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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장마을
하장마을 ⓒ 정성필
멀리  바다가 보인다
멀리 바다가 보인다 ⓒ 정성필
태환형과 아침 피재에서 출발을 한다. 태환형과 형수는 다시는 못 만날 사람처럼 인사를 하고 또 한다, 오랜 시간 인사를 했으면서도 나중에는 한참을 포옹을 한다. 돌아서는 태환형의 형수는 눈물을 훔친다. 이번에 이별을 하면 다음엔 진부령에서 만날 것이다. 긴 시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 사이에 태환형은 산에서 아내를 그리워할 것이고 아내는 산 아래서 남편의 안전과 건강을 기원하며 기다릴 것이다. 피재에서 백두대간으로 들어가는 길은 갈래길이다. 피재는 낙동정맥이 시작되는 길이 있다. 백두대간 낙동정맥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백두대간으로 들어간다. 나는 백두대간이 끝나면 낙동정맥도 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한다.

태백산서부터는 아니 강원도에서부터는 산행의 기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태백산을 내려서 화방재에 도착하는 순간, 이제까지 보아왔던 고개, 령, 재의 모습이 다 사라지고 마을의 풍경이 나타났다. 그것도 떡 하고 버티고 있는 민박집의 모습이 보인다. 피재에서는 백두대간 마루금에 마을 있었다. 마을을 지나 휴게소가 있었다. 지금 가는 길에서는 산 아래의 먼 풍경이 보이는 게 아니라 가까운 거리에 마을이 있었다. 사람이 산에 있었다.

광동이주단지 고랭지 채소밭
광동이주단지 고랭지 채소밭 ⓒ 정성필
뒷모습
뒷모습 ⓒ 정성필
강원도에서는 남쪽에서 보던 산 위와 산 아래의 풍경은 구분이 없어진다. 산이 마을이고 마을이 산이다. 내가 걷고 있는 길에서 문득 집이 나오고 마을이 보이고 학교가 보인다. 강원도는 그만큼 고원지대라는 거다. 나는 지금 사람이 보이는 길을 걷는 중이다. 그동안 나는 사람과 동떨어진 길을 걸었다. 사람과 동떨어진 길을 걸으면서 나는 내 속에 있는 나를 보았다면 사람이 있는 길에서는 나 밖에 있는 나를 볼 것이다. 나를 본다는 것은 검증이다. 나 이외의 사람들이 보내는 피드백(말이 아니더라도)을 통해 나를 검증한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때론 눈빛으로 때론 말로 때론 행동으로 나를 평가할 것이다. 나는 그 평가를 마음으로 듣고 눈치고 듣고 귀로 들어 확인할 것이다.

가는 중에 바로 눈 밑에 펼쳐진 상사미초등학교를 지나고 한의령을 지난다. 지나는 동안 하장 마을의 풍경을 사진에 담는다. 지각산에서 광동이주단지를 지난다.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지만 수몰지구의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주해서 살아, 광동이주단지라 이름을 붙였다는 것인데, 마을은 백두대간 상에 있다. 해발 1000m가 넘는 곳에 위치한 마을, 신기하기만 하다. 덕항산을 지날 때 속초와 바다의 풍경을 보았다. 그리고 내내 가는 길마다 바다가 보인다. 드디어 내가 동해안을 따라 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덕항산을 지나다 돌무더기가 있고 좌측으로 희미하지만 길이 나 있는 걸 본다. 저 길은 아마도 예수원으로 가는 길인 듯하다. 예수원은 작년까지 내가 매일 가면서 조용히 침묵의 묵상을 하면서 나를 살폈던 곳이다. 예수원에 있는 동안 우연히 발견한 산길을 따라 가다 보니, 덕항산까지 간 적이 있다. 지금 저 길이 예수원으로 가는 길이다. 기억을 더듬는다. 예수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말이 있다.

"노동은 기도입니다."

어쩌면 나는 걸음을 노동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노동은 가치를 창조하는 행위지만 걸음은 가치를 창조하지 않는다, 엄밀한 의미에서 걸음은 노동이 아니다). 걸음이라는 땀을 흘리는 행위를 나는 노동과 같이 신성하게 생각하며 걷는다. 걸음을 통해 노동이 기도이듯 나는 기도하고 있는 중이다. 걸음을 통해 나는 수행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나는 나를 변화시키고 싶어 걷는 중이다. 걸음을 통해 나는 변화되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 바람을 맞고
나무 한 그루 바람을 맞고 ⓒ 정성필
뿌리
뿌리 ⓒ 정성필
광동이주단지를 내려서기 전 풀밭 너머로 고랭지 채소밭이 보인다. 나무 한 그루 서 있고 나무가 있는 쪽으로 태환형이 내려간다. 나는 태환형의 뒷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아 가다 멈추고 사진을 찍는다. 고랭지 채소밭에서는 사람 몇이 멀리 밭을 갈고 있다. 밭으로 지워진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찾아 헤매다 길을 찾는다. 바다가 보이는 길에서 잠시 쉬며 태환형과 대화를 한다.

"형 처음 산행할 때 안 넘어지려고 했는데 넘어지더라."
"처음엔 안 넘어지려고 힘을 많이 쓰고 버텼는데, 나중에는 넘어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니 자주 안 넘어지더라고."
"형 지금까지 걸으며 느낀 게 뭐지?"
"성필씨 나는 산이 좋아요. 산에 있으면 거대한 산에 있으면 저는 아주 작은 나를 확인하곤 한답니다."
"저는 산 속에 들어가면 그저 산 곳에 있는 무엇 밖에 안 됩니다."

형은 음악을 했단다. 기타를 쳤고, 무대에도 섰단다. 무대의 화려함 뒤에 텅 비어 남은 자신을 그 허무함을 달랠 길 없이 살았는데, 형은 산에서 허무함을 이겨내는 길을 찾았다는 거다.

우리는 다시 출발한다. 배낭 없이 갔다면 일 박 이일 걸렸을 길을 우리는 배낭을 픽업하고 하루 만에 가야하기 때문에 서두른다. 댓재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내리막에 나무들이 흙 밖으로 뿌리를 드러낸 채 엉켜있다. 나는 그 뿌리를 보면서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살아 있음, 살아가야 하는 삶의 처절한 투쟁"의 모습을 느낀다. 삶은 땅속에 묻혀 있어야 할 뿌리가 밖으로 드러난 채 살 수밖에 없는 길 위의 나무뿌리처럼 살아가는 거야.

댓재에 도착한다. 댓재에는 '댓재민박'집이 댓재 마루금에서 바로 보인다. 우리는 댓재민박집으로 들어간다. 아직도 해가 지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 매우 빠른 속도로 피재에서 댓재까지 왔던 셈이다. 배낭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천지 차이임을 느낀다.

댓재 민박에 도착해서 밥을 주문하고 방에 짐을 풀고 내려가 시켜놓은 밥을 먹는다. 밥을 먹는 중에 비가 내린다. 방에 들어와 보는 TV에서는 내일부터 태풍이 온다는 일기예보를 보낸다. 나는 태환형과 심각한 논의를 한다. 내일 아침 상황을 보아서 갈지 말지를 결정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미 함백산에서 산에서 맞는 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았기 때문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매우 예민해져 있었다.

태환형과 나는 일단 방을 나와 막걸리를 마시면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다. 비바람이 유리창을 파르르 때린다.

33일째 도상거리 24km

덧붙이는 글 | 2004년 5월 16일 부터 7월 4일까지 백두대간 연속종주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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