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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오랑의 연오관이 일본 천황의 오모자관!(자료사진)
연오랑의 연오관이 일본 천황의 오모자관!(자료사진)
연오랑의 연오(延烏)는 천황과 신관들의 관인 오모자(烏帽子)를 의미하는 것을 몰랐고, 또 일본인들의 최고 신상인 천조대신 아마테라스 여신의 일본 이름이 세오리츠였던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아마테라스 세오리츠히메, 우리의 세오녀가 일본 최초 천황이 된 신무천황의 증조할머니였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떠난 뒤에 신라 아달라왕은 해와 달이 없어졌다고 사신을 일본에 보내어 그들이 되돌아오기를 청했다. 연오랑은 세오녀가 짠 비단[織細綃](=제례복)을 대신 주어서 신라 영일현에서 그 비단을 놓고 제사지내게 하여서 신라의 해와 달이 다시 정기를 찾았다. 신라왕은 그 비단을 귀비고에 관장했다. 이때, 아달라왕 5년 158년에 왜인이 신라에 내빙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또한 173년, 아달라왕 20년에 왜여왕 히미코가 사신을 보내 내빙했다.

우리의 <한단고기>와 비견되는 일본의 고서인 <수진전(秀眞傳)>에 실린 화가(和歌, 노래로 남겨진 역사다)에 의하면 천조대신에게는 12후라고 하는 열두 신녀가 있었다. 12후를 거느린 천조대신은 본래 남자다. 즉 연오랑이다.

연오랑(延烏)에서 연(延)은 고대 일본어에서 '일자(日子, 일본왕의 고대 존칭)'로 표기되는 '히쿠'로 발음되었는데, <위서동이전>에서 일본 대마도 등의 고대 왕칭이 다 히쿠(卑狗)였다. 연오랑의 나라 이름이 수진국이며 오사카에 있었고 <수진전>의 유래다.

열두 신녀 중에 세번째가 세오녀인데 연오랑이 먼저 일본에 가서 자리잡았기 때문에 세째가 되었다. 세오녀의 일본 이름은 세오리츠히메(瀨織津姬)인데 그녀는 제례용으로서 태양신의 사자 세 발 까마귀가 그려진 비단 자수를 놓았다. 세오리츠도 수놓는 여자라는 뜻이다. 먼 훗날 12신녀를 위한 오궁(五宮)을 지어서 사궁(四宮)에 각각 3여신을 모시고, 특별히 중궁(中宮)에 혼자 세오리츠히메를 모셨다. 세오녀가 천조대어신(天照大御神)이며 또 왜여왕 히미코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60년에 백제 초고대왕이 일본을 정벌했다. 이는 열두 신녀 중 네번째인 와카히미(稚日女命ㆍ113-160년)가 연오랑의 궁전에서 비단을 짜던 중에 살해당했기 때문에 연대를 알 수 있다. 이는 효고현 서궁시 증암정(兵庫縣西宮市甑岩町)에 있는 월목암신사에 남아 있는 그녀 무덤의 묘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단, 경자년(庚子年) 9월 20일 사망으로만 적혀 있으니 그 경자년이 어느 해인지를 추정하는 것은 전후 상황에 따른다.

이때 12명의 신녀 중에서 8명이 초고대왕의 포로로 잡혀서 시마네현의 팔중궁에 끌려가서 초고대왕의 자식 8명을 낳았다. 8명을 가두었기 때문에 8중궁이다. 세오녀가 낳은 초고대왕의 아들이 아메노오시호미이고 그의 손자가 일본 최초 천황인 신무천황(194~256)이었다.

한편 세오녀는 팔중궁에서 탈출하여 구주섬으로 가서 여인국인 야마대국을 세웠다. 초고대왕은 세오녀에게 시조검인 주몽검(都牟劍, =쿠사나기쯔루기草那藝之劍)을 내려주어서 세오녀에게 제사지내도록 했고, 지금까지 그 주몽검이 일본의 국보로 전해온다. 단, 주몽검이라고 하지 않으니 천조대신이 1000년 깍이고 백제에 굴복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고사기> 기록에 당시 주몽검(都牟劍)이라 부른 것은 분명하다. 일본에서는 고주몽을 도모왕(都牟王)이라 기록해왔기 때문이다.

왜여왕의 주몽검 - 쿠사나기쯔루기(자료사진)
왜여왕의 주몽검 - 쿠사나기쯔루기(자료사진)
247년 왜여왕 히미코(卑彌呼)가 100여세로 죽자 그녀의 증손자인 칠삭동이 난승미(難升美)가 구주섬을 나와서 대화(大和) 오사카에서 일본 팔도의 왕권을 놓고 초고대왕의 아들인 구수대왕(仇須大王ㆍ~234)의 여러 아들들과 쟁패하였다.

히미코 왜여왕의 거대한 산능은 시코쿠섬(四國島)의 덕도현(德島縣) 기연산(氣延山)에 있다. 전방후원 고분이며 후원부 정상에는 특이한 오각형의 제단이 있다. 기연산은 히미코의 본남편이던 연오랑(延烏郞)을 기린 산이름으로서 기연산(紀延山)이었을 것이다. 기연산에 야쿠라히메(八倉比賣) 신사가 있고 그 뒤에 히미코의 능이 모셔져 있다. 야쿠라신사는 팔오(八烏) 즉 큰 카라스(烏), 대오(大烏), 연오(延烏)에서 유래된 것이다.

야쿠라히메 신사에는 247년 당시의 히미코를 위한 장례식 장의(葬儀) 행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기연산의 다른 이름은 기연산 이외에 스기오(杉尾)산, 시야(矢野)산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세오녀(細烏女), 세오리츠히메의 세오(細烏)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앞 바다는 세호(瀨戶) 내해(內海)라고 부른다.

일본과 한반도의 주요한 역사 사실은 이렇게 왜곡조작된 일본 역사책이 아니라, 역사 왜곡 이전의 전통을 간직한 고대 신사 기록과 조작할 수 없는 천황 고분의 묘비 속에 묻혀 있고 이제 올바른 역사 정립을 기다리고 있다. 백제대왕으로는 최초로 일본을 정복한 초고대왕과 그 아들 구수대왕의 일본내 신사 기록들도 다음에 이어진다.

세오녀 아마테라스 왜여왕 히미코의 상상도
세오녀 아마테라스 왜여왕 히미코의 상상도 ⓒ 연종열

덧붙이는 글 | 연재를 시작하며

자유인에게는 역사가 있고 역사는 자유인의 거울이다. 자기 조부 이름도 모르고, 평생 지배만 당하는 게 노비의 삶이고, 자기 뿌리를 모르는 조선왕조가 바로 노예왕조의 역사였다. 그리하여 거짓 역사를 가진 일본이 역사가 없는 조선을 지배했다. 아직도 제 역사를 모르는 지옥 현실의 이 노예 나라에 새 주인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역사는 실증 과학이고 특히 시간의 과학이다 

백제사와 일본사는 그래서 고대 기록과 실증에 의해서 다시 쓰여야만 한다. 현대에 왜곡된 백제의 잘못된 지리를 당대의 기록인 일본 책들과 당대 일본의 각 곳 '신사 기록'과 천황들의 '고분 묘비 연대'의 실증, 그리고 일본의 고대 비서秘書인 <수진전秀眞傳> 등의 보완으로 바로잡는다. 

천황 고분 묘비 연대 해석문은 일본학자 이케다池田仁三씨의 '대화고분릉주大和古墳陵主たち'과 '컴퓨터 화상해석畵像解析'에 의존하였다.

1990년대에 이루어진 천황 등의 고분 능비에 대한 연대 발견은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엄청난 역사 조작들을 극명하게 밝혀준다.

현재 일본 천황 역사는 거의 공식적으로 기원전 660년의 신무천황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런데 그 신무천황의 고조할머니로서 일본의 가장 존경받는 신인 아마테라스의 <일본서기> 기록에 신라와 고구려가 등장하고 고주몽의 주몽검이 등장한다. 따라서 신라, 고구려 역사가 무려 1000년이나 상향 조정될 수 없다면, 기원전의 일본 공식 역사는 세계적인 망상이다.

서기 157년, 신라에서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일본에 건너가서 연오랑은 태양신을 모시는 아마테라스, 즉 천조대신天照大神이 되고, 세오녀는 열두 신녀神女의 우두머리인 천조대어(미)신天照大御(=美)神이 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연오랑이 일본의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면서 일본의 어느 왕인지를 몰랐으니, 조작된 일본사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연오랑의 연오延烏는 천황과 신관들의 관인 오모자烏帽子를 의미하고, 세오녀가 천조대어신의 일본 이름인 세오리츠히메瀨織津比賣인 것을 몰랐던 것이다. 

또한 서기 160년에 백제 6대 초고대왕肖古大王(재위 166~214)이 일본을 정벌하니 아마테라스오미를 비롯한 12신녀 중에서 8신녀가 초고대왕의 포로가 되어 8명의 자식을 낳아준다. 초고대왕을 일본에서는 건국신 스사노오須佐之男라고 했는데, 일본 최초 천황인 신무천황神武天皇의 증조부다.

세오녀細烏女는 구주九州로 탈출하여 여인왕국을 세워서 왜여왕 히미코卑彌呼(~247)가 되었고, 초고대왕은 시조검인 주몽검都牟劍(=쿠사나기쯔루기草那藝之劍)을 내려주어서 세오녀에게 제사지내도록 하였고 지금까지 주몽검이 전해온다.

247년 왜여왕 히미코卑彌呼가 100여세로 죽자 그녀의 증손자인 칠삭동이 난승미難升美가 대화大和에서 일본 팔도의 왕권을 놓고 구수대왕仇須大王(~234)의 아들들과 쟁패하였다.

초고대왕은 일본에서 스사노오신須佐之男인데, <일본서기>에서 신라에서 왔다고 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구수대왕은 대국주신이라고 하는데 대국주신사大國主神社 기록에는 그가 고구려로 돌아! 갔다고 하였다.

기원전 660년이라고 조작된 칠뜨기 난승미難升美가 247년에 신무천황神武天皇(194-256)이 되었으나, 군웅들의 도전이 지속되고 257년에는 13살의 왜여왕 일여壹與(244-283)를 세워서 다시 평화를 찾는다. 이때 할거한 군웅들은 신무천황의 아들 수정천황綏靖天皇(243-292)과 초고대왕의 손자 안녕천황安寧天皇(222-270), 구수대왕의 아들 의덕천황懿德天皇(180-244)과 사반대왕沙伴大王, 즉 효소천황孝昭天皇(202-268), 그리고 사반대왕의 아들 효안천황孝安天皇(222-298)과 효원천황孝元天皇(228-273) 등이었다.

285년 만주 요서遼西 대릉하大凌河(=고대 이름 백랑수白浪水)에서 부여국왕 의려依慮가 선비족 모용외에게 패퇴하여서 일본으로 와서 효령천황孝靈天皇(261-316)이 되었다. 300년에는 의려의 뒤를 이어서, 요동遼東에서 새로이 부여국왕이 되었던 의려의 아들 의라왕依羅王마저도 부여 유민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와 숭신천황崇神天皇(277-318)이 되었다.

그러자 백제 걸대왕契大王(273~359)과 근초고왕자近肖古王子(295~375)가 도일하여 일본을 재평정하고 각각 경행천황景行天皇과 일본무존日本武尊, 즉 야마토타케루가 되었다. 

백제 근구수대왕近仇首大王(320~394)을 모시는 구도신사久度神社가 남아 있고, 일본무존 등 백제 4왕을 모시는 평야신사平野神社에서는 일본무존이 근구수대왕의 부왕이라 전하니, 바로 근초고대왕인 것이다. 근구수대왕은 일본의 저 유명한 응신천황應神天皇이 되었다.

광개토호태왕이 대마도에 임나연방을 세워 대마도와 구주九州 섬 등 10국을 통치하니 그의 아들 고진高珍이 구주九州 고구려의 왕이 되어, 거류미시 고량신사高良神社에 기록을 남겼고, 그는 결국 인덕천황仁德天皇(337~419)을 죽이고 대화大和에 들어가서 윤공천황允恭天皇(393~453)이 되었다.

그후 개로대왕蓋鹵大王(429~475)이 도래하여 458년에 고구려계 웅략천황雄略天皇(417~479)을 몰아내고 일본을 다시 백제에 복속시켰고, 무녕대왕武寧大王(461~523)은 일본 구주九州를 떼어다가 백제 영토로 병합하였다. 이후 6세기부터 7세기말까지 구주는 백제 땅이었다.

일본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백제왕선광百濟王善光이 일본의 30대 민달천황敏達天皇(538~585)의 후손이라고 하고, 동시에 같은 책에서 백제왕선광을 백제 의자대왕義慈大王(593~660)의 아들이라 하였다. 결국 민달천황을 비롯한 일본 천황은 모두가 백제 왕손이라는 것이다. 기실로 민달천황은 백제 성명대왕聖明大王(~554)의 아들이었다.

백제 의자대왕은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일컬었는데, 8세 때인 서기 600년에 구주백제의 왕에 올라서 스스로 왜왕이라고 국서를 수나라에 보내서 '해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지는 나라의 천자에게'라는 유명한 글을 남겼고, 구주에서 처음 12관위제官位制를 만들어 시행하였다.

이때 대화의 성덕태자聖德太子가 구주를 뺏으려 하니 의자대왕은 거꾸로 대화를 점령하여 603년에 일본에도 12관위제를 시행시켰다. 그리고 629년에는 대화의 34대 서명천황舒明天皇이 되고 64! 1년에는 백제대왕에 오르니, 이때 대화조정에는 그의 왕비인 황극천황皇極天皇(594~661)과 제명천황齊明天皇(603~663)이 차례로 즉위하여 의자대왕 부부가 함께 백제와 일본을 통치하였다.

백제가 망한 뒤에 백제 부흥을 시도하던 부여풍장扶餘豊璋(622~686)은 백촌강에서 패전하고 일본에 돌아가서 40대 천무천황天武天皇이 된 것이 그의 황극천황 추도시追悼詩에 나타난다.

그런데 천무천황의 패역한 아들 사인친왕舍人親王(676~735)은 <일본서기>를 지어서 역사를 조작하니, 부모국인 백제의 통치를 역사에서 삭제하고 호적을 파내며 환부역조換父易祖 하였고 오늘! 까지 1300년간 일본 국민을 속여오고, 그 결과로 일본의 후인들을 대대로 자폐적, 망상적 민족으로 길러내고 있으니, 오늘날 세계 속에 화합할 길이 없어 안타깝다.

진실이 때로는 아프지만 무엇보다 소중하고 때로는 더 재밌기도 한 것이다. 이 책에서 새로 발굴되는 일본 역사는 그래서 일본인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일본 민족의 진정한 자존심은 진실의 토대에서 자라나서 서로 존중 받게 되는 것이다. 거짓된 역사 위에서, 세계와 고립되는 헛된 자만심을 키워서는 스스로의 미래를 망칠 수밖에 없을 것이니 오늘 겸허하게 배우고 깨우침의 길을 따라서 동아시아 제국의 번영에 함께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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