)

495년에 모대대왕이 다시 보낸 국서에서는

“490년 경오년에, 북위 선비 오랑캐가 뉘우치지 못하고 다시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사법명(沙法名) 등에게 되치도록 하였다. 해일처럼 쓸어버리고 달려 추격하여 베어버리니 시체가 들판을 붉게 만들었다. 마땅히 상을 주어야 한다.
사법명(沙法名)은 정로장군, 매라왕. 찬수류(贊首流)는 안국장군, 벽중왕. 해례곤(解禮昆)은 무위장군, 불중후. 목우나(木干那)는 광위장군, 면중후.

그리고 다시 파견한 장군은 룡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신 모유(慕遺). 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신 왕무(王茂). 진무장군, 조선태수 겸 참군신 장색(張塞). 양무장군, 진명(陳明). 등 4명인데 이들을 정식으로 책명해 달라는 모대대왕의 주청을 명황제(明皇帝)는 다 들어주었다.”

백제가 중국에 진출했을 때 최초로 중국에 생겨나고 최후에 사라진 백제 진평군(晉平郡)은 하북성 안평현(安平縣)이다. 백제 요서군(遼西郡)은 하북성 진황도시 무령현(撫寧縣) 영지성(令支城)에 있었다. 385년에 백제 건절장군 여암(餘巖)이 취하였으나 그해 말에 후연의 모용농에게 빼앗겼다. 그런데 개로대왕 때에 다시 찾은 것이다.

광릉태수(廣陵太守)의 광릉군은 산동성 아래 회하(淮河) 남쪽 회계산(淮稽山) 유역이다. 청하태수(淸河太守)의 청하군은 제나라가 있던 곳으로 하북성 형수시 남쪽 황하 주변의 청하성이다. 광양태수(廣陽太守)는 북경시였다.

성양태수(城陽太守)의 성양은 산동성 산동반도 남동해안 청도시(靑島市)에 있었다. 동청주(東靑州)라고도 했는데 백제 위덕대왕을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라고 했으니 오래도록 보전하였던 것이다. 조선태수(朝鮮太守)는 하북성 진황도시 비여현(肥如縣)에 있었다. 하북성 노룡현의 30리 북쪽이다. 수나라 때 대방태수(帶方太守)는 하북성 청룡현(靑龍縣)에 있었다.

위에 적힌 백제 태수가 가장 최전선이라고 보면 그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산동반도에서만 북청주(北靑州) 7현, 제남군(齊南郡) 5현, 낙안군(樂安郡) 3현, 고밀군(高密郡) 6현, 평창군(平昌郡) 5현, 북해군(北海郡) 6현, 동래군(東萊郡) 7현, 동모군(東牟郡) 1현, 장광군(長廣郡) 4현 등 산동의 9군 44현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따라서 백제는 중국에 최소한 15군 이상 자치군을 두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중국에 분출된 백제의 힘은 일본을 지배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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