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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장승 봉축함 뚜껑
아장승 봉축함 뚜껑 ⓒ 토지박물관
동진 태원병자(376년) 7년(382년)(晉太元丙子 七年)
국견내성의 초문사(=절이름)(國甄內城 肖門寺)
시방금륜광선봉선하고(十方金輪廣善 唪)
동강궁(=절이름) 예사를 임명받은(禪冊東罡宮禮司)
아장승이 열반하여 봉축함(阿丈僧 涅槃築封)


따라서 이를 아장승 축봉문(阿丈僧築封文)이라고 부른다. 그 안에는 점토판에 글을 써서 구운 12장의 아장승 일대기가 들어있다.

내용인즉슨
(1) 광선 금륜 아장승은(廣善金輪)
(2) 국가의 성인이다(國之聖物)
아장승 축봉문 본문 첫장
아장승 축봉문 본문 첫장 ⓒ 토지박물관
(3) 진불조(아장승의 경칭)가 동국에 성혈을 열고, 고구려 오부의 중생을 끌어안아 불법을 전하고 불경을 가르쳤다. 천하만물 생명의 태어남이 다 존귀하니 모든 생명이 차별이 없다고 하시고, 세상만사에 정성을 다하여 살라고 가르쳤으니 (아장승은) 중생들이 정성을 다하여 불경을 읽도록 만들었다.
(4)325년(미천왕 26년) 나라에 불법이 성하여, 부처를 숭배하는 중생들을 모아 불도를 크게 펼쳐 가는데 (미천왕이) 아장도에게 불리의 대가 누구인지 묻고, 초빙하도록 하니 (아장도는) 즉시로 왕명을 받들어서 경, 률, 론(經律論)에 정통했다는 법사를 찾아갔다. 중국의 고승 도안(道安)이 동쪽으로 산길을 넘어와 왕(고국원왕341-370)을 배알했다.
(5)왕이 그 영광스런 소식을 듣고, 도성 밖으로 마중 나와, 고구려국 태장법사로 봉하고, 두 절을 주지하게 하였다. 궁성 동쪽 대비에서 (도안법사가) 하루에 천게(千偈)를 외우니, 대략 26000자인데 스스로 뜻을 깨우친다. 왕이 공봉하여 대하니 (도안이) 불도를 가르쳤다.
(6) 불교를 따르는 이들은 부처가 동방으로 왔다고 하였다. 이 나라방(方)에 큰일을 하러 비범한 분이 오셨다고도 하였다. 세상을 태평하게 하고 불법을 펴고 불경책의 뜻을 밝히러 오셨다고 하였다. 삼공(三空)과 이제(二諦), 무상(無相)을 가르쳤다.
(7)영귀계송(咏貴偈頌)의 의례를 가르쳤다. 왕은 따로 (궁내에) 왕사를 지어서 불법을 크게 하고 세상을 맑게 하였다. 그러니 궁극적인 원만의 도까지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고구려에 불자가 많아지니 도안은 책을 번역(인도어를 한어로 번역)하여 다시 펴내서, 고구려인들이 더욱 불도에 통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불(理佛)>과
(8)<경론(經論)>과 <동기비오(洞其秘奧)>를 알게 하고, (도안은) 진불이 어떻게 실현될지를 가르쳐서 왕을 기쁘게 하였다. 도안은 (고구려 전국의) 여러 읍을 다니며 불법을 전하였고, 중생들이 무릎 꿇고 들었는데 말씀마다 영험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머리에 광채가 나는 기적이 있었다. 완전한 도(圓道)로서 인과의 원리를 가르쳤다. 왕이 도안의 덕을 칭찬하였다. 왕이
(9)불지를 새로 만들어 내성에 초문사를 짓고 불경과 불법을 모든 후세 중생에 전하도록 하여 마침내 정과(正果)를 얻었다. (임금이) 백성을 주재하지 않는 무주민의 경지에 들었으니 (왕은) 불문이 따로 없는 무불문의 경지에 이르렀다. 왕은 불경을 만들어 펴내는 공적을 쌓으며 성인의 행적을 따르고 악을 멸하고 오로지 세상을 위하여 멸도(滅度)하고 무리들을 구하였다.
(10) 중, 백 이론까지 가르치고 (도안이) 중국으로 돌아가서 중국왕을 만났는데, 동국 고구려에 (부처님의) 신혈을 세웠으므로, 삼과(三果)에 오른 것으로 인정되었다. 도안이 진단(중국)에 불법을 펼치며 말하기를 동쪽나라 고구려왕과 백성은 대반야경으로 몽속을 깨우치고 씻어냈다고 하였다. 처음에(도안이 고구려에 오기 전에)
(11) 고국원왕(331-370)은 내성에도 불사를 만들고 절(宮)을 동록에 두었다. (동강궁예사) 왕은 불송이 크고 염불 소리도 크면 (책의 심오한) 뜻이 마침내 스스로 나타나서 불도를 깨닫는다고 듣고, 왕과 백성이 한마음으로 염불하면 석가와 관음(대비)이 나타난다고 듣고 처음 불문에 든 왕도 구도하면 정을 얻고 무사에 든다고 들었다.
(12) 부처의 나라 고구려는 마침내 선계에 이르러서 (외도에 빠지지 않고) 오로지 선의만 행하여 동융왕(소수림왕의 별명?)이 하늘에서 세상으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중생 모두에게 부처가 있다 하고, 대반야경야뇩타불삼막삼보리(무상의 완전한 깨달음)는 해와 달처럼 위대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아장승 축봉문의 내용은 위와 같이 대충 해석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아장승, 즉 아도화상(阿道和尙)은 244년경에 위나라에서 고구려에 사자로 왔던 아굴마(我堀摩)와 고구려 여인 고도녕(高道寧) 사이에 태어났다.

247년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으로 고구려 국도인 불내성이 파괴된 이후에, 아도는 5세이던 249년에 어머니의 명령으로 고구려의 절에 출가하였다. 어머니 고도녕이라는 이름자로서 역시 출가자로 추정된다.

아도는 16세에 위(魏)나라에 가서 부친을 만나고, 현창법사에게 유학하고 19세인 263년부터 284년까지 신라에서 처음으로 포교하여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가져다가 구미의 태조산에 도리사를 세우고, 경주의 흥륜사를 세우고 284년에 미추왕이 서거하여 죽이려고 하니 가야국의 지리산 남쪽으로 도망에 가서 천봉산 대원사를 창건하고, 이후 고구려에 돌아가서 창불했다. 추정하면 360년~364년 사이에 중국의 3대 고승이며 동방성인으로 일컬어지는 도안(道安)을 고구려에 초빙하였고, 백제도 포교하여 381년 백제 땅 강화에 전등사를 세우고 당시 진종사(眞宗寺)라고 하였다. 백제에는 전등사 외에도 갑사, 계룡산 천진보탑을 세웠고 가야에는 순천 선암사, 나주 죽림사, 광주 대원사, 해남 대흥사 부산 마하사 신라에는 구미 도리사, 김천 직지사, 거진 건봉사, 충주 신륵사, 경주 불국 사, 흥륜사, 군위군 삼존석굴 등이 아도의 행적과 관련된다.

아도화상은 신라, 가야, 백제, 고구려 사국에 불교사원을 세운 것이고, 신라에서는 구미의 태조산에 도리사를 지어서 태조선원이라는 이름을 남겼으니 가히 이 땅의 진불조(眞佛祖)라고 할 수 있다. 아도화상은 138년을 살고 382년에 입적하였다.

위 내용은 무척 중요한 우리 역사 기록이다. 그런데 새김 글씨체는 초등학생 솜씨만도 못하여 많은 한자 자구에 결함이 있으니 전체 488 글자 중 무려 66자가 틀려서 당시 고구려 고승의 실수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즉 아장승 축봉문이 당시 고승이 만든 진품일 가능성이 적어 보인다.

그런데 내용을 요약하면
1. 고구려에 240년대에 출생한 아장승이 고구려에서 불법을 전파하여 고구려 불교의 조사로 추앙되었고
2. 고구려 미천왕이 불법을 믿고 고승의 초빙을 원하였고
3. 고국원왕 때인 360년에 중국 승 도안이 입국하여 설법을 하였고
4. 도안은 중국에서보다 먼저 고구려에서 범어 불경을 한자로 번역하였고
5. 아장승이 신라와 백제에 포교하여서 371년경에 강화도 전등사(당시 진종사)를 창건한 것이 전등사의 전설이 아니라 사실로 판명된다.

즉, 이런 역사적이고 종교적으로 심오한 내용을 현대에서 창작해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기 어렵다. 훈민정음 원본은 아니더라도 사본을 보고서도, 세종대왕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저 사진 속의 아장승 축봉문은 우리에게 3세기, 4세기 고구려, 백제의 진실을 전해주는 것이 아닐까?

이제 독자들이 판단해야 한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저 자료를 절대로 사료로 인정하지 않고 그냥 버리려고 한다. 그럼 고구려의 불교 전래는 소수림왕인가 동천왕 때인가? 백제의 불교전래는 동진의 마라난타인가, 고구려의 아장승인가? 바로 독자 여러분들이 정답을 써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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