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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4년 문화관광부 시범사업으로 선정되고 나서 한국메세나협의회가 진행을 맡아 전국 아동복지 시설에 문화예술 전문강사들이 직접 파견되면서 마침내 문화 나눔의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문화나눔은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저소득층에게도 문화의 혜택을 고루 나누고자 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나와 함께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랑하는 아내와 유학시절 고아원 아이들의 음악교육을 꿈꿔왔던지라 문화 나눔 프로그램은 우리 부부에게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 독일에서 정착하기 위해 필요한 극장과 국립에이전시의 오디션을 접고 우리 둘은 귀국했다. 주저없이.

그러나 기대감 속에 들어선 문화 나눔은 나의 멋들어진 환상에 찬물을 완전히 끼얹는 일이었다. 시설 아이들에게 고급스런 레슨을 통해 나의 재능과 열정을 쏟아붓고 제2의 조수미를 키워내리라는 무언의 다짐은 말 그대로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피아노 앞에서 멋있게 레슨하는 내 모습이 아니라, 아이들 앞에서 재롱을 부리고 장난감과 같은 악기들을 가지고 놀이하고 개그맨도 되었다가, 울고 싸우고 삐지는 아이들을 달래야 하는 아빠의 역할을 대신해야 했다(실제로 아이들 중에는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아이들도 있다).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나는 깊은 회의에 빠져들게 되었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은 어려서 그렇다치더라도 중ㆍ고등학생 아이들은 내가 다가가기가 정말 힘든 대상이었다. 수업시간마다 내게 보내는 곱지 않은 시선들, 뭐라고 한마디만 하면 툭툭 쏘아붙이듯 하는 대답들, 하기 싫은데 억지로 앉아 있는 듯한 일그러진 표정들, 이러한 모습들은 그동안 내가 접해 보지 않았던 상황들이라 나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두 시간의 교육에 아이들 정리하고 싸움 말리고 달래는데 한 시간이나 드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과연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되는 건가? 라는 물음을 계속해야만 했다. 더구나 같은 반 아이들 중에는 여러 가지 장애들(자폐증, 소아마비, 정서적 불안 등)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너무나 현격히 차이나는 아이들의 수준이 수업을 진행하는 데 더욱 힘들게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자신 없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수업방식이었다. 매번 같은 수업을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교안은 한정적이며 수준 차이가 많이 나는 아이들 모두의 수준에 맞는 수업 프로그램을 짜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 자신에 대해 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아이들과의 관계가 신뢰로 형성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이 상처받을까봐 큰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던 나는 어느새 아이들과 호흡하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나는 뒹굴기 시작했고, 때로는 자연스럽게 혼도 낼 수 있게 되었으며, 고민을 들어주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요즘의 복지시설은 예전과는 달리 상당히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은 풍요로울지 몰라도 아이들의 마음은 항상 비어 있다. 특히 정서적인 측면에서 여러 문제를 보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러한 부분 때문에 아마 내가 너무 많이 당황스러워 했었는지 모른다. 음악의 기술적인 면만을 공부해 온 나로서는 아이들의 정서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공부했던 것뿐만 아니라 인생의 모든 경험까지 들추어내기도 하며 여러 해당 분야의 전문서적을 뒤적여야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기도 하지만 또 반면에 오해하고 있는 사실은 문화 나눔 프로그램이 학교 문화예술교육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간단히 답을 하자면, 문화 나눔은 문화향유도 중요하지만 문화예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아이들의 마음을 바르게 만들어 주는 작업을 하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표현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이를 통해 아이들 스스로 미래의 자기 모습들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그들의 가치관을 올바로 심어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문화 나눔과 같은 프로그램의 문화예술교육자는 일반 문화예술교육자들과는 또 달라야 한다고 본다. 어떻게 달라야 할지는 굳이 이곳에서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작년에 파견되었던 시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기억난다.

"시설아이들은 일반 아이들과 달라서 지속적인 만남이 중요합니다. 한번 타의에 의해서 헤어짐을 경험한 아이들이기 때문에 헤어짐에 익숙해져 쉽게 아이들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거든요."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문화 나눔 강사를 하면서 있었던 수많은 일들 중에 가장 소중하게 내게 와 닿았던 사건 하나를 소개하고 글을 맺으려 한다. 헤어짐에 익숙해져 있는 아이들에게 결코 문화 나눔이 또 한 번의 상처를 안겨주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권OO라는 아이가 있다. 모 시설에 있는 초등 1학년. 첫 만남에서부터 뭐 저런 애가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산만하기가, 흔한 표현으로 하자면 장난이 아니었다. 수업을 안 해도 좋으니까 '제발 수업시간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

매순간 OO와 나는 직접 싸우지는 않았지만, 알 수 없는 긴장관계에 있었다.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다 해 봐도 소용이 없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OO는 수업시간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을 했다. 뛰고 부수고 소리 지르고. 거의 나는 OO에 대해서 포기 상태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OO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이라고 꼭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갑작스럽게 변한 것은 아니니까. 한번도 자리에 앉아 있지 않던 아이가 자리에 앉기 시작했으며, 수업 프로그램에 조금씩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OO의 태도가 변하던 어느 날 수업을 시작하려고 하는 순간 얌전히 앉아서 한 손을 번쩍 들더니 말했다.

"선생님!"
"왜?"
"저 선생님한테 드릴 거 있어요!"
"어? 뭔데! 정말 기대되는데?"
"선생님한테 편지 썼어요."
"정말?"

그러고는 가슴 속에 꼭 파묻은 편지를 꺼내어 내게 주었다. 겉봉투도 예쁘게 손수 꾸며 만들어서는.

"너가 직접 쓴 거야? 에이~ 학교에서 선생님이 쓰라고 시켰구나."
"아니에요. 저 혼자 쓴 거예요."

강한 어조로 대답하는 OO의 말에는 진심이 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편지를 펼쳐서 읽는 그 순간 나는 그동안 쌓였던 모든 감정이 모두 씻겨 내리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철자도 틀리면서 정성스레 써내려간 편지에 감동을 받은 나는 OO에게 선생님의 1호 보물로 간직하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그날 이후부터 OO는 편지의 내용에 적힌 대로 정말로 수업시간에 말썽을 피우는 일이 없었다.

< OO의 편지 >
"선생님에게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권OO예요. 저가 마니 힘들게 했조. 개송해요. 다음부터는 않 굴럿게요. 장낭도 않치 말성도 않피울게요. 권OO 올림"


사랑하는 OO야! 선생님도 너를 정말 정말 사랑한단다.

덧붙이는 글 | 부부성악가
http://blog.naver.com/azzura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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