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광개토왕 왕자 윤공천황/연종열 화백작
광개토왕 왕자 윤공천황/연종열 화백작 ⓒ 연종열
396년 침류대왕의 양위로 인덕천황이 즉위하였으나 400년 고구려 광개토호태왕의 공격으로 대마도를 빼앗겼다. 404년 인덕천황은 복수하기 위해 고구려 본토와 신라를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구주를 임나연정에 빼앗긴다.

406년경 고구려에서 구주에 도래한 광개토호태왕의 왕자 윤공천황의 대대적 정벌에 의하여
419년 인덕천황은 사국섬에서 옥새를 받치고 전사한다. 이후 인덕천황의 아들 이중천황이 즉위하였으나 실권이 없었고, 침류대왕의 아들 왜찬왕, 반정천황이 대화를 다스렸다.

반정천황은 사국섬을 탈환하여 찬기국조도 되고 425년, 430년에 송나라에 사자를 보냈다. 431년 겨울에 윤공천황이 오사카에 입성하여 왜진왕이 되어 이중천황과 백제 전지대왕을 살해한다. 윤공천황은 438년에 송나라에 왜국과 백제, 신라를 다스리는 6국제군사겸 안동대장군을 청하였으나 송나라는 안동장군 왜국왕으로 격하하였다. 패전한 반정천황의 백제 세력은 북쪽 해안 궁진시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퇴각하게 되니 일본은 남북 2국이 된다.

-------------------------------------------------------------------
396년에 즉위한 오호사자키(大雀命), 인덕천황(仁德天皇337~419)은 응신천황 근구수대왕의 서장자로서 396년에 동생 침류대왕, 우치천황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백제의 중국 전쟁과 고구려 전쟁에 동원된 일본 국민들을 위해서 인덕천황은 3년간 과세를 면제하는 선정을 보였으나, 399년에는 다시 신라와의 전쟁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참전으로 인하여 400년에는 신라에서 패퇴하고 대마도를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그 후 구주마저도 고구려에 항복하여 임나연정에 속하게 되니 인덕천황은 최대 위기를 맞았다.

이중천황은 432년까지 살았지만 인덕천황 사후인 419년부터 424년까지 5년간 대화를 다스렸다. 그의 업적은 일본에서 가장 큰 고분인 인덕천황릉을 만든 것이며 전장(全長) 480m에 달한다. 그러나 이중천황은 즉위 당시에 황태자로서 자기 아들이 아닌 반정천황을 세워서 자신이 실권이 없는 것을 나타냈다. 대신에 평군목도숙녜(平群木菟宿禰)와 소하만치숙녜(蘇賀滿治宿禰), 물부이거불 대련(物部伊莒弗大連), 원대사주(圓大使主) 등이 조정의 국정을 맡아하였다. 424년경에 윤공천황과 전쟁을 치르다가 검도태자왕(劍刀太子王)에게 이중천황의 황후가 죽었다. 검도태자왕(劍刀太子王)은 윤공천황의 태자인 목리경태자(木梨輕太子414~454)다.

이후 윤공천황은 이중천황에게 고구려 여자를 황후로 주었다. <이중천황기>에는 황비 嚥?黑媛)이라고 했는데 구로히메(黑媛400~444)는 고구려의 여인이다. 구려히메(句麗媛)를 비슷한 발음의 구로히메(黑媛)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이미 인덕천황에게도 구려의 여자를 보내서 후비로 삼게 하여서 역시 흑원(黑媛)(385~429)이라고 불렀는데 두 고구려 여인은 나이가 다르다(이제까지 흑원은 흑발미인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고구려 여인이다).

424년부터는 이중천황이 은거하고 왜찬왕 반정천황이 직접 대화로 와서 시리궁(柴籬宮)에서 다스렸다. 425년 왜찬왕은 송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구주의 고구려가 방해하였다(응신 37년). 427년에는 전지대왕이 누이 동생인 도노랑(都怒郞)을 보내어 왜찬왕의 황부인으로 세우게 되었다.

마침내 고구려 고진왕자(=윤공천황)의 일본 대정벌이 있었다. 430년 왜찬왕이 보낸 송나라 사자는 돌아오다가 구주에 붙들려서 송나라가 보낸 4여인 중에 하나를 구주에 남기고 나머지 세 여자는 대화에 진입한 윤공천황에게 받쳤다.

윤공천황(允恭天皇393~453)은 고구려에서 구주에 온지 20여년 만에 마침내 대화에 입성하였다. 431년 겨울에 오사카를 점령하여 왜찬왕을 북부 해안 지방으로 몰아내고 왜진왕(倭珍王)이자 윤공천황이 된 것이다.

윤공천황의 침입으로 이중천황이 나라현 갈성(葛城) 와카사쿠라궁(若櫻宮)에서 432년 1월에 죽었다. 꼭 한 달 후 432년 2월에는 갈성의 치은사(置恩寺)에 출가해 있던 백제 전지대왕도 살해당했다. 그는 윤공천황 황후의 오빠였다. 이중천황의 능은 360m에 달하는 전방후원고분이다. 전지대왕릉인 전지총은 60m의 전방후원고분이다.

432년, 왜찬왕의 백제 세력은 오사카 대화에서 북쪽 해안으로 퇴각하여 궁진시(宮津市)로 후퇴하였다. 해부씨(海部氏)가 있던 곳이다. 이후로 일본은 고구려계와 백제계의 남북 2국 정부 시대가 된다.

윤공천황의 대화 궁성은 원비조궁(遠-飛鳥宮)이라고 하였다. 인덕 12년에 윤공천황, 사가노고리가 소백수조(小泊瀨造)의 선조가 되었다고 하는데, 대백수천황(大泊瀨天皇)이었던 그의 아들 웅략천황(雄略天皇)과 대비되는 이름이다. 윤공천황의 소백수(小泊瀨), 웅략천왕의 대백수(大泊瀨)에서 백수(泊瀨)의 어원은 고구려어(高句麗語)로서 고구려 대왕을 칭하던 백수(百殊)에서 유래한다. 대백수(大泊瀨)는 현재 백산신사(白山神社) 위치로서 윤공천황의 아들인 웅략천황의 궁터로서 명일촌(明日村)에 있다. 소백수(小泊瀨) 혹은 백수는 윤공천황의 궁터로서 아직까지 일본에서 밝혀내지 못했으나 이제는 찾을 수 있다.

인덕 50년(431년 추정, 인덕천황이 죽은 후다) 왜국에 기러기(雁)가 알을 낳았다는 기사가 있다. 왜국에서 알을 낳은 기러기 안(雁)은 광개토호태왕의 이름 안(安)에서 유래된다. 광개토호태왕의 이름은 고안(高安)으로 396년, 398년에 중국의 <양서(梁書)>와 <진서(晉書)>에 기록되었다.

<고사기>에서 기러기가 새끼를 낳은 후에 바로 이어지는 내용은 도노키(兎村河)의 거목이 서쪽으로 고안산(高安山)을 비추는 것이다. 즉 고안산 이름이 처음 생겨난 것을 의미한다. 윤공천황이 구주로부터 대화에 영토를 확장해 들어왔다는 것이다. 고안산(高安山)은 <고사기> 전체에서 오로지 이 곳에만 기록되었다.

고안산은 물론 광개토호태왕의 이름 고안에서 비롯되어 오사카(大阪)와 나라현(那良縣)의 경계 지역, 나라현 생구군(生駒郡) 서남쪽에 명명된 산 이름이다. 고안산 뒤에는 생구산(生駒山)이 있고, 생구군(生駒郡)에는, 고안정(高安町), 반구정(斑鳩町)이라는 지명도 남겼다. 바로 이 생구군(生駒郡) 이름에서 고구려의 구(駒)가 그 땅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신찬성씨록>에서 고안하촌주(高安下村主)는 고구려 사람 대령(高麗國人大鈴)의 후예라고 했다. 역시 <신찬성씨록>에는 광개토호태왕의 아들이 일본에 존재해 있었음을 기록했다. <신찬성씨록> 難波連 出自 高麗國 好太王也 이는 일본의 난파련(難波連)이라는 씨족이 일본에 온 광개토호태왕으로부터 갈라져왔다는 것이니 광개토호태왕의 아들의 후손이라는 뜻이고, 그 광개토호태왕 아들이 윤공천황이다. 난파는 오사카의 항구 이름이다.

윤공천황의 궁성은 원-비조궁(遠-飛鳥宮)이라 했는데, 어리석게도 아스까(飛鳥)에서 먼 곳에서 궁터를 찾으니, 아직까지 궁터를 밝혀지지 못했다. 그러나 원비조는 '먼 아스까'가 아니라 '먼 곳에서 온 새'의 궁이라는 뜻이다. 즉 멀리서 날아온 새, 기러기 고구려를 의미한다. 반대로 근-비조궁(近-飛鳥宮)은 현종천황(顯宗天皇)이 세웠는데 가까운 데, 즉 백제서 날아온 새의 궁이 된다. 윤공천황의 원비조궁은 고안산(高安山) 동쪽이며, 생구산(生駒山)의 동남쪽인 생구군(生駒郡) 반구정(斑鳩町)의 법륭사(法隆寺) 터다. 성덕태자(聖德太子)가 원비조궁터에 법륭사(法隆寺)를 만들어서 지금 원비조궁의 궁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의 고구려 궁터였던 곳에 고구려승 담징(曇徵 579∼631)이 초청되어 가서 유명한 금당벽화(金堂壁畵)를 남겼다. 벽화는 1949년 불타고 지금은 모사품이 남아있다.

윤공천황은 대화 즉위 5년, 436년경에 왜국의 귀족들을 숙청하기 위하여 탐탕(探湯)하였는데, 이는 일본 대화(大和)의 숙청 과정에서 거행한 일이다. 탐탕을 시행한 곳은 감견좌신사(甘樫坐神社)다. 신사에 거석을 세워놓고 그 앞에서 끓는 물의 심판을 하였는데, 감견좌(甘樫坐) 거석은 우리 전래의 단군좌(檀君坐)가 와전된 것으로 고려된다. 단(檀)이 달 감(甘) 자로 바뀌는 일이 많다.

그 후 438년에 윤공천황은 왜진왕(倭珍王)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는데, 윤공천황은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등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의 봉호를 달라고 청한다.

都督 倭 百濟 新羅 任那 秦韓 慕韓 六國 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

여기서 임나는 대마도와 구주, 경남 해안이고 진한(秦韓)은 지리산 남쪽 광주(光州) 부근으로 고려되고, 모한(慕韓)은 지리산 북쪽인 익산(益山) 부근으로 고려된다. 변한(弁韓)은 변산(邊山) 부근의 부안(扶安)이었다.

왜진왕 직함에 감히 백제가 관할로 포함되어 들어간 것은 그가 백제계가 아니라는 반증이며 고구려인이기에 배포를 부린 것이다. 그러나 백제와 혈연인 송나라는 고구려계 왜진왕에게 왜국 이외 5국에 대하여는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고 왜국왕만 내려주었다.

윤공천황에게는 본비로서 아신대왕의 딸인 오시카노오나가쯔히메한테서 기나시노카루태자(木梨輕太子414~454)와 웅략천황(雄略天皇418~479) 등의 아들이 있었다. 윤공천황은 오나가쯔의 동생인 타이노나가즈히메(田井中比賣)도 부인으로 삼았고, 또 막내 동생인 후지하라노코토후시노이라쯔매(藤原之琴節郞女)도 부인으로 삼았다. 다른 말로 소도오시노이라쓰메(衣通郞姬)라고 하였는데 옷 밖으로 미모가 비치는 여자였다. 당나라 때에 있었던 얇은 비단 옷을 즐겨 입은 모양이다.

그런데 기나시노카루태자(木梨輕太子)가 불륜을 저질렀다. 태자는 자신의 이모이고 윤공천황이 가장 아끼는 후궁인 소도오시노이라쓰메(依通郞姬)와 사통하였다. <일본서기>에서 내란(內亂)이라고 기록했는데, 부왕의 첩을 건드리는 것을 중국고사에서 내란이라고 한다. <고사기>에서 동부동모(同父同母) 상간(相姦)으로 위장했지만 그들은 동부동모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윤공천황은 목리경태자에 의해 독살되었다. 마지막 기사가 천황이 먹는 국이 굳은 것인데 독이 들어있었던 것으로 고려된다. 신하들은 그가 태자이므로 어쩌지 못하였다. 소도오시노이라쓰메(依通郞姬)는 윤공천황의 빈소를 지키며 곡(哭)을 하여야 했으나 신하들은 그녀를 사국섬(四國島)의 온천으로 떠나보냈다. 목리경태자는 곧 천황이 될 테니 그때까지 건강하게 잘 있으라고 위로하였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