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송나라 황제가된 왜기왕 침류대왕
송나라 황제가된 왜기왕 침류대왕 ⓒ 연종열
송나라 고조무황제가 된 백제 침류대왕

383년 평양 한성에서 백제대왕으로 즉위한 침류대왕은 중국의 북조, 전진(前秦)으로부터 참전을 요청받는다. 침류대왕(363~383)은 동생인 아신대왕(阿莘大王372~424)에게 백제를 맡기고 중국으로 떠나는데 당시 아신대왕은 12살, 침류대왕은 21살이었다.

백제 아신대왕(372~424)은 근구수대왕의 아들이며, 두 번이나 백제왕위에서 물러났기에 와카누케후타마왕(若沼毛二股王)이라고 일본에서 호칭했고 그의 황릉은 나라현(奈良縣)의 가즈라기성(葛城) 야시기산(屋敷山) 공원에 있는 전장 135m의 전방후원고분이다.

383년 11월에 중국의 남북조가 충돌한 역사적인 비수대전(淝水大戰)이 있었다. 남북통일을 노린 전진의 부견황제(符堅皇帝)가 100만 대군으로 출병하였으나 비수에서 대패하였다. 이때 산동반도 쪽으로 상륙했던 백제군은 건절장군(建節將軍) 여암(餘巖) 형제가 인솔하였다.

비수대전 이후에 흩어지는 전진의 부견황제로부터 슬며시 독립하여 후연(後燕)을 건국하려는 모용수(慕容垂)가 군대를 모으니, 건절장군 여암 등이 백제 군대를 이끌고 자원하였다.
모용수는 고구려, 백제를 친 전연황제 모용황의 막내아들이며, 전연 말기에 전연을 배신하고 전진의 부견황제에게 귀의했고, 370년 전연국 수도 업성 함락으로 전연은 전진에게 몰락했다.

한편 모용수의 사위로 부여왕자 여울(餘蔚)이 있었는데 그는 346년 전연(前燕)의 모용황이 백제를 쳐서 끌어간 부여왕 여현(餘玄)의 아들이다. 부여왕자 여울은 370년에 전진황제 부견에게 투항한 모용수를 도와서, 전진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전연국 모용위의 수도 업성 성문을 몰래 열어서 전진국 군대를 업성 안으로 들여보내어 전연국을 멸망시켰다.

부여왕 여현은 전연황제 모용황의 사위가 되었었고, 그의 아들 부여왕자 여울은 후연황제 모용수의 사위가 되어서 후연의 재상이 되었다. 백제군 여암 형제는 이 부여왕자 여울을 통하여 후연의 사정을 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384년에 고구려 고국양대왕(故國壤大王)이 전연(前燕)이래 선비족이 차지했던 대릉하(大凌河) 하구의 요동(遼東)을 공략하였다. 그러자 백제 건절장군 여암의 군대는 385년에 후연이 차지했던 유주(幽州)(북경시 北京市)를 공략하여 탈취하고, 이어서 난하에 있던 영지성(令支城)과 대릉하의 황룡성(黃龍城)을 차지한다. 중국 사서에서 동진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점령하고, 백제가 요서(遼西)를 점거해 자치군을 두었다는 기록은 바로 이 385년 상황이다.

晉世 句麗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385년 후연황제 모용수는 아들 모용농(農)을 파견하여 백제가 빼앗은 영지성과 황룡성, 그리고 고구려가 점거했던 요동성을 수복한다. 그러나 북경은 389년에야 수복하는데, 이 4년동안 백제는 북경을 점거하여 유주자사(幽州刺史)와 그 아래에 13군(郡) 태수(太守)를 두었었다. 그때 유주자사를 지냈던 백제인이 바로 평양 덕흥리고분 주인공 진(鎭)이다. 그의 고분 벽서에 감춰진 성은 백제 왕성인 부여씨가 된다. 그는 말년에 평양에서 지내던 중 고구려가 백제의 평양을 함락하여 광개토호태왕의 신하가 되어 생을 마쳤다.

한편, 백제 본토에서는 384년에 반란이 일어나 아신대왕을 폐위하고, 침류대왕의 서형(庶兄)인 진사대왕(辰斯大王346~395)이 즉위하였다. 침류대왕은 이 당시에 지금의 산동반도에 진출했을 것으로 고려된다.

이 384년에 중국 산동반도 청주(靑州)에는 근본을 알기 어려운 장수 벽려혼(辟閭渾)이 점거하여서 16년간 산동반도를 전부 지배했는데, 벽려혼 역시 백제 장수로 고려된다. 왜냐하면 다른 여타의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처럼 크고 부유한 자리를 오래도록 차지하고도 스스로 칭제건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벽려는 “비류”와 똑같은 발음이다. <신찬성씨록>에 백제국 벽류왕이 기록되어 있고, (出自百濟國避流王也) 그 후예는 광정련(廣井連)인데 벽려혼의 도읍이 청주 광고성(廣固城)이었다.

399년에 후연에서 갈라진 남연(南燕)이 청주 광고성의 벽려혼을 물리치고 청주를 점령하여서 411년까지 고작 12년간 산동반도를 지배했는데, 남연은 오호십육국에 들어간다. 남연에 비하여 벽려혼이 동진으로부터도 유주자사라는 책봉까지 받고, 산동반도를 완벽하게 16년간 다스렸는데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칭제건원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백제 침류대왕의 신하였기 때문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때 침류대왕이 당시 동청주(東靑州)인 산동반도 청도(靑島)에 백제대왕으로서 출정 나와 있었기에, 백제 본토 내부에서 진사대왕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고, 또 391년 광개토왕자가 백제 본토를 침탈하는 빌미를 주었다.

본토 진사대왕의 반란은 백제군의 분열을 가져와 침류대왕에게 엄청난 타격이 된다. 바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고구려 광개토왕자는 만주의 백제 영토를 다 빼앗고 압록강 하구까지 육박해 내려온다.

391년 진사대왕(辰斯大王346~395)은 광개토대왕에게 패전하고, 급히 왜국에 구원병을 요청했는데 응신천황, 즉 근구수대왕은 백제에 구원병을 보낸 대신에, 진사대왕을 잡아 일본으로 보내고, 근구수대왕의 아들 아신대왕을 다시 백제대왕으로 세운다. <일본서기>에서는 진사대왕이 살해되었지만 실제는 일본에 압송되었다.

<고사기>에서 백제 진사왕은 대산수명(大山守命346~395)으로 나온다. 대산수명이 곧 진사왕이라는 사실은 침류왕의 대산수명 살해 장면 기록에서 나온다. 그는 응신천황(근구수대왕)이 그를 태자로 하지 않은 것에 항상 원망을 가졌고, 394년 응신천황 서거 이듬해에 우치천황이 된 침류대왕을 죽이려고 준비했다가 침류대왕에게 선수를 당한다.

침류대왕은 그와 물놀이하다가 배를 뒤집고 빠져나가서 진사대왕을 강에 오르지 못하게 막아서 익사시킨다. 대산수명이 강에서 떠내려가며 이른 곳이 가와라(詞和羅)였다. 강가에 올라가게, 제발 가라고 가라 가라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가와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 그 가와라로 인하여 그를 위한 가라신사(辛國神社)가 세워졌고, 그 가라신사에 진사대왕 후손의 족보가 기록되어 내려온다
.
[한국신사] 百濟貴須王→辰斯王(391년경 도래!)→太阿郞王→亥陽君→午定君より三腹に分枝 ①味沙→白猪史→葛井連、宿禰→蕃良朝臣→菅野朝臣 ②辰璽→船史→王後首→宮原宿禰、御船宿禰→菅野朝臣 ③麻呂君→津史→津連→津宿禰、中科宿禰→菅野朝臣

그런데, 394년 근구수대왕, 응신천황이 일본에서 서거하고 396년에는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백제 본토를 쳐서 백제 한산 수도가 있던 대동강 이북을 점령한다. 백제로서는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되었다. <만주지리풍속지> 기록에서 고구려 영락대왕이 이 396년 전쟁에서 처음 탈취한 일팔성이 압록강 북쪽 단동시 봉황산성(鳳凰山城)으로 기록되었다. 광개토호태왕이 백제로부터 뺏은 58성은 다음 기회에 소개한다.

이때 근구수대왕, 응신천황이 서거한 394년부터 396년까지 일본은 3년간 천황 자리가 비어있었다. 명목상 우치천황, 즉 침류대왕의 통치 시기다. 그는 장례식에 돌아와 우치천황으로서 3년상을 치르고, 진사대왕을 죽이고, 다시 떠난 것이다.

396년 침류대왕은 서형(庶兄)인 인덕천황(仁德天皇337~419)에게 천황자리를 승계토록 조치한다. 인덕천황은 백제와 중국에서 벌어지는 전쟁 지원으로 피폐해진 일본 국민들에게 3년간 과역을 면제하여 주었다.

한편 침류대왕은 396년 고구려의 백제 침략에 보복하기 위하여, 왜군을 총동원하여 399년에 신라를 쳤다(광개토호태왕비문 9년). 이들 왜군 병사들은 이듬해 400년에야 고구려 군대에 쫓기게 되니 399년 내내 신라 도성 주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 399년 7월에 중국 산동반도에서는 선비족 남연(南燕) 황제 모용덕의 침략을 받아서 산동반도를 선비족에게 다 빼앗기고, 산동반도 청주를 지키던 벽려혼은 외롭게 전사하였다.

애석하게도 침류대왕은 북경에 보냈던 건절장군 여암 형제의 백제 군대와 유주자사 부여진의 요서 백제 병력, 그리고 벽려혼의 산동 백제 병사를 거의 다 잃었다. 침류대왕은 산동의 벽려혼과 백제군을 구하기 위해 부랴부랴 중국으로 건너갔으니 399년 가을이었다.

그가 떠난 이듬해 400년, 신라 땅에서는 인덕천황의 지휘로 신라에 나가 있던 왜군 병사들도 고구려군에게 궤멸된다. 그리하여 광개토호태왕의 고구려군이 왜군을 추격하여 대마도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399년 가을 침류대왕은 중국 땅에 다시 들어가서 침류소석(枕流漱石=枕石漱流 개울물에 씻기는 돌을 베고 자는 은거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래 떠돌지 않았으니 100일도 지나지 않아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성공한다.

그해 399년 11월에 마침 오두미교주 손은(孫恩)의 해적들이 동진 동해안을 왜구질하므로 동진은 황명으로 해적 토벌을 명령하였고, 12월에 동진의 장수 유뢰지(劉牢之)가 손은을 토벌하기 위해 지원병을 모았다.

침류대왕은 그 유뢰지의 휘하에 응모하여, 참군사(參軍事)가 되는데, 유우(劉裕)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하였다. 당시 참군사는 의병대장 같은 격이라서 정규 병력을 주지 않았고, 휘하에 그를 따르던 수 십명 가신, 친위대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단 수 십인을 가진 유유는 해적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정찰 명령을 받고서 수행하다가 수천명의 손은 군대를 맞닥뜨렸는데 그대로 돌진하여 부수어버렸다. <자치통감>에는 이 때가 이렇게 나와있다.

“유유는 수십인을 데리고 정찰하다가 수천인의 적군을 만나 즉시로 공격하니, 따르던 부하들은 다 죽고, 유유는 절벽으로 떨어졌고 적들이 절벽 위에서 죽이려고 하였지만 유유는 분투하여 장검을 휘둘러서 몇명을 죽이고 다시 기어올라와서 고함치며 추격하니 적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유유는 쫓아가서 계속 적들을 많이 죽였는데 본부의 유경선이 유유가 돌아오지 않으니 병사들을 이끌고 찾아나서서, 유유가 수천인의 적을 홀로 추격하는 광경을 보고 감탄하여 부대로서 적들을 쳐서 대파하여 수천명의 적을 베었다."

동진을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세운 고조(高祖) 유유(劉裕)는 363년생으로 칠지도에 나타난 왜왕기(倭王奇)와 같고 유유의 아명은 기노(寄奴)로서 역시 일치한다. <송서 본기>에는 유유가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의 후손이라고 줄줄이 족보를 엮어서 기록했는데, 이는 조작이다.

바로 동시대 북조(北朝)의 정사(正史)인 <위서(魏書)>에는 섬오랑캐(島夷) 유유(劉裕)의 근본을 모른다고 기록했다. 유유는 본래 성(姓)이 다른데 유(劉)씨로 개성(改姓)했다고까지 기록하였다. 본래 유(劉)씨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서>에서 유유의 수식어가 섬오랑캐 도이(島夷) 유유(劉裕)다. 도이(島夷)는 해외 만황의 오랑캐 종족(海外蠻荒的種族)을 의미한다.

당나라 초기에 편찬된 <정의괄지지(正義括地志)>에서는 도이(島夷)에 대해서 백제에 속한 왜인으로 설명했다. 백제국 서남의 발해 중에 큰 섬 15개소가 있는데 백제에 속했다. 왜국은 측천무후 때에 일본국으로 개명했다. 백제 남쪽에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섬에 산다. 백여 소국인데 이들이 양주(揚州=동진의 수도)의 동쪽으로서 도이(島夷)라고 한다.

<구당서/천문지>에서 남쪽으로 월(越)을 지나면 도이만맥인(島夷蠻貊之人)이 산다고 했는데 도이(島夷)를 남만(蠻)과 예맥(貊)인들로 기록한 것이다. <원사/본기>에서 세조 황제는 일본은 멀리 고립된 도이(島夷)라고 했다. 그 후 일본을 계속 도이(島夷)라고 불렀다.

북조의 정사인 <위서>에 의하면 유유는 36세까지 미투리, 즉 짚신을 만들어 팔 정도로 가난했고, 짚신장수 격에 맞지 않게 도박을 좋아하여서 무려 3만전의 빚을 지고 갚지도 못하는 건달 신세였다. 그런 그가 399년 11월 동군장수 유뢰지를 찾아가서 참군이 되었는데, 손은의 군대에게 대승하여서 그날로 황당하게 건무장군(建武將軍)으로 승진하고, 겸하여 하비태수(下邳太守)가 되었다. 이는 지방왕에 해당한다.

<북위서>에 나타난 대로 363년부터 399년 12월까지, 태어나서 무려 36년 동안 오로지 짚신을 팔던 무지렁이 건달이었다면, 36세에 느닷없이 수십명의 정병(精兵)을 데리고 전장에 나타나서 일당천의 무용을 선보이고, 게다가 높은 학식이 필요한 하비군 태수(왕)까지 전투 한번으로 곧바로 임명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 그 후로 단 5년만에 동진(東晋)의 최고 권력자가 될 수도 없다. 오로지 유유의 근본이 백제 침류대왕이자 왜기왕이라서 가능한 것이다. 남연국 선비족의 땅이 된 산동반도에 급히 돌아왔다가, 선비군에 밀려서 동진 땅으로 피신하게 되면서, 침류대왕은 이름도 유유로 바꾸고, 방탕하다가 동진 장수 유뢰지의 진영에 투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침류대왕은 중국식 이름인 유유(劉裕)라는 이름으로 승승장구하여서, 399년 12월 그 바꾼 이름을 처음 세상에 알린지 단 5년 2개월 만에, 405년 1월, 동진의 수도를 강탈했던 환현(桓玄)의 난을 제압하였다. 유뢰지는 이미 환현에게 죽었고 도성에서 쫓겨났던 동진황제를 수도 건강(建康)에 복귀시키면서 동진의 최고 권력자인 시중(侍中) 겸 9주제군사(九州諸軍事) 겸 2주자사(二州刺史) 위치에 오른다.

그리고 다시 5년 후, 선비족 남연국을 멸망시켜 청주를 되찾고 벽려혼의 복수를 한다. 결국, 동진 황제 공제(恭帝)의 양위를 받아서 유유는 420년에 송나라를 개국하여 고조무황제(高祖武皇帝)가 된다.

송고조 유유의 뒤를 이은 18세의 소제(少帝)는 장부인(張夫人)의 소생이었다. 황태후가 된 장부인은 이름을 궐(闕)이라 하였지만 <송서>에서조차도 장부인의 출생 근원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장부인은 백제 여자라서 기록이 없는 것이다. 2대 황제인 소제가 사치하고 포악하다고 즉위 3년만인 424년에 신하들이 폐위하여 내쫓고, 동진 황제 공제의 딸이 유유에게 시집와서 낳은 문제(文帝)를 즉위시킨다. 외척이 전혀 없는 소제가 외척이 많은 문제에게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것이다. 이때 황태후 장부인은 황제 소제를 폐하는 교서를 내리고, 문제를 황제로 세운 대궐안의 권력자였지만, 스스로 궁궐을 나가버려서 동해안 오군(吳郡)으로 갔다가 2년 후 사라진다. 백제, 혹은 왜국으로 건너가 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426년에 죽었다는 그녀의 나이조차 기록이 없고, 능도 만든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죽지 않았으니 죽은 나이를 기록할 수 없고 능도 만들 수 없었다.

유유의 등장 이후 왜국은 갑자기 중국과 끊어졌던 교류를 되살려나가니 이때 중국 역사에 왜국이 다시 상세하게 등장한다. 이때 왜국의 왜5왕이 교류한 중국 땅은 <일본서기>에서 항상 오(吳)나라였다. 즉 장부인이 머물던 오군(吳郡)이 강좌(江左)의 백제 땅이었던 것이다.

전후좌우 정황은 송나라 고조가 왜기왕이고 우치천황이고 백제 침류대왕인데, 백제 장수 벽려혼이 중국 산동 청주에서 제왕이 되었어도 실패한 것이 소수민족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지, 혹은 왜구질을 싫어하는 중국인들을 이해시킬 수 없어서인지, 침류대왕은 한나라 고조 유방의 족보로 혈통을 꾸며서 중국을 통치하고, 스스로 백제왕이었다는 사실을 숨겨서 송나라를 자신의 후예들에게 전해준 것이다.

침류대왕 혈통도
침류대왕 혈통도 ⓒ 구자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