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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책표지
<섬진강> 책표지 ⓒ 창작과비평사
섬진강은 산골 선생님 김용택 시인을 키운 영혼의 텃밭이다. 삶과 사랑을 섬진강에 맡기다 보니 그도 섬진강을 닮아 버렸다. 섬진강은 시인에게 누이 같은 강물이며 시의 근원이다. 고향 사람들이 대부분 도회지로 떠나갔지만 여전히 남아 섬진강 물로 농사를 짓고, 아이들을 키워낸 고향을 지금도 붙잡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 쌀밥 같은 토끼풀꽃, /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 그을린 이마 훤하게 / 꽃등도 달아준다 /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섬진강 1' 부분)

섬진강은 김용택의 삶이며 고향이다. 농촌 공동체이며 욕심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생명의 젖줄이다. 그것이 시인이 섬진강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섬진강>에서 가난의 질곡과 농촌 공동체의 질박한 모습을 속살 그대로 그려냈다. 우리의 뿌리이면서 이제는 낯선 풍경이 되어버린 시골 마을과 자연, 그 속에 살아가는 농민들의 희로애락이 그의 시에서는 고운 물빛으로 꼼지락거리고 있다.

"풀꽃이 피고 어느새 또 지고 / 풀씨도 지고 / 그 위에 서리 하얗게 내린 / 풀잎에 마음 기대며 / 그대 언제나 여기까지 와 섰으니 / 그만큼 와서 해는 지고 / 물 앞에 목말라 물 그리며 / 서러웠고 기뻤고 행복했고 / 사랑에 두 어깨 깊이 울먹였으니 / 그대 이제 물 깊이 그리움 심었으리. / 기다리는 이 없어도 물가에서 / 돌아오는 저녁길 / 그대 이 길 돌멩이, 풀잎 하나에도 / 눈익어 정들었으니 / 이 땅에 정들었으리."('섬진강 3' 부분)

다시 돌아가야 할 곳, 농촌공동체

김용택 시인이 지키고 싶은 세상은 그가 살았던 진메마을처럼 자연과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는 '농촌 공동체'이다. 공동체의 파괴는 곧 농촌의 붕괴를 뜻한다. '헤어짐과 만남, 그리고 사랑의 완성'을 위하여 농촌 공동체를 복원하려는 그의 몸부림은 처절하기만 하다. 지금의 문명이 한참을 에둘러서라도 다시 돌아가야 할 곳으로 믿었기 때문일까.

"강으로 가는 길을 두고 / 강 건너로 징검다리를 놓아 / 산에 길이 열렸으니 / 사시장철 흐르는 물이 맑았더라. / 어디로든 길을 따라 / 사람들이 오고 가니 / 이 동네 저 동네 / 막힌 길이 없어 / 소와 쌀을 / 베와 쌀을 바꿔 썼더라."('섬진강 13' 부분)

"나도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것들과 헤어져 캄캄한 어둠속을 헤매이며 아픔과 괴로움을 겪었고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들과 만나고 또 무엇인가를 기다렸는지요.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아픔과 슬픔인지요 누님. (중략) 많은 것들과 헤어지고 더 많은 것들과 만나기 위하여, 오늘밤 나는 사랑 하나를 완성하기 위하여 그 불빛을 따뜻이 품고 자려합니다."('섬진강 4' 부분)


김용택의 시는 흙밭에 몸을 맡겨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토로한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서럽게 떠날 때 그는 조상들이 뼈와 살을 묻은 땅에서 그들의 영혼을 어루만지며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강물을 닮은 농민의 심성을 그려냈다. 서정적이며 솔직하게.

"강 건너 저 밭을 봐라 / 저게 저렇게 하찮게 생겼어도 / 저게 나다 / 저 밭이 내 평생이니라" ('밭' 부분)

"논두렁 위로 가지런한 벼포기 모양이 그분의 / 사는 멋이셨다 / 그 싱싱한 벼가 / 세상 부러울 게 없는 / 삶의 든든한 믿음이셨다 / (중략) 땅은 어머니였고 / 강물은 아버지였고 / 나라였고 사랑이었고 / 땅과 물은 그분의 전부였다"('그분' 부분)


섬진강은 이제 없다

다시 그의 시를 읽으며 만난 섬진강은 '쓰러지는 농촌'의 현실이며 '떠나가는 농민'의 애환이다. 지금의 한국농촌이 그런 모습이다. 땅에서 희망을 잃으면 "농촌은 끝났다"고 절규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시인은 괴로워하고 있다.

"피와 땀과 살을 섞었던 땅, 버림받고 무시당하면서도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다 했던 땅, 그래도 정 붙여 살았던 땅, 나이 서른 다섯에 이사라니. / (중략) 그의 텅 빈 집 앞을 애써 외면하고 지나며 이제 아무도 이사 들지 않을 꺼멓게 그을린 불빛 없는 그 이웃을 생각하며 우리들은 또 소쩍새 울음소리나 부엉새 울음소리에, 강물소리에 돌아눕고 돌아누우며 며칠 밤 잠을 설칠 것이다. 누가 또 떠나겠지. 누군가 또 떠나겠지. / 섬진강 물소리가 한번 큰 숨소리로 뚝 그쳤다가 힘겹게 이어졌다."('섬진강 16' 부분)

험난한 세월을 견디며 살아 왔으면서도 이제는 폐가만이 황량한 농촌 마을과 피폐해진 땅을 갈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껴안고 시인은 오늘의 현실을 씁쓸하게 바라본다. 그러면서도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가슴에 안고 논밭을 일구고 있는 사람들에게 거는 마지막 희망은 순결하며 강하다.

김용택 시인은 누구?

▲ 김용택 시인
ⓒ창작과비평사
"섬진강 강물을 따라 가다 보면 강 곳곳에 둑을 쌓아 유장하던 강굽이를 죽여버렸고, 오랫동안 강물 스스로 만들어 온 강기슭에 둑을 쌓고 강바닥을 훑어버린다. 세상에 그 어느 나라가 흐르는 강물을, 그 경관을 저렇게 무참하게 죽이는 나라가 있단 말인가. 달빛이 하얗게 부서지던 저 아름답고 눈이 부신 백사장을 저렇게 무참하게 죽이는 사람들이 또 있단 말인가."('섬진강, 그리고 청계천' 부분, 서울신문 2005년 10월 6일)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1948년 전라북도 임실군 진메마을에서 태어났다. 1969년 순창농림고교를 졸업했으며, 현재 덕치초등학교 선생님이다. 1982년 창작과비평사의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시 '섬진강'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섬진강의 맑은 물을 닮은 시인이다.

시집으로 <섬진강>(1985), <꽃산 가는 길>(1987), <누이야 날이 저문다>(1988), <그리운 꽃 편지>(1989), <그대 거침 없는 사랑>(1993), <강 같은 세월>(1995), <그 여자네 집>(1998)이 있다. 산문집은 <섬진강을 따라가 보라>(1994),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1997), <섬진강 이야기1·2>(1999) 등이 있다. / 김동식
"겨울 논길을 지나며 / 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추고 얼어 있는 / 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보면 / 따뜻한 가슴만이 진정 녹을 수 있음을 / 이 겨울에 믿습니다."('섬진강 15' 부분)

시인에게 섬진강은 이제 쓸쓸함의 상징이다. 섬진강은 이제 없다. 그 강가를 오고 가던 아이들도 사라졌다. 강물도 줄어들고 강을 건너던 징검다리도 없어졌다. 농촌공동체는 무너졌다. 그 틈바구니에서 섬진강 줄기는 지금 '개발'이라는 굴레를 쓰고 여기 저기가 파헤쳐지고 있다.

농촌이 몸살을 앓고 있다. 잊혀져 가고 있다. 우리 사회 모두가 농촌의 자정능력을 의심하거나 외면하고 있다. 20년 전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을 다시 읽으면서 깨달았다.

덧붙이는 글 | 섬진강은 백두대간의 한 줄기인 호남정맥을 따라 전북 진안군 백운면의 팔공산에서 시작된다. 이곳에서 출발한 강물은 임실군의 옥정호에 잠시 들렀다가 순창, 남원, 곡성 등을 굽이치고 지리산 허리를 휘감아 돈 다음 전남과 경남의 경계를 이루며 남해로 흘러간다.

<섬진강>
김용택 시집/ 창작과비평사/ 5000원


섬진강

김용택 지음, 창비(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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