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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동 43번지 한용운 가옥
계동 43번지 한용운 가옥 ⓒ 김정봉
집을 찾던 중 신문에 실린 집은 44번지여서 근처 목욕탕과 세탁소 주인에게 확인해 본 결과, 한용운 가옥은 중앙목욕탕 골목 두 번째 집이었다. 큰 전등이 바깥에 나와 있어 전등집으로 불리고 있었다.

계동 44번지, 신문기사에 실린 집
계동 44번지, 신문기사에 실린 집 ⓒ 김정봉
어려웠던 시대를 변절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온 한 위인을 만난다는 설렘에 앞서 '독일은 괴테가 하룻밤 머물렀던 여관조차 푯말을 세워 관리한다'는 자조 섞인 말이 더 이상 슬프게 들리지 않아 즐겁다. 현대 사옥을 지나 중앙고등학교 방향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대동산업정보학교의 푯말과 함께 인촌 김성수 옛집이 있고 거기에서 50m 정도 올라가면 한용운 가옥이 나온다.

김성수의 옛집 문은 최근 분위기(친일인명사전 명단 발표)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굳게 닫혀 좀처럼 속을 내보이지 않는다. 대동산업정보학교 언덕에서 보면 김성수 옛집은 물론 계동 북촌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어 한 번 올라가 볼 만하다. 멀리 보이는 교회 밑에 한용운 가옥이 있다.

계동 북촌마을 정경, 바로 아래 집이 김성수 옛집이고 한용운 가옥은 교회 밑에 있다
계동 북촌마을 정경, 바로 아래 집이 김성수 옛집이고 한용운 가옥은 교회 밑에 있다 ⓒ 김정봉
한용운 가옥은 30평 정도의 초라한 한옥집이다. 선생이 이 집에 머물던 시기는 그의 나이 40세 되는 해였는데, 그때 '유심'이라는 월간지를 창간했다. 민중을 일깨우는 계몽지 성격을 갖는 이 잡지는 자금 사정으로 겨우 3호만을 내고 폐간할 수 밖에 없었다.

1900년도 전후에 지어진 집이라 건축적 가치가 있기보다는 만해가 3·1운동에 참여할 당시에 거주했던 집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천도교와 기독교 측 운동의 일원화를 이룬 최린이 한용운을 찾아가 불교계의 참여를 이끌어 낸 장소다.

한용운 가옥
한용운 가옥 ⓒ 김정봉
현대 사옥에서 중앙고등학교를 연결하는 남북 축은 3·1운동 발상지로서 한용운 가옥을 중심으로 남쪽 50m 지점에 김성수 옛집이 있고 북쪽 100m 되는 지점에 중앙고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서쪽으로 지금 가회동사무소 자리에 손병희 집이, 남쪽 방향으로 지금 헌법재판소 지하주차장 입구 자리에 최린의 집이 있었다. 손병희 집은 1919년 2월 28일 밤, 민족 대표 23인이 거사를 앞두고 상견례를 겸해 서로의 각오를 다지기 위해 회동한 곳이다.

한용운 선생은 일생에서 두 번 정도 한 곳에서 오랫동안 머문다. 태어나서 오세암에 입산할 때까지 홍성 생가에서 15년, 1933년 55세부터 사망하기까지 심우장에서 약 11년. 그 외에는 오세암, 시베리아, 처가집, 백담사, 건봉사, 금강산 유점사, 일본, 금강산 표훈사, 만주 등을 오가며 정착하지 못하고 생활한다. 오히려 3·1운동 후 3년간의 투옥생활은 한용운 생에서 비교적 오랫동안 머문 장소일 정도다.

65년 평생 동안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정처없이 떠돈 이유는 고향에 대한 그의 생각에 잘 나타나 있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혹은 뜻한 바가 있어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들에겐 이르는 곳이 다 고향이라 하면서 뜻한 바가 있어 고향을 등졌다면 이 세상이 고향이나 다름없는데 자기를 나그네로 생각하여 서글퍼 할 일도 아니라고 하였다.

충남 홍성 한용운 생가
충남 홍성 한용운 생가 ⓒ 김정봉
이런 생각은 고향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보다는 서글픈 추억이 그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버지가 홍주아문의 아전생활을 하여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무급료 생활은 아문의 비공식 급료를 백성에게서 구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에 한용운으로 하여금 갈등에 휩싸이게 하였던 것 같다. 동학란과 관련하여 한용운이 출가했다는 설은 오히려 백성에게서 빼앗은 양곡의 일부를 급료로 받아 온 아버지에 대한 혹은 가난에 대한 원망이었을 게다.

이런 분위기에서 첫 번째 부인과의 결혼 생활이 원만할 리가 없었다. 14살에 결혼해서 16살에 고향을 떠났으니 같이 산 기간은 고작 2년 남짓된다. 술을 좋아하여 장모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한용운이 시베리아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와 형은 동학란 통에 죽고 아내는 처가에 거처하게 되어 얼마간의 처가살이를 하였지만 이때도 그리 편한 생활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용운에게는 고향은 안식처가 아니라 빨리 탈출하고 싶은 곳이었다.

그는 55세가 돼서야 정착하게 된다. 그 해 오랫동안 간호원으로 일하며 독신으로 지내 온 유숙원과 재혼을 한다. 결혼과 더불어 이제 정착하여 살아야 한다는 주위의 권유를 받아들여 성북동 심우장에서 말년을 보낸다.

심우장, 한용운 선생이 말년에 마음의 안정을 찾은 곳이다
심우장, 한용운 선생이 말년에 마음의 안정을 찾은 곳이다 ⓒ 김정봉
성북동은 원래 성밖 마을 북장골로 송림이 우거진 한적한 동네였다. 심우장은 백양사 지주인 벽산 적음 스님이 초당을 지으려고 북장골 송림 가운데에 52평을 마련하여 두었던 터였다. 심우장은 송림에 숨은 산방으로 매우 한적하였다.

지금은 한적하기는커녕 가파른 비탈길과 한없이 이어지는 계단길, 리어카 한 대 겨우 다닐 정도의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고 그 길을 따라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차 있어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골목 조그마한 가게의 연탄은 '성밖 생활'을 짐작게 한다.

가파른 비탈길과 계단길을 올라가야 심우장에 닿는다
가파른 비탈길과 계단길을 올라가야 심우장에 닿는다 ⓒ 김정봉
재혼 생활은 잔혹하게 파괴된 초혼 생활과는 사뭇 달랐다. 재혼과 더불어 얻은 딸 영숙에게 많은 애정을 쏟았고 조그마한 정원에 화초와 향나무를 심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었다. 심우장에서의 안정된 생활은 그의 왕성한 집필활동으로 이어진다. 시나 논설뿐만 아니라 소설도 쓰기 시작하여 흑풍과 후회라는 장편소설을 쓴다.

심우장(尋牛莊)은 동네 집들 중 비교적 큰 축에 드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기와집이다. 심우란 소를 찾는다는 뜻인데 소란 불교에서 가장 큰 도를 깨치는 마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심우장은 무상대도를 깨치기 위한 집이며 늘 공부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왼쪽에 걸린 현판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오세창(1864~1953)이 쓴 것이다.

심우장 현판
심우장 현판 ⓒ 김정봉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집이 들어선 방향이 다른 집하고 확연히 달라 특이하다. 앞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방향을 마다하고 거꾸로 앉아 있다. 집안에서 보면 측면 1칸으로 보이나 언덕에서 보면 2칸으로 보인다. 만해가 남쪽에 있는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다고 하여 일부러 이렇게 지었다고 전한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집 방향이 다른 집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집 방향이 다른 집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김정봉
한용운이 쓰던 방에는 그의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만해가 죽은 뒤에도 외동딸 한영숙이 살았는데 일본 대사관저가 이 곳 건너편에 자리잡자 이사를 하였다.

고향을 등질 때의 상황과 심정, 장인(丈人)과 술에 관련된 일화, 최남선과의 라이벌 의식 등은 신비감에 쌓인 위인 한용운을 인간 한용운으로 다가오게 한다. 이런 일들이 사실이든 아니든 변절하지 않고 꼿꼿한 삶을 산 위인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

한용운 초상
한용운 초상 ⓒ 김정봉
한용운은 성인(聖人)이기에 앞서 어지러운 세상을 극복하기 위해 옳다고 믿는 바를 실천한 신념이 강한 한 인간이다. 그건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몸부림에서 온 것일 수도 있고 오랜 방랑 생활 끝에 터득한 사회화·의식화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 또는 최남선과 같은 인물과의 인간관계에서 오는 오기일 수도 있다. 그게 어디에서 왔던지 변절하지 않고 꿋꿋함을 잃지 않은 삶은 존경받아 마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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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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